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5권 - 15화
‘이 저급한 육체에는 도무지 적응이 어렵군.’
하오는 하이랭커이기에 앞서서 무술 유단자다. 현실에서 그는 세계 각국의 무술을 극한까지 연마한 괴물이었다.
Satisfy에서도, 현실에서도 초월적인 육체를 지닌 그의 입장에서는 배틀 필드에서 새롭게 부여 받은 육체에 많은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Satisfy로 치면 고작 10레벨 초보 캐릭터의 신체능력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썩어빠진 육신. 무겁고, 느리고, 약하다. 하오의 인식은 이미 저 멀리 가있는 반면, 몸은 여전히 제자리에 있다. 하오는 온 몸에 족쇄가 채워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입장에선 충격이었다.
‘하지만.’
하오는 상기한다.
지금의 이 불합리한 상황,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 모두 똑같이 겪고 있는 것임을.
혼자서만 불리해진 것이 아니라 공평한 상황인 것이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린 하오가 눈앞의 사내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일단 크라우젤은 아니다.’
크라우젤은 하오조차도 선망하는 최강자였다. 그만한 인물이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질 않았다.
사내의 손에 쥐어진 둔기를 확인한 하오가 몇 명의 인물을 특정해냈다.
‘데미안, 반트너, 토반, 부바트, 셰인, 로넘....’
주력 무기로 둔기를 사용하는 하이랭커들.
그중에서 데미안은 검을 애용하는 인물이었으나, 성기사가 본업이라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둔기에도 익숙할 가능성은 무척 높았다.
골똘히 생각해보던 하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데미안.’
하오가 평가하기로 반트너와 토반, 그리고 부바트, 셰인, 로넘 등은 자신보다 두 수, 세 수 아래의 실력자들이었다. 그 사실을 그들 본인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고 하오는 확신했다.
‘그들이라면 내 실력을 보고도 감히 덤비지 못했겠지.’
반면 데미안은 다르다.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와 접전을 펼쳤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데미안은 하오도 인정하는 실력자였다.
‘어디까지나 Satisfy에서의 이야기지만.’
Satisfy에서 데미안은 뛰어난 성기사임과 동시에 교황이다. 교황으로써 그의 스킬 구성은 가공할 수준으로써 플레이어의 영역을 초월한 경지였고, 그렇기에 하오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배틀 필드다.
데미안의 사기적인 스킬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 별개의 세상인 것이다.
‘동일한 조건에서 싸우면 내 쪽이 확실히 위다.’
스팟-!
장담한 하오가 창을 직선으로 꽂았다.
창술의 기본 찌르기였다.
검술처럼 20년 이상 꾸준히 연마한 것은 아니지만, 창술 또한 상당 수준으로 단련한 그였다. 더군다나 그는 Satisfy에서도 <웨폰 마스터리>를 기반으로 창술을 종종 사용해왔다. 고난이도 창술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근데 왜 하필 기본 찌르기를 사용하냐고?
당연히 저급한 육신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하오는 현재의 육체로 고난이도 창술을 구사하는 건 도리어 역효과라고 판단했다. 빈틈을 드러낼 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최대한 익숙하고 효율적인 기본 동작에 의지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결과.
푸욱-!
하오의 기본 찌르기는 견고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오가 데미안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사내.
즉, 그리드는 하오가 내지른 창에 가슴을 그대로 찔리고 말았다.
최단의 경로를 이용해서 날아온 하오의 창에 그리드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하오의 창이 날아오는 것을 인식함과 거의 동시에 하오의 창은 그리드의 가슴에 도달했으니까.
‘이대로 승기를!’
하오가 곧바로 창을 회수했다. 연속 찌르기로 데미지를 누적시킬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수한 창을 재차 내지를 수 없었다. 그가 창을 회수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리드가 몸을 앞으로 날린 까닭이다.
그리드와 하오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리드의 둔기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거리까지 말이다.
펑!
그리드가 달려들면서 휘두른 둔기가 하오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다.
‘역시, 위협적이지 못한 공격으로는 적의 행동을 차단할 수 없군.’
귓전에 울리는 파공성을 들으면서, 하오는 고작 1의 고정 데미지밖에 입히지 못하는 단창에 아쉬움을 느꼈다. 만약, 자신의 공격이 상대방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강력했더라면. 그래도 눈앞의 상대는 이토록 용맹하게 달려들 수 있었을까?
푸푹-!
뒤로 물러남으로써 그리드의 공격을 피한 하오는 창을 내지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상태였고, 망설임 없이 또 찌르기를 날렸다.
그리드는 맞았고, 또 그대로 달려들었다.
펑-!
그리드의 둔기가 또 다시 하오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다.
이번에는 몸을 크게 비틀어서 그리드의 공격을 회피한 하오.
뿌드득!
자신의 허리가 꺾이는 방향으로 회수하였던 창대를, 허리를 원위치에 돌려놓으면서 크게 휘두른다.
빠각--!!
그리드의 팔뚝을 강타하는 하오의 창대!
순식간에 3의 데미지가 누적되는 그리드였다.
‘반트너나 토반인가?’
예상보다 수준이 낮다.
하오는 눈앞의 상대가 데미안이 아님을 깨달았고, 시청자들은 탄식했다.
-아.... 한 대도 못 때리고 세 대를 얻어맞네.
-너무 뻔한 결과임. 그리드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오에게 덤빈 거지?
어리석은 사람은 용기와 만용을 착각하고 일을 그르치는 법.
지금의 그리드가 딱 그랬다.
시청자들은 하오의 실력을 숨어서 뻔히 지켜본 주제에 굳이 하오에게 결투를 신청한 그리드가 참으로 답답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는 당최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화를 자처한 것일까? 미쳤거나, 바보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모두가 생각하는 그때였다.
처억-!
하오의 창대에 팔뚝을 강타 당한 그리드.
하오가 창을 다시 회수하는 틈에 두 보 물러난다. 그리고 하오가 다시 창을 내지를 때 좌로, 우로 한 보씩 움직인다.
단순히 회피 동작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움직임이 쓸데없이 요란했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순간.
‘이 움직임은....!’
하오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고.
-어...?
-왠지 눈에 익은데?
시청자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드의 둔기는 1회.
펑-!
2회.
퍼엉-!
3회.
콰작!!
하오를 가격했고, 하오는 이중 한 방을 허용하고 말았다.
반면 그리드는 하오의 찌르기를 모조리 회피했다.
좌우로 현란하게 움직이며 전진하는 파그마의 검무, 연(聯)의 묘리 앞에서 고작 10레벨 캐릭터의 찌르기가 무력화된 것이다.
“그리드....!”
자신이 여태까지 누구와 싸우고 있었는지 드디어 알게 된 하오가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친다.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몸에 익은 동작이 최고네. 그치?”
하오가 찌르고, 휘두르는 기본 동작에 익숙한 것과 같은 이치로 그리드는 파그마의 검무에 익숙했다.
지난 수 년 동안 반복해서 사용해온 파그마의 검무야말로 그리드의 ‘기본기’였다.
그리드는 상기했다.
스킬명만 외치면 발동하는 다른 스킬들과 다르게 ‘과정’을 거쳐야하는 단점을 지닌 이 빌어먹을 스킬, 파그마의 검무를 자신이 어떻게 응용해왔는지.
그리고 Satisfy에서 쌓아온 경험을 이곳 배틀 필드에서 녹여냈다.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불합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축적시켰던 경험이 지금 이 순간 강력한 무기로 승화된 것이다.
“파그마의 검무.”
그리드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 번 이상 반복해온 보법의 사용은 능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오에게 접근하는 그의 움직임, 무술 고수인 하오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이동이 아니었다. 내공이 내포 된 회피기이며 돌진기였다.
그렇기에 위축되고 말았다.
하오의 뛰어난 안목이 지금 이 순간 도리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살(殺)!”
퍼엉-!!
대상에게 거침없이 돌진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는 기술.
Satisfy와 달리 데미지는 1에 불과했으나, 외부로 표출되는 기세는 무섭다.
하오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배틀 필드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착각에 불과하다.
[1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큭!”
마치 죽은 사람처럼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리드의 공격에 얻어맞았던 하오.
알림창을 보고 현실을 상기한다. 냉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미 그리드의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무한 파그마의 검무다!!”
마나 소모 없음!
재사용 대기 시간 없음!
그리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보법을 밟았다. 연(聯), 살(殺), 파(派), 극(極), 회(回)가 각자 지닌 특징을 상기하며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하오의 공격을 피하고, 막고, 반격하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퍽!
푹!
쩌저정!!
그리드의 공격은 이제 3회 중 1회가 적중했고, 필중을 자랑하던 하오의 공격은 3회 중 1회가 적중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경지가 일시적으로나마 같아진 것이다.
치열한 공방을 지켜보는 해설진과 시청자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드가 하오랑 막상막하라니....
-이게 용쟁호투인가 그거임?
-와, 그리드 개멋있어. 템빨 없는데도 최고다.
-그리드 컨트롤 솜씨가 템빨 덕분이었다고 지껄이던 빨무새들 다 어디 갔냐?
그리드는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전설이라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왕이 되었고, 어떻게 명예의 전당에 올랐는지.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들과 싸워서 패배하고, 승리하며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하오를 상대하며 세상에 알린다.
자신 또한 하이랭커임을!
“으랴아아아아아앗!!”
“크윽....!”
펑-!
펑! 퍼펑!!
흥분한 것인가.
맹수처럼 포효하며 계속해서 둔기를 휘두르는 그리드에게 하오는 점점 더 어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단창의 긴 리치를 유리하게 활용할 수 없게끔, 데미지를 입으면서까지 바짝 접근해서 둔기를 휘두르는 그리드는 정말로 위협적이었다.
끝이 두껍기 때문에 비교적 넓은 공격 범위를 자랑하는 둔기를 초근접 거리에서 완벽하게 피한다는 건 제아무리 하오라도 어려웠다.
‘역시 그리드...!’
이미 제2회 국가대항전부터 그리드를 인정하였던 하오다. 만약, 자신이 크라우젤이 아니라 그리드를 먼저 만났더라면 그리드를 선망하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했었을 정도로 그는 그리드를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승리를 포기하진 않는다.
‘그 타고난 재능으로 둔기의 활용법을 완벽히 파악한 것 같다만.’
힐끗.
단창을 크게 내질러서 그리드와의 거리를 일시적으로 벌린 하오의 시선이 그리드의 등 뒤쪽으로 향했다.
오두막이 있는 쪽이었다.
싸우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리드가 오두막을 등지고 있었다.
‘초반에 충분한 격차를 벌려놓았다. 결국에는 내가 승리하게 될 거야. 하지만 이 이상 피해를 입는 건 곤란해.’
자신이 앞서 쓰러뜨렸던 경쟁자가 떨어뜨린 장검이 하오의 시선에 포착된다. 오두막 입구 쪽이다.
하오는 저 장검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리드의 초근접전에 충분히 대항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더 이상 큰 피해 없이 그리드를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창보다 검이 훨씬 더 익숙한 그였으니까.
다만, 문제는.
“우리의 위치가 왜 이렇게 변한 거라고 생각해?”
그리드는 처음부터 검을 노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리드가 오두막 쪽에 가까워진 이유, 그리드가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이다.
반면, 하오가 검에 집착한 것은 한참 뒤였다. 처음에는 검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창만으로 상대를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게 패인이 되었다.
덥썩!
하오가 거리를 벌린 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검을 집어든 그리드!
절망하는 하오에게 웃어준 그가 다른 한 손에 경전을 펼친다.
동시에.
쏴아아아아아아-
그리드의 몸이 녹빛에 휩싸이며 생명력이 회복됐다.
여기서도 템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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