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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81화 (576/1,794)

템빨 35권 - 13화

‘그럼 그렇지. 내가 뒤통수를 어디 한두 번 맞아 보냐?’

그리드는 Satisfy를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열렬하게.

Satisfy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고, 소중한 인연들을 맺었으며, 종국에는 인생 역전에 성공한 그가 Satisfy에 애정이 없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S.A 그룹에는 적개심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그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게임에서 뭐만 했다하면 조작을 의심케 만드는 결과를 맞이해 왔고, 국가대항전이 거듭될 때마다 대놓고 견제를 당하고 있었으니, 그리드는 S.A 그룹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드가 S.A 그룹을 신용하지 않는 이유다. 그는 이번 이벤트에 대해서도 의심부터 품었다.

다른 대표들과 함께 이벤트 내용을 설명 받을 당시, 그리드는 게임 시스템에 집중하기보다 맥락에 숨어있는 함정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보유할 수 있는 물약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부분이 함정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음을 경험과 본능으로 캐치한 것이다.

그리고 직업 선택 창에서 역시나 함정이 숨어 있음을 간파했다.

‘성직자.’

얼핏 봤을 때 성직자는 무척 나쁜 직업이었다.

처음부터 꾸준히 강력한 전사, 특정 무기를 확보했을 때 강력해지는 마법사와 제작자.

이들과 비교해서 성직자는 템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 직업에 비해서 폭발력이 부족했고, 이로 인해서 후반으로 갈수록 불리한 직업 같았다.

하지만 모든 직업군의 생명력이 20으로 공통되며, 생명력을 회복시킬 수단이 물약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던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물약의 보유 개수는 고작 2개인 반면에 성직자의 경전 보유 개수에는 한도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즉, 다량의 경전을 보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최악의 가정을 해 봐도 성직자의 잠재력은 월등하다.’

마법 지팡이를 확보한 마법사와 1 대 1로 승부하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마법사는 성직자를 때릴 때마다 3의 데미지를 입히는 반면 성직자는 마법사에게 1의 데미지밖에 입히지 못한다.

성직자는 마법사에게 7대만 맞으면 죽는 반면 마법사는 성직자에게 19대를 맞아도 죽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성직자가 다량의 경전을 확보한 상태라면?

경전을 읽을 때마다 10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성직자 쪽이 승리할 수 있게 된다.

그래, 물론 다량의 경전을 확보한 상태의 이야기다.

경전을 확보하지 못한 성직자는 모든 직업군 중 최약체였다.

실제로 1,500명의 대표 중에서 성직자를 선택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이유는 경전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리스크가 굉장히 큰 직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경전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성직자 직업을 선택했다.

플레이어의 뒤통수 때리기를 즐기는(?) S.A 그룹의 성향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경전은 맵 곳곳에 존재한다고 직업 설명에 서술되어 있었지.’

경전을 구하는 일이 어렵다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물약에 비해서 메리트가 무척 큰 경전.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구하기 힘들 거라고 인식한 반면 그리드는 역으로 쉽게 생각했고, 그 결과가 이거다.

신전.

대놓고 ‘여기에 경전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작은 건축물이 미니 맵 곳곳에 표기되어 있었다.

‘역시, 경전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물론 이 또한 함정일 수도 있다. 또한 경전의 총량이 의외로 적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직접 부딪쳐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신전 외에 다른 곳에도 경전이 있을 수 있지. 맵 곳곳에 존재한댔으니까.’

우선 가까운 신전으로 이동해야겠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몸을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주먹과 발을 휘둘러보고, 제자리에서 점프를 뛰어 보고, 걸어 보고, 달려 보는 등 자신의 신체 능력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결과.

‘10레벨 정도의 캐릭터로 인식하면 되겠군.’

Satisfy에서 1차 전직조차 하지 않은 기본 캐릭터의 공격 속도가 초당 1회, 이동 속도는 초당 3걸음이다. 물론 이동 속도는 뛰면 더 빨라진다. 어찌됐든 배틀 필드의 캐릭터 능력치는 딱 그 정도였다.

‘공격력, 생명력은 어차피 고정되어 있으니까 근력과 체력은 의미 없고... 문제는 동체 시력이야.’

그리드는 초당 1회의 공격쯤은 충분히 눈으로 쫓을 수 있는 수준의 동체 시력을 느꼈다. 최대한 집중하면 적의 공격을 3회 중 1회는 회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이 부분이 문제점으로 다가왔다.

‘내가 가능하다는 말은 남들도 역시 똑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공격력이 1로 고정되어 있는 성직자의 몸으로 과연 적을 죽음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까?

특히 상대가 크라우젤이나 템빨단원들처럼 컨트롤 실력의 귀재라면?

‘최악이네.’

이 게임, 이름만 배틀 필드지 결국에는 Satisfy처럼 컨트롤빨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그리드는 난처해졌다. 본인의 컨트롤 솜씨에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뛰어난 컨트롤 실력자들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실력자들은 대부분 마법사를 선택했을 것 같은데.’

그리드는 자신과 다른 유형의 랭커들. 그러니까 컨트롤 실력이 뛰어난 랭커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만만한 그들은 대체적으로 멀리 본다. 그들의 성향을 고려해 봤을 때, 그들은 당장에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전사보다 전사 이상으로 강력해질 여지가 있는 마법사를 직업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생존 특화의 잠재력을 지녔을 뿐, 공격력이 약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성직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그리드의 몸과 정신이 긴장되며 경직된다.

공격 MISS의 여지가 생긴 이상, 자신이 설령 다량의 경전을 확보할지언정 실력자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 것이다.

‘안 그래도 공격을 맞춰 봤자 1데미지밖에 못 입히는데 그게 빗나가기까지 하면.... 아니, 위축되지 말자.’

Satisfy를 플레이해 온 지난 수년 동안 고도로 단련된 정신력이 가치를 발휘한다.

긴장으로 굳었던 그리드의 몸과 정신이 빠르게 유연해졌다

‘지금의 나라면 컨트롤 실력이 크게 부족하진 않을 거야. 경전만 잘 챙기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숱한 강적들과의 전투를 복기해 보며 자신감을 챙기는 그리드였다.

눈을 빛낸 그가 신전으로 이동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냥 직진이다.

***

‘저 안에 경전이 있을 확률은 무척 높아.’

배틀 필드에 접속한 1,500명의 인원 중 절반 이상이 신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대놓고 성직자를 위한 공간 같은 그곳을 경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곳곳에 위치한 신전 주변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 단위의 인원이 포진했다. 엄폐물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그들 전원이 신전 입구를 주시했다.

굳이 성직자가 아니라도 경전을 확보할 경우, 거래 도구로 쓰거나 다른 성직자들의 잠재력을 낮추는 등의 용도가 있었으므로 이들 모두 경전을 탐내고 있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신전에 입장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주변에 적들이 숨어 있을 것을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먼저 나설 멍청이는 없던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오! 문이 닫혀 있는 걸 보면 아직 아무도 입장 안 했나 보네? 개이득인데?”

“....?”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전 앞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수수께끼의 인물!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는 그리드였다.

남들은 온갖 위험을 염려하며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이때, 저자는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나타나서 큰 소리로 떠들기까지 하는 걸까?

사람들은 그리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함정일 수도 있어!’

무려 1,500명의 인원이 참가한 개인전이다.

사람들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섣불리 행동하질 못했다.

반면 그리드는 이미 신전의 낡은 문짝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확신을 품은 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저격의 위험은 없어. 초반부터 활과 화살을 확보한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그리드가 캐릭터 선택 창의 설명을 토대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활>이라는 무기가 무척 유용하다는 점이었다. 원거리 공격을 토대로 안전한 저격이 가능한 그 무기를 쉽게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고 그리드는 확신했고, 그의 확신은 맞았다.

그리드가 신전에 입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인 수십 명의 사람 중에서 활을 확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구도 그리드를 저격하지 못했다. 설령 활을 갖고 있다고 해도 소모품인 화살을 함부로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지금 여기서 활을 쐈다가는 다른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지.’

활을 뺏으려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저벅저벅.

합당한 근거를 품고서 신전에 무사히 입장한 그리드.

경전을 찾고자 내부를 살피던 그가 이내 씨익, 입 끝을 말아 올렸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경전과 활을 발견한 것이다.

[<경전>을 획득하였습니다.]

[<대궁>을 획득하였습니다.]

<경전>

책을 펼치면 생명력이 10 회복됩니다.

사용 가능 직업:성직자

<대궁>

최대 10미터 거리의 적을 저격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사용 시 화살이 소모됩니다.

사용 가능 직업:전사, 제작자

“좋아!”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경전을 확보하고 덤으로 활까지 얻은 그리드가 환희했다. 처음부터 일이 술술 잘 풀렸으니 예감이 좋았다.

‘활보다는 내가 쓸 수 있는 무기를 얻는 편이 훨씬 더 좋았겠지만. 뭐, 갖고 있다 보면 쓰임새가 생기겠지.’

최대 30개의 아이템을 보관할 수 있는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넣은 그리드가 신전을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뒤늦게 신전에 입장한 1명의 여인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손에 검을 쥔 그녀가 자신과 달리 무기가 없는 그리드를 협박했다.

“경전을 내놔요.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어요.”

‘염병.’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의 귓가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신전 바깥에서 싸움이 벌어진 듯했다.

‘내가 신전에 무사히 입장한 걸 보고 따라하던 사람들끼리 충돌한 건가?’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는 여성에게 말했다.

“여기에 경전은 없었어. 이 활뿐이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죠?”

“못 믿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하지만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전사였고, 전설의 대장장이가 되었으며, 종국에는 왕위에 오른 그리드이다.

그가 Satisfy에서 쌓은 경험은 평범한 사람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다.

남들과 달리 신전에 쉽게 입장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도.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그가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활이 구하기 힘든 무기라는 건 너도 뻔히 예상하고 있지? 서로 초반부터 괜히 힘 빼지 말고 쉽게 가자. 아쉽게도 네가 원하는 경전은 없지만, 내게는 이 활이 있어. 이 활과 너의 검을 바꾸자.”

그리드의 되도 않는 요구에 여성이 당황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여성의 질문에 그리드가 뭘 그리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활이 검보다 훨씬 더 좋잖아? 물물교환하면 네 쪽이 이득 아니야? 내 입장에서는 큰 손해지만,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이는 걸 원치 않아서 제안하는 거야.”

여성이 반박했다.

“활은 화살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무기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는 활 외의 무기가 없어 보이고요. 제가 당신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검을 버리는 선택을 내릴 리가....”

“그럼 말고.”

그리드가 여성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활을 집어넣더니 두 주먹을 쥐어 보였다.

“활을 거절하는 걸 보니까 넌 성직자나 마법사지? 검이 있어 봤자 맨손을 휘두르는 나와 공격력이 똑같을 거야. 그치? 싸울 만하겠네. 어디 개처럼 싸워 보자고.”

“뭐....!”

여성이 무척 당황했다.

‘성직자가 아니라 전사였어?’

경전은 성직자에게 필요한 도구.

여성은 처음부터 경전을 찾아 신전에 들어온 그리드가 당연히 성직자일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전사였던 것이다. 상황이 안 좋게 됐다.

위축되는 그녀를 확인한 그리드가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어때? 활과 검을 바꿀래, 아니면 싸울래?”

“구, 굳이 싸우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무기를 교환할 생각도 없어요. 그냥 가세요.”

“그럼 그러던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신전을 빠져나갔다.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던 사람들 중 몇 명이 그를 발견했지만, 눈앞의 적을 두고 당장에 그를 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구역까지 벗어난 그리드가 안도했다.

큰 나무에 기대앉는 그의 모습을 중계 중인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담대한 판단력과 위기를 쉽게 벗어나는 재치가 놀랍네요. 참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리드의 모습이군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플레이어였던 그가 어떻게 전설이 되었고, 또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그 저력의 일각을 엿본 기분이네요.』

전설의 힘을 잃었어도 그리드는 그리드였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시청자들의 그리드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했다.

배틀 필드 참가자 숫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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