템빨 35권 - 16화
‘뭐라고?’
그리드가 파란색 책자를 꺼내 든 순간, 하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저 책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전....!’
쏴아아아아아-
그리드의 몸이 녹빛에 휩싸인다. 전투의 치열함을 증명해 주었던 상처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하오의 동공이 떨렸다.
‘성직자를 선택했다고?’
캐릭터 선택 창에서 하오는 성직자의 가치를 낮게 봤었다.
마법 지팡이를 얻는 시점부터 독보적인 캐리력을 발휘하는 마법사와 활과 화살을 직접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작자야말로 뛰어난 직업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그리드라면 제작자를 선택할 줄 알았다.
전설의 대장장이인 그의 정체성을 고려한 추측이었다.
한데 성직자라니?
하오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드, 설마 너는 처음부터 간파했던 거냐?’
하오가 성직자를 안 좋게 본 것은 어디까지나 캐릭터 선택 창에서의 이야기다.
배틀 필드에 입장한 직후, 미니 맵에 표기되어 있는 수십 개의 <신전>을 목도한 그는 깨달은 바 있다.
성직자야말로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직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왜?
순전히 운에 의지해서 얻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던 경전, 사실은 전략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으니까.
만약, 어떤 성직자가 대량의 경전을 확보하게 될 경우 그야말로 최대의 난적이 될 거라고 하오는 예상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경계해야 하는 하이 랭커 중에서 성직자를 선택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캐릭터 설명만 보고 경전의 확보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경전은 맵 곳곳에 존재한다고 서술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정 구역에서 확보할 수 있다는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랭커들 또한 성직자를 낮게 평가했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그리드는 예외였던 것이다.
그는 성직자를 선택했다.
‘그리드 너는 내가 보지 못한 몇 수 앞을 읽은 것일 테지. 과연 내가 인정한 사내답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
전율하고 감탄하는 하오.
그의 생명력은 이제 7밖에 남지 않았다.
반면 경전을 읽은 그리드는 최대 15의 생명력을 확보한 것으로 추측됐다.
‘내가 15번 때렸으니까.’
처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패배라는 단어가 하오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하오는 포기라는 단어를 몰랐다.
‘아직 승산은 있어. 그리드가 벌써부터 2개 이상의 경전을 확보했을 가능성은 무척 낮다.’
1대 맞을 때마다 2대, 3대씩 때리면 그만!
단창을 고쳐 쥔 하오가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미 그는 파그마의 검무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리드가 연(聯)과 파(派)의 보법을 사용할 때는 휘어 치면 되고, 살(殺)의 보법을 사용할 때는 더 빠른 찌르기로 응수하면 된다. 회(回)의 보법을 사용할 때는 공격하지 말고, 극(極)의 보법을 사용할 때는 거리를 벌리면 돼.’
하오는 전투의 귀재라고 칭송받는 인물답게 싸움에 능숙하다. 적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뛰어난 분석력과 순발력을 갖춘 그에게 있어서 준비 동작이 긴 파그마의 검무를 파악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하오는 그리드가 검무를 펼칠 때 처음으로 밟는 발의 방향만 예의 주시하고 이에 대처하면 의외로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순간.
터엉-!
그리드가 힘차게 일보 내딛었다. 단순히 이동하는 것과는 다리에 실린 무게가 달랐다.
살(殺), 혹은 극(極)의 전조였다.
빠르게 파악한 하오가 오른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드의 발이 이후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똑똑히 지켜본 후, 찌르기나 회피로 대처하기 위해서 사전 동작을 취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리드는 다시 일보 전진하고 있었다. 하오와의 거리를 필요 이상으로 좁히고 있었다.
‘극(極)이다!’
간파한 하오!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격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생명력이 적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며 뒤로 한 발 더 물러선다.
회피 동작을 선택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서걱-!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오가 서있던 자리로 그리드의 베기가 떨어졌다.
둔기를 사용했을 때보다 한 차원 높은 예리함이 깃든 공격이었다.
하오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지금!’
반격의 때다.
하오가 오른쪽 발을 크게 내딛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창은 섬광처럼 뻗어지고 있었다.
허공을 베고 있는 그리드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한 창격이었다.
하오는 그리드의 허점을 완벽하게 찔렀다고 자부했다.
한데 그 순간.
우뚝!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리드의 검이 허공에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어서 그리드의 신형이 하오에게 가까워졌다.
베기가 찌르기로 변환되는 순간이었다.
극살(極殺)의 묘리다.
‘뭐?’
푹-!
하오의 창이 그리드의 가슴을 찔렀고,
푸우욱!!
그리드의 검은 하오의 가슴을 찔렀다.
이후의 연계는 당연히 그리드가 빨랐다.
하오가 창을 회수하기 전에 먼저 검을 회수한 그리드가 2격 째를 날렸다.
검의 리치가 창의 리치보다 짧기 때문에 가능한 속도였다.
서걱!
“큭....!”
하오의 어깨가 크게 베인다.
그리드는 재차 검을 회수하였고, 이미 창의 회수를 완료한 하오는 뒤늦게 2격을 날렸다.
하오는 냉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번에 똑같이 2대 때릴 수 있으면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바,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하지만 하오의 2격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쩌정!!
하오의 창이 자신의 가슴에 도달하기 직전.
회수하던 검을 허공에서 선회시킨 그리드가 하오의 창을 막아 낸 것이다.
회(回)였다.
‘어떻게 된 거지?’
하오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그리드의 검무가 보다 다양해진 것은 물론이고, 종전보다 한 타이밍씩 빠르게 연계되었으니 놀랄 노자였다.
남들이 봤을 때는 작은 변화일지 몰라도, 그리드를 직접 상대하고 있는 하오의 입장에서는 그리드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황하는 그에게.
“검무야, 검무. 둔기를 들었을 때보다 검을 들었을 때 더 적합한 동작인 건 당연하지.”
그리드가 상황을 알려 준다.
그렇다.
둔기를 버리고 장검을 무장한 순간부터 그리드는 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검을 뺏기면 안 됐다!’
그리드는 처음부터 하오를 난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전투 개시와 동시에 치열하게 검을 노렸던 것이다.
반면 하오는 그리드를 자신보다 아래로 보았다. 처음에는 굳이 검에 집착하지 않았다.
‘만용의 결과다!’
하오는 자신과 그리드의 차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드는 겸손하고, 자신은 오만하다.
그 차이가 작금의 결과를 만든 것이다.
하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는 다소 다르다.
<웨폰 마스터리>를 기반으로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 왔던 하오는 탁월한 재능 덕분에 그 모든 무기에 능숙했다. 그렇기에 특정 무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이다.
반면 그리드는 하오와 달리 재능이 없었다. <파그마의 후예>답게 그 또한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 왔지만, 그는 하오와 달리 재능이 없는 탓에 검 외의 무기에는 크게 익숙해지지 못했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검에 집착했다.
재능을 지닌 자와, 갖지 못한 자.
두 사람은 여기서부터 나뉜 것이다.
딱히 그리드가 겸손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 누구도 모를 진실이었지만 말이다.
‘이길 수 없어.’
하오가 판단을 내렸다.
그리드가 2개의 검무를 이어서 사용할 때부터 직감한 사실이다.
‘신체 능력 보정도 없이 저 복잡한 검무를 실현해 내다니... 과연 크라우젤과 비견되는 재능의 집약체답다.’
하늘과 땅의 차이!
깨달은 하오가 손에서 무기를 버렸다.
“내가 졌다. 죽여라.”
“응?”
끝까지 저항할 줄 알았던 상대가 항복하자 그리드는 당황했다.
“왜 항복해? 질 땐 지더라도 나한테 되도록 많은 피해를 누적시켜야지 덜 억울하지 않아?”
“내가 만약 너를 싫어했다면 그랬겠지.”
하오는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한국을 찾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어차피 질 싸움에서 굳이 끝까지 그리드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기보다는 응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눈치챈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역시 폰이네. 고맙다.”
“.....”
이 녀석, 여태까지 나와 수십 합을 겨뤄 놓고도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약한지 알게 된 하오가 좌절했다.
‘내 소양이 한참 부족하긴 부족하구나.’
한때 하오는 그리드의 적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하오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다면 이번 승부에서 하오의 정체를 파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하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오가 그리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적이 없다는 반증이다.
하오는 이게 다 스스로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그리드가 하오를 폰이라고 착각하는 이유는 하오의 실력을 하찮게 봐서가 아니다. 도리어 반대였다.
“어때? 폰 맞지? 창을 그렇게 기가 막히게 쓰는 사람은 폰밖에 없으니까.”
“....하하, 나 하오다.”
굳었던 얼굴을 편 하오가 함박웃음 짓는다.
***
-하오 저 한심한 놈!
-끝까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다니...! 대국의 망신이다!!
중국인 시청자들이 분개하였다.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랭커가 고작 ‘소국’의 랭커 따위에게 패배한 것으로 모자라서 항복까지 하였으니 울화가 치밀었다.
-하오는 중국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
-옳다! 15억 중국 인민들을 대표하는 자가 한국 대표에게 무릎을 꿇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중국이 한국의 아래라고 자처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하오를 추방해라!!
-빵쯔들에게 보내 버려!!
인터넷이 난리도 아니다.
세계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서 분노한 중국인들이 활개를 쳤다.
물론 모든 중국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특유의 이기심과 오만함으로 중국이라는 나라를 망신시켰다.
-하오 불쌍하네.
-그러게. 여태까지 하오가 중국에 안겨 준 메달만 해도 몇 갠데... 고작 한 번의 결과로 완전 매국노가 돼 버리냐.
-그리드가 한국인이라는 점에 특히 예민한 것 같은데? 중국인들이 한국을 어지간히 무시하긴 하는 듯.
-애초에 그리드랑 하오의 구도를 한국과 중국의 구도로 받아들이는 것도 웃기는 거 아니냐? 어차피 개인전인데.
-맞아.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인정하는데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각국 네티즌들이 중국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그때 한국인 네티즌들은 엄청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갓리드 혼자서 대륙을 뒤집어 놓네ㅋㅋㅋㅋ 진짜 대박이다.ㅋㅋㅋㅋ
-한국인들이 유전적으로 뛰어나긴 한듯. 인구수도 별로 없는데 분야마다 한 명씩 꼭 독보적인 존재가 태어나는 걸 보면.
-아, 그리드 너무 좋아. 그리드 덕분에 국가대항전 때마다 너무 행복함.
-어? 저거 뭐임?
-헐. 큰일났네.
잔뜩 들뜬 채 배틀 필드를 시청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드와 하오가 마주보고 있는 그때, 한 호주 대표가 수풀에서 활로 그리드를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기습에 당하기 직전이었다.
-피해!
-눈치 좀 채라!!
조급해진 네티즌들이 아무리 채팅을 쳐 보고, 시청자들이 외쳐 봐도 그리드에게 그 내용이 닿을 리 만무했다.
그리드는 이미 패배를 인정한 하오를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지, 도리어 한편을 먹고 듀오로 활동하는 편이 좋지 않을지 고민할 뿐이었다.
그리고.
터엉-!
수풀을 꿰뚫고 날아온 화살이 그리드에게 적중했다.
[2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큭....!”
여태까지와는 다른 파괴력!
당황한 그리드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때였다.
“이걸 받아라. 나를 꺾은 이상 반드시 우승해 주면 좋겠군.”
품에서 꺼낸 파란색 책자를 그리드에게 넘긴 하오가 수풀로 달려갔다.
푹-!
하오의 가슴에 화살이 꽂힌다.
이제 하오의 생명력은 3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경고의 뜻인지 시야가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오는 멈추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정확히 이동해서 자신과 그리드를 기습한 상대에게 창을 꽂아 넣었다.
“제길...! 거저먹을 줄 알았더니! 너희 둘 다 개피 아니었어?”
창에 찔린 호주 대표가 치를 떤다. 다른 대표와 싸우고 오는 길인 그 또한 생명력이 적은 상태였다.
스파아아앗-!
짧은 공방 끝에 하오와 호주 대표가 동시에 잿빛으로 산화하였고.
“하오!!”
그리드는 하오 덕분에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배틀 필드의 생존자 수는 이제 400명이 채 안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