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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75화 (570/1,794)

템빨 35권 - 7화

그리드는 놀의 가치를 무척 높이 평가했다. 최소한 전투 분야에서 만큼은 피아로 이상으로 보았다.

기본적인 능력치가 피아로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대단위 치유 스킬과 방어력 상승 버프를 보유하였으므로 효용성이 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점은.

‘강력한 생존 욕구.’

그리드가 피아로, 아스모펠 등의 네임드 NPC를 전투에 참가시키기를 꺼려하는 이유, 그들의 목숨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와 달리 부활할 수 없는 존재들. 그리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로와 아스모펠은 숭고한 기사도 정신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그리드를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목숨을 쉽게 내던졌다. 그리드는 바로 그 점이 두려웠다. 그들을 전쟁에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놀은 그들과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삶에 대한 의욕이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자신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는 목적조차 잊고 퇴각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겁쟁이라며 조롱할 수도 있는 특성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도리어 반대로 생각했다. 자기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다.

‘부담 없이 써먹... 아니, 전쟁에 내보내기 좋겠어.’

템빨국의 장군으로서 전장을 누비는 놀의 모습을 상상하는 그리드의 기대감이 증폭된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이다.

상상해 보라.

네임드 NPC. 그것도 직계 뱀파이어가 일개 유저의 부하가 된 것을 세상이 알게 되었을 때 발생할 파장을!

‘이것 참, 또 난리 나겠구만.’

히죽히죽!

그리드가 헤실헤실 웃었다.

벌써부터 어깨가 으쓱여졌고 콧대가 높이 치솟았다.

허세는 아니다.

스스로 세운 새로운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다.

‘어찌됐든....’

그리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당장 놀을 곁에 두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식량 문제였다.

‘...역시 피아로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어.’

피아로는 이곳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새로운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작물이 놀의 식량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였다. 그리드 입장에서는 기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결정한 그리드가 여전히 피아로와 으르렁거리고 있는 놀에게 말했다.

“놀, 당분간 피아로의 곁에서 밭일을 돕도록 해라.”

“뭐라고!!”

안 그래도 새하얀 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뱀파이어.

그것도 백작급 직계인 자신에게 밭일을 하라니?

상상조차 못해 본, 실로 저질스러운 농담이었다.

“흥! 인간들의 말장난이라는 건 도통 적응이 안 되는군!”

그리드가 진심으로 말했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놀이었다. 콧방귀 뀌는 그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어쩔 수 없어. 너를 지금 이 상태로 데리고 나갔다가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테니까.”

“제길... 아까 말한 도의적인 문제라는 거냐?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라. 너의 백성들은 해치지 않겠다. 다른 왕의 백성들을 식량으로 삼겠어.”

“아니, 그랬다가는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애초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네 식량 문제는 미리 해결해 두는 편이 좋아.”

“큭....!”

놀이 이를 갈았다. 그는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고작 인간 몇 놈의 목숨과 주변 시선 따위를 걱정해서 내게 밭일을 시키겠다고? 너는 내 가치를 모르는 것이냐? 내 힘을 상기해라! 나는 강력한 무력이다! 너를 인간계의 지배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힘 그 자체란 말이다! 그런 내게 밭일이나 하라고!!”

“.....”

그리드는 놀이 화내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리드가 놀의 입장이었어도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에게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고, 사회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것이 있다. 앞으로 인간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네가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선 곤란해.”

“무슨 말인지 대강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밭일이라니!!”

“.....”

포효하는 놀을 보고 움찔한 그리드가 피아로에게 속삭였다.

“나도 좀 너무하다고는 생각해. 직계 뱀파이어한테 밭일을 시켜야 한다니... 농사짓는데 꼭 놀의 힘이 필요한 거야?”

“네, 그렇습니다.”

피아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새로운 농작물을 재배하는데 뱀파이어의 피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밭일은 심신을 갈고닦는데 큰 도움이 되는 수련인 바, 놀이 앞으로 인간계를 살아감에 있어서 밭일은 좋은 경험이자 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 그래....”

그리드의 피아로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항상 궁금해 하던 부분을 물었다.

“그런데 황금 호두 재배는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은 답이 없습니다.”

“그래... 쉽지 않겠지.”

반쪽짜리라고는 하나 엘릭서다. 엘릭서를 재배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어쩌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엘릭서를 유저 개인이 재배하게 될 경우 발생할 파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S.A 그룹이 미연에 차단해 놓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뭐, 좋아. 피아로와 놀을 제외하고 모두 귀환한다.”

“이봐! 진짜냐!!”

놀이 연신 고함을 내질렀다. 겉모습은 청초한 미소년인 주제에 목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컸다.

그를 애써 외면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다가와 말했다.

“이 정도 전력이 모인 김에 나머지 도시들까지 공략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그리드는 현재 시점에서 마리로즈와 펜릴의 레이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마리로즈는 아예 승산이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고, 펜릴은 백작보다 몇 배나 강한 이상 최소 4차 전직 후에 도전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지금 무리해서 도전했다가 병력을 잃는 건 너무 큰 타격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그 둘이 없는 도시들을 공략하는 일뿐이다.

직계가 존재하지 않는 도시들 말이다.

“직계가 없는 도시를 공략해 봤자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적잖아. 국가대항전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전까지 각자 흩어져서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편이 좋다고 본다.”

“인정합니다.”

납득한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드는 왕명을 내렸다.

“전군 귀환하라.”

“예!!”

왕명은 절대적.

그리드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수만 대군은 자리를 떠났다.

말 한 마디로 수만 명의 병력을 움직이는 힘....

그리드는 감회가 새로웠다.

‘왕. 그래, 나는 왕이다.’

이제 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다.

나의 명예가 즉 그들의 명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대항전에서도 멋진 모습만 보여야지.’

지지 않겠다.

상대가 설령 크라우젤일지라도.

‘이번엔 내가 이길 차례야.’

작년의 패배, 올해의 승리로 갚아 주리라.

다짐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불타오른다.

크라우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의욕이 충만해지고 즐거워지는 그였다.

***

“올해 국가대항전에서 일본은 얼마만큼의 활약을 펼칠 수 있을까요?”

찰칵!

찰칵찰칵!!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수백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인물, 다름 아닌 데미안이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최상위 랭커이며, 플레이어 최초로 레베카교 교황에 등극한 거물 중의 거물.

한국인인 그리드의 열성 팬이라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되기도 했지만, 데미안은 현대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영웅이었다.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서 그의 능력은 일본 전 국민이 인정했고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특히 올해 국가대항전은 일본에서 개최되는 바, 국민들은 데미안을 비롯한 일본인 랭커들이 예년보다 더 큰 활약을 펼쳐 주길 기원했다.

“1세기 전만 해도 일본은 e-스포츠 약소국으로 분류됐었죠. 하지만 그건 온라인 게임을 등한시하는 일본인들의 성향 탓이었지, 게임 재능 자체가 부족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어려서부터 게임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이기 때문에 평균 게임 실력이 뛰어나죠.”

실제로 그 사실은 Satisfy에서 입증되고 있었다. 각 클래스 랭커 목록에 일본인이 꽤 많은 편이었다.

데미안은 그들을 믿었다.

“올해 일본은 충분히 5위권을 노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개최국으로써 자존심을 챙기기에 충분한 순위겠죠.”

대부분의 기자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의 분석을 현실적이라고 보고 수긍하는 것이다.

반면 일부 기자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을 너무 저평가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에는 당신과 카츠를 비롯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일본보다 인구수가 10배 이상 많은 중국, 인도와 비교해도 랭커를 굉장히 많이 보유한 편이죠. 인구 비율로 따졌을 때는 랭커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일걸요?”

“근데 우리 일본이 3위권에도 들지 못한다는 건 너무 심한 악평 아닙니까? 특히 올해 국가대항전은 예년과 시스템이 다릅니다. 뛰어난 한 사람이 메달을 독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란 말입니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 한국처럼 독보적인 지존은 거느리지 못했을지언정 평균 전력이 높은 일본이라면 충분히 3위권에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또 시작이네.’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숱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왜 쓸데없는 악의를 보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혹시 당신은 한국이야말로 3위권에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역시나.

저들 극우 언론사의 기자들은 어떤 일이든지 한국을 연관시키고 음모론을 생성한다. ‘잘 팔리는’ 뉴스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에휴.”

누구를 쏙 빼닮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데미안.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대놓고 한숨 쉬는 그를 본 기자들이 깜짝 놀랐다.

겉보기 예의를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데미안의 행동은 무척 무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한국을 저격한 룰로 진행되는 올해 국가대항전에서조차도 당신들은 한국을 의식하는 겁니까? 불쌍할 지경이네요. 한국이 무서워서 밤마다 잠도 못 들 것처럼 보이는 걸요?”

“뭐라고...!”

“저런 무례한 자를 보았나!!”

팩트 폭력을 당한 기자들이 흥분해서 얼굴까지 붉혔다.

현재 기자회견 방송을 시청 중인 일본인 중 유난히 한국을 의식하는 우익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 데미안을 비난하는 게시 글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 또한 강인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불합리한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당신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내가 그리드 님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이겠지요? 내가 그리드 님을 언급할 때면 늘 좋은 기삿거리가 생겼으니까.”

“.....”

정확히 꿰뚫었다.

사실이기에 부정하는 기자가 없었다.

데미안이 입 끝을 말아 올렸다.

“금메달 2개.”

“....?”

“S.A그룹 탓에 2개 종목밖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셨으니, 올해의 그리드 님은 금메달을 고작 2개밖에 못 따시겠죠.”

다른 랭커는 일생토록 단 하나의 금메달도 따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건만, 데미안은 그리드에게 있어서 2개의 금메달을 ‘고작’이라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여태까지 그리드는 꼭 PvP 분야에 참가했었습니다. 실제로 제1회 국가대항전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했었죠. 하지만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는 크라우젤이라는 장벽이 나타나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올해 검성으로 등극한 크라우젤을 그리드가 이길 거라고 믿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한데 데미안 당신은 지금 그리드가 2개의 금메달을 따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였지요?”

“말인 즉.”

“그리드가 올해는 PvP에 도전하지 않고 다른 종목으로 우회할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요점은 이거다.

그리드가 크라우젤과의 승부를 회피할 것이냐는 것.

잠자코 듣고 있던 데미안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럴 리가요.”

“....?”

“그분은 도리어 크라우젤 님을 쫓아다닐 걸요?”

“....??”

“2개 종목 전부 크라우젤 님과 함께 참가하여 크라우젤 님을 넘어서는 것. 아마 그것이 그리드 님의 올해 목표일 겁니다. 제가 아는 그분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

작년에 마신 고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단 말인가!

기자들이 황급히 속보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이번에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드, 크라우젤 저격수를 자처!>

등등.

이와 같이 자극적인 타이틀이 각국 해외 토픽으로 떴다.

덕분에 그리드만 난처해졌다.

“아, 데미안 이 새끼.”

PvP가 아니면 되도록 크라우젤을 피하려던 그리드이다. 최소 1개의 금메달은 안정적으로 확보해 놓고 싶었던 것이다. 대장장이 종목에 출전할까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럴 수 없게 됐다. 지금 와서 크라우젤을 피했다가는 겁쟁이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있었다.

“아.... 그 자식이 은인을 이렇게 엿 먹이네.”

불행하다.

오늘도 평소와 어김없이 이와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그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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