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76화 (571/1,794)

템빨 35권 - 8화

놀 레이드가 끝난 직후.

“병사들에게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나? 레이단에서 쉬고 가도록 하게.”

“각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본인들의 영지로 복귀하려 하는 자국 병사들에게 크리스가 휴식을 권유했다.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한 배려였다.

그리드가 위급한 상황이라 판단하여 쉬지 않고 행군하였고, 급기야 사막을 횡단한 뒤 곧바로 뱀파이어 놀과 전투에 임했던 병사들.

각지에서 달려온 그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겨운 상태였다. 언제 또 사막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지 눈앞이 깜깜했다.

이때 휴식을 권유받은 것이다. 그것도 제2의 수도라는 레이단에서의 휴식을 말이다. 꿀맛 같을 것이 분명했다.

“뒷일은 내게 맡기고 귀환하도록 해.”

환호하는 병사들을 보고 미소 지은 크리스가 그리드에게 말한다.

그리드가 감사를 표했다.

“병사들을 챙겨 줘서 고맙다. 수만 명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려면 꽤 많은 재정을 써야 할 텐데...”

“템빨국의 공작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야. 감사받을 일이 아니다.”

“....기분 좋네.”

그리드는 충만해졌다. 든든한 동료들의 존재가 그를 하염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혼자였던 시절의 우울은 이제 씻은 듯이 없다.

***

“뭐야? 저게 무슨 병력이지?”

“템빨국의 전력이 이 정도였나?”

‘나와 인터뷰를 하고 싶다면 레이단으로 오라.’

캐나다의 호프, 크리스의 입장이었다.

템빨국 공작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는 현실에서의 기자회견을 거부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캐나다 언론사들은 그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렸다. 군소리 없이 레이단으로 기자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기자단의 관심사는 오로지 국가대항전이었다.

캐나다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최강의 랭커 크리스.

벌써 1년 이상 통합 랭킹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가 제3회 국가대항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는지 등등.

기자단은 크리스에게 쏟아 낼 질문을 최소 수백 개 확보하고 있었고 그중 대부분이 국가대항전과 관련된 것이었다.

한데 지금.

“크리스 공작 각하께서 개선하십니다!!”

두웅-!

둥! 둥!! 두둥!!!

귀환하는 크리스를 뒤따르는 수만 대군의 행렬이 기자들의 관심사를 바꿔 버리고 말았다.

‘템빨국의 총 병력은 6만 내외로 알려졌었는데...?’

‘잘못된 정보였다...! 만약 소문대로 템빨국의 병력이 6만 내외였다면, 왕도도 아닌 레이단에서 4만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건 말이 안 돼...! 템빨국의 병력은 최소 10만 이상이야!!’

‘템빨국...! 신생국가가 어찌 이런 저력을...! 이게 바로 그리드의 능력인가!!’

크리스를 뒤따르는 대군의 행렬에 주목하는 기자단이 상기된다.

템빨국의 전력이 소문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증거를 포착하였으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특종이었다.

하지만 진짜 특종은 이후에 발생했다.

“사하란 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였습니다!”

“뭐?”

“응?”

크리스도, 기자단도 놀랐다.

제국에서 사신을 보내다니? 왜?

‘공물을 바치지 않게 된 이후로 양국은 완전히 적대 관계가 됐던 거 아닌가?’

말에서 내린 크리스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사신이라는 놈이 또 어떤 개소리를 지껄일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던 것이다.

‘굳이 왕성이 아닌 이곳으로 사신을 보낸 이유는 나를 회유하기 위함일 테고... 당연히 협박도 동반되겠지.’

제국의 표적이 된 이상 입장이 난처해졌다. 제국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압박할지, 크리스는 심히 걱정이었다.

근심하고 있는 그에게 제국의 사신이라는 자가 다가왔다.

레이단의 백성들과 캐나다 기자단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사신이 꾸벅, 크리스에게 목례하였다.

“황제폐하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뭐지?”

긴장감으로 물든 크리스의 음성이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그의 곁에 집결해 있는 수만 대군들과 레이단의 백성들, 그리고 캐나다 기자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덩달아 긴장하게 만들었다.

손짓 한 번으로, 말 한 마디로 대륙의 지도를 바꿔 버리는 절대자, 쥬앙데르크.

그가 전하려 하는 뜻이란 과연 뭘까?

좋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로지 최악의 가정밖에 할 수 없다.

모두가 불안에 떠는 그때였다.

“황제폐하께서는 템빨국과의 화친을 원하십니다. 템빨왕 전하께서 제국의 발할라 침공을 원치 않으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발할라와 휴전을 맺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레이단 전체가 침묵에 빠졌다.

제국의 사신이라는 자가 입에 담은 내용이 듣고도 믿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제국의 황제가 ‘화친’을 원한다고?

템빨왕이 원한다면 적국과 휴전을 맺겠다고?

대륙 역사상 이런 대사건이 또 있었는가?

없다.

제국의 황제들은 늘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였고, 군림하였다. 뭐든지 자신의 뜻대로 해결했다. 명령만 알았지 화친은 몰랐다. 타인의 뜻은 살피지 않았다.

그건 당대 황제 쥬앙데르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특종이다...!’

‘이건 해외 토픽감이야!’

기자단은 확신했다.

제국의 사신이 읊은 말을 그대로 옮겨만 적더라도 그 기사는 대서특필 될 거라고 말이다.

“음.... 일단 대전으로 드시오.”

뒤늦게 주변의 분위기를 살핀 크리스가 사신을 인도했다. 그 탓에 기자단은 사신이 이어서 할 말을 알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제 와서 문제는 아니었다.

“로그아웃!”

크리스와 인터뷰하기 위해서 기껏 레이단까지 찾아왔던 기자들이 본래 목적마저도 잊고 떠나기 시작한다.

***

<사하란 제국 황제 쥬앙데르크, 템빨국에 화친을 요청!>

<템빨국의 전력은 밝혀진 것 이상이다.>

<(칼럼)역사상 처음으로 ‘외교’라는 패를 꺼내든 제국.... 이번 사건의 의미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서대륙을 지배하는 절대자조차도 눈치를 보게 만드는 템빨국의 존재감이 대중을 압도했다.

언론도 흥분 상태였다.

연일 템빨국과 그리드의 위대함을 떠들어 대느라 바빴다.

정작 그리드 본인은 황당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제국 황제가 왜?

당최 뭐가 아쉬워서 내게 화친을 요청하는 걸까?

심지어, 나와 화친을 맺을 수만 있다면 발할라와 휴전할 의향이 있다고 말할 정도이다.

“사실 엄청난 꿍꿍이속이 있는 거 아니야?”

템빨왕 집무실.

갓 핸드들과 함께 팬티를 만들면서 불안해하는 그리드였다.

급기야 머리까지 부여잡고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귓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우엘입니다.”

“마침 잘 왔다! 들어와!”

그리드가 반색했다.

작금의 상황이 어쩌다가 발생한 것인지, 라우엘이라면 충분히 의문을 해소해 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그리드는 어서 진실을 알고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에게 라우엘이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추켜세웠다.

“대단하십니다.”

“뭐가?”

“전하께서 레이단에 군대를 집결시킨 결과가 작금의 사태입니다.”

“....?”

그리드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싱글벙글 미소 지은 라우엘이 설명했다.

“전하께서는 단지 놀을 레이드하기 위해서 병력을 소집하셨다지만, 타이밍이 무척 절묘하게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하필이면 제국이 대부분의 병력을 발할라에 집결시켰을 때 제국의 후방인 레이단으로 병력을 집결시킨 셈이 되었으니까요. 황제는 당신께서 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겠죠.”

“.....”

“그 결과가 지금입니다. 제국은 템빨국과 발할라를 동시에 상대하는 걸 위험하다고 인식했고, 결국 당근을 꺼내드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외교의 외자도 모르던 황제가 외교를 시작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장담하건데, 전하의 이름은 제국의 역사에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음.....”

라우엘의 설명을 듣고 사정을 대강 이해한 그리드였다. 하지만 영 떨떠름했다.

“제국이 위협을 느꼈다는 부분부터 납득이 안 되는데? 제국의 전력이면 템빨국과 발할라를 동시에 멸망시킬 수도 있지 않아? 근데 왜 위협을 느낀다는 거지?”

“그 또한 전하 때문이죠.”

“나 때문에?”

라우엘이 킥킥 웃었다.

“발할라에 나타난 무패왕의 후예가 적기사단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겁먹은 겁니다. 무패왕의 후예에게.”

“아....”

전쟁에서 십만대군 학살검을 사용했던 시점부터 그리드는 무패왕의 후예로 오해 받았었다. 그 파장이었던 것이다.

“제국이 무패왕을 두려워했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보네.”

“어쩌면 소문 이상으로요.”

“하긴.... 두려워할 만 하지.”

무패왕의 데스나이트를 떠올린 그리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살아생전의 무패왕은 과연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조차 안 되는 그리드였다. 무패왕과 싸웠던 제국군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결국 다 잘 됐습니다. 제국과 화친을 맺으면 최소한 그 기간 동안은 두려워할 문제가 없어집니다. 화친 기간을 최소 2년 이상으로 설정해놓고 그 기간 동안 최대한 힘을 비축하도록 하죠.”

“화친 기간이라는 게 그렇게 짧아?”

“아니요. 시스템적으로 1년부터 20년까지, 반 년 단위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최대 20년이죠.”

“그럼 화친 기간을 최대한 오래 설정해놓는 편이 우리한테 좋은 거 아니야?”

“화친을 오래 맺으려면 높은 외교 스탯과 화술 스탯을 보유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외교력과 화술을 동반하여 상대방과의 교섭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하는 것이죠. 하지만 공교롭게도 템빨국에는 인재가 없습니다.”

“후로이는?”

“화술 스탯이야 독보적이시지만... 외교 스탯이 전무하죠.”

“아쉽네. 만약에 후로이가 외교 스탯을 가질 수만 있다면 여러모로 유용했을 텐데.”

순간, 라우엘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럼 후로이 님께 명령을 내리시죠?”

“무슨 명령?”

“외교관 퀘스트를 진행하라는 명령이요.”

“외교관 퀘스트가 뭔데?”

“고위 귀족에게 뜨는 관직 퀘스트 중 하나입니다.”

“그 퀘스트를 수행하면 외교관이라는 관직을 얻고 외교 스탯이 개방되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하지만 물론 퀘스트 난이도가 무척 높죠. 퀘스트를 진행하는데 최소 반년의 기간은 소모해야할 겁니다.”

“끙....”

그리드는 난처함을 느꼈다.

후로이 또한 랭커다. 그가 그리드의 곁에 있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그 누구보다도 그리드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관직 하나를 획득하랍시고 후로이에게 고난이도 퀘스트를 강요한다는 것이 그리드는 썩 내키지 않았다. 후로이의 시간을 빼앗었다가는 자칫 후로이가 힘들게 지켜온 랭커 자리를 놓칠 수도 있었던 까닭이다.

결국, 고심 끝에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외교관 퀘스트를 여태까지 아무도 수행하지 않은 걸 보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외교관이라는 관직 자체에 메리트를 느낄 수 없다는 뜻이겠지. 됐어. 후로이를 방해할 생각은 없다. 차라리 아예 새로운 사람을 구해보자.”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라우엘은 속으로 못내 아쉬웠지만 그리드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이다. 마음을 접은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주군!! 섭섭합니다아아아!!”

벌컥, 그리드의 집무실 문이 열리더니 후로이가 뛰어 들어왔다.

그리드가 왕성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그리드의 곁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후로이였다.

오늘도 ‘호위’를 명목으로 그리드의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그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문 앞에서 두 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소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외교관! 제가 되어 보이겠나이다!! 저의 뛰어난 화술로 타국 외교관들을 농락하고, 유린하여 템빨국의 꼭두각시가 되게끔 만들어 보이겠나이다!!”

“....외교관이라는 게 그런 거였어?”

설마 외교관이 돼서도 패드립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며 미소 짓는 그리드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가 후로이에게 느끼는 감사는 언제나 큰 것이었다.

‘국가대항전 시작하기 전에 후로이 아이템부터 새로 만들어 줘야겠다.’

다짐하는 그리드.

국가대항전이 다가오고 있다.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