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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77화 (572/1,794)

템빨 35권 - 9화

“그 늙은이가 드디어 노망이 들었나?”

4황자 에단.

황비 마리의 아들인 그는 본래 황위 계승 서열이 낮은 편에 속했다. 태어난 순서야 어찌 됐든, 정실의 자식들과 비교했을 때 적통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후 아리아떼 사후, 마리가 권력을 거머쥔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리의 파벌이 에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덕분에 최근의 에단은 1황자 롤랑과 비견되는 입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에 무서울 것 없이 날뛰는 에단에게 쟝이 언제나처럼 주의를 주었다.

“말씀을 가려하십시오. 누가 듣기라도 하였다가는 전하뿐만 아니고 전하를 따르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이 날아갈 것이옵니다.”

“노망난 늙은이한테 노망났다고 말하는 게 뭐 잘못이야? 이봐, 쟝 선생. 당신은 황제 폐하가 제정신으로 보이나?”

“.....”

“솔직히 말해 봐. 아니잖아? 폐하께서 제정신이었다면 템빨국에 화친을 청하였을 리 없잖아. 안 그래?”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요.”

“한낱 소국. 심지어 역사조차 없는 신생국가를 두려워하는데 깊은 뜻은 무슨. 그냥 미친 거지.”

“.....”

쇠귀에 경 읽기라.

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2년 전부터 에단의 교육을 포기한 그다. 그렇기에 에단에게 내쳐지지 않은 것이고.

쨍그랑!

에단이 빈 술잔을 벽에 집어 던졌다.

황급히 뛰어 들어온 기사들이 안도하였고, 뒤이어 쫓아온 시녀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술잔의 잔해를 치웠다.

에단이 쯧, 혀를 찼다.

“그 노망난 늙은이 탓에 발할라와도 휴전 협정을 맺게 생겼으니, 내 마장기단의 첫 출정 기회는 또 뒤로 늦춰지고 말았군.”

마장기.

마력을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거대 로봇이다. 고대 연금술과 마법의 정수였다.

사람이 탑승해서 운전하는 로봇으로, 민첩함은 크게 떨어지지만 견고함과 파괴력은 인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마장기가 휘두르는 검은 태산을 때려 부쉈고, 마장기가 쏘는 마력은 도시 하나를 날려 버렸으니, 그 힘의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최소 대악마다.

하지만 마장기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게 문제였다. 또한 마력 공급 문제도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마장기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고대의 유물. 딱 그 정도다.

하지만 마장기의 가능성을 엿본 에단은 마장기에 많은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다. 그가 자신의 황위 계승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마장기단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 깊이 한숨 쉰 에단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라이더들에게 전해. 휴가라고.”

“예.”

***

초창기 Satisfy에는 2명의 전설이 있었다.

군신 아레스?

템빨왕 그리드?

통합 랭킹 1위 크리스?

신궁 지슈카? 살신 페이커?

아니, 초창기 Satisfy에서 그들은 무명에 불과했다.

Satisfy 오픈 직후부터 유저들에게 전설 같은 존재로 선망 받았던 인물들, 다름 아닌 크라우젤과 지발이었다.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레벨 업 속도로 랭킹 1, 2위를 꿰찼던 인물들.

그중 크라우젤은 여전히 천외천이라는 명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날씨 좋군.”

사하란 제국 황도 타이탄.

성벽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아침 해를 보고 미소 짓는 사내가 있다.

지발이었다.

Satisfy 오픈 직후부터 제2회 국가대항전까지 통합 랭킹 2위 자리를 단 한 번도 놓친 적 없던 거물 중의 거물.

한때 미국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던 그가.

“야! 지발! 너 미쳤어? 어디서 농땡이 피우고 있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언뜻 보기에 평범한 군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의 유일한 라이벌, 7대 길드의 수장, 레이드의 신 등등.

그가 수년 동안 쌓아 온 무수히 많은 타이틀은 이제 온데간데없다.

동네북이라는 타이틀도.

대중의 망각은 심하여 이미 지발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지 오래였다.

“레이더스 정비 제대로 됐는지 확인은 한 거냐?”

“예! 그렇습니다!”

“확실해? 너 언제 나왔는데?”

“아침 훈련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동하였습니다!”

“밥은?”

“이동 중에 빵으로 해결하였습니다!”

“하, 자식. 깔래야 깔 수가 없네. 난 또 웬일로 농땡이 피우고 있나 했더니.”

제국군 14사단 21대대.

황도 외곽에 은밀하게 위치한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부대였다.

대대라기에는 규모도 무척 작다. 총원이 80명에 불과했다.

놀라운 점은, 이 중 전투원이 고작 4명이라는 부분이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발이다.

4명 중 가장 말단인 탓에 마치 이등병처럼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지만, 그의 군복에 새겨진 계급은 <청익>이다. 직속상관을 제외하면, 설령 상대가 황족이라 할지라도 명령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수 장교인 것이다.

왜?

하켄 왕국 소속의 플레이어로서, 하켄 왕국에서 귀족의 작위를 얻고 스네이크 길드를 운영하며 군림하던 지발이 왜 제국군에 있는가?

그가 새롭게 얻은 히든 클래스에 비밀이 있다.

<창공의 라이더>

*모든 ‘탈것’에 탑승하고 완벽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탈것’에 탑승할 경우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무려 유니크 클래스다.

한데 클래스의 뚜렷한 장점이라고는 고작 탈것에 특화된 것 하나밖에 없었다.

최초에 지발은 무척 실망했다.

탈것이라고 해 봤자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말과 일부 몬스터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괜히 직업을 바꿨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실망과 후회는 몹시 찰나에 불과했다.

라이더 클래스의 전직 퀘스트 내용을 확인한 순간 지발은 전율하였다. 크라우젤, 그리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고대의 라이더>

*전직 퀘스트

제국의 4황자 에단을 찾아가십시오. 그에게 재능을 증명하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당신은 그 대가로 최강의 탈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장기!

플레이어의 시점에서는 신화 속 허황된 물건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었던 고대의 병기.

‘내가 그것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4번 마장기 <레이더스> 앞에 선 지발의 입 끝이 하늘로 치솟는다.

“내년을 기대해라.”

지발이 제3회 국가대항전에 참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었다. 아직 레이더스의 레벨이 낮아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고, 그 탓에 국가대항전에서 레이더스를 공개해 봤자 제대로 된 위용을 선보일 수가 없었다. 지발이 가늠하기로, 크라우젤이나 그리드에게 종잇장처럼 찢겨 나갈 터였다.

하지만 제4회 국가대항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지발이었다.

“그리드, 진정한 템빨을 보여 주마.”

이제 그리드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 지발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에게 동네북이라는 오명을 쓰게 만든 장본인인 바, 원한이 없을 수는 없었다. 지발은 내년에 기필코 그리드에게 복수하고 은원 관계를 깨끗이 청산할 계획이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하늘 위의 하늘.

내가 되겠다.

다짐하는 지발의 얼굴에 깃든 각오는 남다른 것이었다.

***

제목: 제3회 국가대항전 참가자에게 알립니다.

발신자: S.A 그룹

내용: 금년 국가대항전의 개인 메달 획득 가능 수가 2개로 축소된 사안에 대해서 실망하신 분이 많다는 사실을 당사는 인지하였습니다. 하여, 참가자 여러분께 사죄의 의미를 담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벤트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께서는 본인의 개인 정보 수집과 사용을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확한 이벤트 내용과 시간은 공지할 수 없는 점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이벤트 진행 사항과 내용이 전 세계에 생중계됩니다. 이에 따라서 이벤트 참가자의 인권 일부가 침해될 수 있습니다.

*당사는 이벤트 참가자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이벤트 보상은 Satisfy 내 재화로 지급됩니다.

*이벤트 불참 시 발생하는 불이익은 없습니다.

“뭐라는 거야?”

운동 후.

샤워실에 들어가는 도중에 도착한 메일을 본 신영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 이벤튼데 내용 공개를 안 한다는 거지?”

뭐 이딴 불친절한 이벤트가 다 있단 말인가?

“안 해.”

개인 정보 수집과 사용에 동의하는 순간 보험 가입 안내 전화가 쇄도할 수도 있음을 걱정하는 신영우!

미련 없이 메일함을 닫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인은 유라였다.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영우의 심장이 두근! 하고 크게 한 번 뛰었다.

‘오래간만이네.’

거의 3달 만에 온 연락이다.

유라의 그 예쁜 목소리를 오래간만에 듣게 된다고 생각하자 괜히 긴장이 된다.

험험, 목소리를 가다듬은 영우가 전화를 받았다.

“왜?”

과연, 연애 한 번 못해 본 이유가 있다.

매너라고는 쥐뿔도 없는 신영우였다.

만약 유라가 예민한 여성이었다면, 영우에게 두 번 다시는 전화를 거는 일이 없게 만들 말투였다.

(이벤트 안내 메일 받으셨죠?)

“.....”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유라의 목소리는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만 같았다.

목덜미가 오싹오싹해짐을 느낀 영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응.”

(참가하실 거죠?)

“아니?”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러지 말고 참가하세요.)

“왜? 이벤트 내용이 뭔지 알고 있어?”

(몰라요. 하지만 이벤트의 취지를 생각해 봤을 때, 그 보상이 메달을 대체할 수준일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죠. 꼭 참가하세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영우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연신 씰룩거리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미녀가 자신을 일일이 신경 쓰고 연락 준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통화 내용을 녹음해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싶었다.

‘나 유라랑 이런 사이다. 부럽지?’ 하고,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그럼 끊어요.)

“아, 잠깐.”

(....?)

“너도 국가대항전에 참가하는 거지?”

유라는 매년 국가대항전에 참가해 왔다. 특히 제1회 국가대항전에서는 한국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엄중한 무게를 짊어진 채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다.

그간 한국의 명예를 빛내기 위해서 노력해 온 그녀가 올해 국가대항전에도 참가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신영우는 생각했다.

(당연하죠. 저도 참가 신청을 했으니까 같은 메일을 받은 거라고요?)

전화기 너머 유라의 목소리가 살짝 고양되었지만 둔감한 영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설령 눈치챘더라도 이유는 몰랐을 것이다.

“그래, 알았어. 그럼 조만간 보자.”

영우의 목소리는 대놓고 들떠 있었다. 오래간만에 유라의 얼굴을 볼 수 있단 사실에 기뻤던 까닭이다.

***

“이벤트 내용에 대해서 불만을 품을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금메달 개수를 2개로 줄인 것에 대해서 특정 인물을 저격했다는 음모론이 나도는 마당에 이런 이벤트는 좀....”

S.A 그룹 본사.

이벤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이사회 인원들이 염려를 표했다.

아무래도 걱정일 수밖에 없었다.

<배틀 필드>

모든 이벤트 참가자가 동등한 레벨과 능력치, 아이템, 칭호로 게임을 시작, 고립된 필드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것을 목표로 서로 싸운다.

이전 세기에 유행했던 모 게임을 연상하게 만드는 콘셉트의 이벤트였다.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치와 템빨을 무기로 삼는 특정 인물을 저격한 듯한 내용의 이벤트인 것이다.

염려하는 임원들에게 윤상민 운영 이사가 웃어 보였다.

“맞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겠죠. 하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기뻐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드디어 증명할 기회를 잡았으니까.”

“뭐를...?”

뭘 증명한다는 거지?

의아해하는 임원들에게 윤상민 이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리드가 증명하는 순간, 사람들의 비난은 환호로 바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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