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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82화 (577/1,794)

템빨 35권 - 14화

누군가는 처음부터 무기를 찾아 헤맸고, 누군가는 안전하다 생각되는 장소에 몸을 숨겼다. 또한 누군가는 그들을 쫓아서 킬을 올렸다.

은신과 수색, 패퇴와 추격, 습득과 약탈이 쉬지 않고 반복되는 것이다. 무려 1,500명의 생각과 전략이 교차하는 이곳에 안전지대는 없었다.

배틀 필드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시작 단 20분 만에 생존자가 900명 단위로 줄었다.

시야 한쪽에 표기되는 생존자 수를 확인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10만 평이라기에 더럽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10만 평의 대지는 컸다. 어느 지방의 읍내 절반 규모쯤은 됐다.

곳곳에 언덕이 솟아 있고 지하도가 존재하며, 다양한 건축물과 숲, 계곡 등이 있는 배틀 필드에 처음 입장한 순간, 그리드는 3시간 안에 과연 몇 명이나 죽을지 의문을 느꼈다. 대부분의 인원이 서로를 찾아 헤매다가 제한 시간이 끝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1,500명의 인원이 서로 쫓고, 숨고, 격돌하기에 있어서 10만 평의 대지는 작은 감이 있을 정도였다.

경각심을 품고 미니 맵을 펼친 그리드가 다음 이동 경로를 물색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은 일단 패스.’

현재 그리드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은 110미터 거리에 있었다. 그리드가 경전을 확보했던 신전과 가장 인접해 있는 것이다.

그리드는 그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신전에 무사히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신전으로 이동해서 똑같이 따라했을 공산이 커.’

현재 그곳은 아비규환일 것이다. 처참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중일 터다. 굳이 찾아가는 건 위험을 자처하는 일밖에 안 됐다.

‘지하도를 이용할까?’

배틀 필드에는 지하가 있었다. 곳곳에 입구가 존재했기 때문에 입장하기가 쉬웠으며, 미니 맵에는 지하도의 상세 구조가 표기되지 않아 은밀한 감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하가 가장 안전한 구역 같았다.

‘그래서 안 돼.’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이미 지하로 피신한 사람은 많을 테고, 그들 또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을 터였다.

움찔.

미니 맵을 펼친 채 골똘히 생각해 보던 그리드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손이 뭔가 허전했다.

‘그러고 보니 맨손이었구나.’

우선 무기가 필요하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다.

상기한 그리드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우거진 수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낱낱이 파헤쳤다.

무기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메이스네.”

가시덩굴 사이에 놓여 있는 둔기를 찾아서 손에 쥔 그리드가 몇 번 휘둘러봤다. 둔기 특유의 묵직함은 없었다. 평범한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었다. ‘<활>과 <마법 지팡이>를 제외한 모든 무기의 위력은 일치한다.’는 공식을 지닌 배틀 필드에서 무기마다 특징이 두드러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다소의 차이는 있겠군.’

그리드는 둔기의 총장이 50센티미터라는 부분에 주목했다. 장검의 평균 길이보다 훨씬 짧은 것이었다. 실제로 신전에서 마주쳤던 여성이 무장하고 있던 검보다 지금 그리드가 무장한 둔기가 많이 짧았다.

‘손에 익은 느낌이 안 드는 건 그래서겠지.’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답게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 봤지만 결국 애용한 무기는 대검과 장검이었다. 파그마의 후예의 보정 효과를 받지 못하는 현재 입장에서 둔기의 특징은 다소 낯설었다.

‘검을 찾는 편이 좋겠어.’

경전은 신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둔기처럼 길바닥에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을 품은 그리드였으므로 느긋할 수 있었다. 굳이 위험이 산재해 있는 신전에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유연한 사고가 가능했다.

‘오?’

검을 찾는 김에 경전까지 득하면 얼마나 기쁠까?

기대를 품은 채 숲을 낱낱이 살피며 이동하던 그리드가 우거진 수풀 너머에 있는 오두막 한 채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사람 한 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느낌이 들 것 같은 낡고 비좁은 오두막이었다.

‘뭔가 이것저것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길바닥에서도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다. 특정 건물 안에 다양한 도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들어가지 말자.’

그리드는 오두막 안에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안에 숨어 있다가 도구를 노리고 찾아오는 사람을 기습 공격할 요량이겠지.’

수풀에 몸을 숨긴 그리드가 오두막의 구조를 자세히 관찰하며 생각했다.

‘사방에 창문이 달려 있어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군. 쩝, 이때 누가 딱 하고 나타나 주면 좋겠는데.’

욕심에 눈먼 누군가가 오두막을 발견하고 생각 없이 접근할 경우, 이미 오두막에 숨어 있던 사람이 그를 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개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나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중에 나서는 거지.’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을 경쟁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아이템을 빼앗는 이상적인 구도!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헤실헤실 미소가 지어지는 그리드였다. 세상에 거저먹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미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뭐, 어지간히 바보가 아닌 이상 저 오두막에 맘 놓고 접근하는 사람은 없을 테고... 나도 저곳에는 미련을 버리는 편이 좋겠... 엥?’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그리드는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오두막에 굳이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저벅.

“....!”

그리드가 납작 엎드렸다.

한 사내가 오두막에 접근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혹 숨소리라도 들릴까, 손으로 입을 꽉 틀어막은 채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그리드의 입꼬리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세상에 저런 바보가 있다니!’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의 성장을 실감하면서, 그리드는 사내가 오두막에 입장하는 순간 기습을 당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그리드의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벌컥!

“이얍!”

사내가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오두막 안에 숨어 있던 여성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이상적인 타이밍의 기습이었다.

하지만 이상적이라는 것은 뻔히 예상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퍽!

오두막 문을 열었던 사내.

다시 문을 닫아 버림으로써 안에서부터 날아온 검격을 차단해 버린다. 그 탓에 본래는 사내의 몸을 찔렀어야 할 여성의 검이 오두막 문짝만 꿰뚫어 버렸다.

문을 꿰뚫고 나온 검날을 확인한 사내가 곧바로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꺄악!”

여성의 몸이 문짝에 박힌 검과 함께 오두막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바닥에 널브러지는 그녀를 덮치는 것은 사내의 창이었다.

푸욱-!

정확히 심장을 찌르는 창!

고정 데미지만 존재하는 배틀 필드라서 망정이지, Satisfy였다면 100퍼센트 확률로 치명타가 터졌을 정도로 예리한 공격이었다.

완벽한 반응 속도와 지물 이용 능력, 그리고 창을 다루는 솜씨에 이르기까지.

수풀에 숨은 채 사내의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한 그리드는 확신했다.

‘하이 랭커....!’

사내는 바보가 아니었다.

오두막 안에 누군가가 숨어 있을 거라는 예상을 못하고 접근했던 게 아니고, 뻔히 알고도 접근했던 거다.

상대방이 숨어 있어 봤자 실력으로 제압할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반면 나는?

나 또한 하이 랭커이면서, 왜?

‘나는 왜 그런 자신감을 품지 못한 거지?’

파르르...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선보이는 정체불명의 하이 랭커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킨다.

전설의 무패왕과 제국의 수만 대군, 그리고 뱀파이어 백작들에게 두려움 없이 맞서 싸웠던 템빨왕의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과연 전투의 귀재...! 실로 엄청난 실력입니다!!』

배틀 필드 곳곳에서는 의외로 일방적인 전투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1,500명의 인원 전부가 동등한 조건으로 게임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각자의 전략 구사 능력과 컨트롤 실력이 판이했던 까닭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쉽게 위기를 돌파하였고, 누군가는 좌절하였다.

더 나은 무기를 들고도 대결에서 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맨주먹으로 대결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승자가 바로 이름난 하이 랭커들이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Satisfy에서 군림해 왔던 거물들.

그들의 실력은 배틀 필드에서도 완벽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바로 전투의 귀재, 하오였다.

대륙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중국 랭킹 1위인 그의 전투 능력은 가히 압권이었다. 크라우젤을 비롯한 다른 실력자들을 의식한 것인지, 초반부터 유리한 <전사>가 아닌, 보다 잠재력이 있는 <마법사>를 선택한 그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초반부터 선전했다.

고정 데미지 1에 불과한 낡은 단창 한 자루만으로 마주치는 경쟁자들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남들과 똑같은 동체 시력과 신체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혼자서만 대부분의 공격을 회피하고 적중시키는 것인지, 평범한 사람들이 봤을 때 그의 컨트롤 솜씨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재주였다.

“꺄악!”

급기야 오두막을 선점하고 유리한 입장에 있던 일본인 여성 대표마저 손쉽게 제압해 버리는 하오.

고작 낡은 문짝 하나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왜 그가 전투의 귀재라고 불리는지 깨달았다. 평범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여 비정상으로까지 인식되는 그의 실력에 경외를 품었다.

-크라우젤에 가장 근접하는 실력자 중 하나가 하오일 거라더니... 중국인들의 헛된 주장이 아니었군.

-그러게 말이야. 하오가 크라우젤만큼의 레벨링 실력까지 겸비했었다면 진짜 장난 아니었겠다.

-만약 그랬다면 작년 국가대항전 결승전 구도는 크라우젤 대 그리드가 아니라 크라우젤 대 하오가 됐을 수도.

하오의 진정한 실력을 목도한 사람들은 배틀 필드 최후의 생존자 3인에 반드시 하오가 포함될 거라고 확신했다.

하오가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수풀에 숨어서 지켜보는 중인 그리드?

의외의 기재를 발휘하여 나름의 활약을 펼쳤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하오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초라했다.

-그리드는 언제까지 저렇게 숨어 있으려나...

-일단 하오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겠지.

참가자끼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지만 그리드는 하오의 실력을 옆에서 실시간으로 목격한 바, 하오가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가 굳이 하오에게 싸움을 걸어서 위험을 자처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비굴해 보이지만 비굴한 게 아니라 현명한 거야.

-맞아. 그리드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템빨을 내세울 수 없는 배틀 필드에서 그리드는 상대적 약자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건 당연했다. 그리드는 스스로부터가 템빨러, 템빨왕이라고 자처하였던 인물이다. 다른 하이 랭커들과 비교해서 순수한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자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드는 전투를 최대한 회피하고 있었다.

명성에 비하면 분명히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실력에 맞게, 다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주제에 맞게 게임을 플레이하는 중인 그를 오히려 높이 평가하면 높이 평가했지, 나쁘게 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하오 선수가 사츠키 선수를 로그아웃시켰습니다!』

『이거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오는군요. 고작 2의 데미지밖에 입지 않았어요.』

『단순하게 말해서 20대를 때리는 동안 단 2번밖에 맞지 않은 거죠. 도대체 하이 랭커들은 어찌 저리도 컨트롤 솜씨가 뛰어난 건지 참... 평범한 제 입장에서는 그들의 시각이 상상조차 안 됩니다.』

『가상현실에 특화된 DNA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학설이 떠오르는 장면.... 어? 저, 저게 무슨?』

『아니, 당최 무슨 배짱이죠?』

하오를 극찬하느라 바쁘던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깜짝 놀랐다.

하오가 싸우는 내내 숨죽인 채 숨어 있던 사내.

템빨왕 그리드가 갑자기 수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오의 앞으로 다가간 까닭이었다.

-뭐야?

-설마 하오를 매수하려는 건가?

그리드는 이미 뛰어난 기지를 선보인 바 있다. 이번에도 역시 재치를 발휘하여 하오를 회유하려는 건 아닐까?

모두가 예상하는 그때.

“폰? 레가스? 아니면 설마 크라우젤이냐?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둔기를 거머쥔 그리드가 하오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싸워 보자. 궁금하거든. 지금의 나는 과연 어느 수준일지.”

움찔!

가면 틈새로 엿보이는 그리드의 눈빛을 확인한 하오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상대방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기왕이면 우승하고 싶었는데...”

씁쓸한 미소를 흘리면서 말끝을 흐리는 하오.

한숨 뱉은 후 자세를 잡는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대결을 요구받아서야 피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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