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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73화 (568/1,794)

템빨 35권 - 5화

‘일이 이렇게까지 되기를 바랐던 게 아닌데...’

일국의 국왕 앞에서 물량빨을 내세우는 놀이 그리드는 괘씸했다.

진정한 물량빨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 숫자를 믿고 까부는 모습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리드는 라인하르트에 주둔 중인 본군을 소집한 것이다.

그 숫자가 무려 3만 이상이다.

놀을 레이드하고도 남을 만한 대군이었다. 놀에게 진정한 물량빨의 공포를 체감시켜 주기에도 충분한 숫자였다.

그리드가 그 이상의 병력을 원했을 리 만무하다.

한데 일이 꼬이고 말았다.

“수인족 왕 맥스옹, 맹우 템빨왕을 돕고자 군대를 이끌고 이곳에 당도했소!”

“.....”

“라덴과 질풍대 도착하였습니다! 스테임 공작 각하께서 보내셨습니다!!”

“.....”

“블란드입니다. 아버지께서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왕 전하를 지키라고 명하셨나이다.”

“....”

-그리드 사마, 위험하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지금 레베카의 딸들하고 함께 달려가고 있으니까 조금만 버텨 주세요!

-...제발 오지 마.

왕명의 파장은 그리드의 상상보다 훨씬 더 컸다.

사냥터에 나가 있는 그리드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고 오해한 각지의 영주들과 플레이어들이 그리드에게 끊임없이 원군을 보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 진입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원군이었다.

쓸모없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동하면서 소모한 식량... 어떡하냐....’

병사들이 소모하는 식량은 평시보다 전시에 더 많아진다. 단순 행군 시에도 평소보다 더 많은 식량을 소모했고, 이는 템빨국에 실질적인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템빨국은 농업 국가로써 식량 수출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식량은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드는 막말로 개떼처럼 모인 병력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걸 다 어쩌지...’

애초에 본군을 소집했던 시점부터 그리드가 바랐던 힘은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무력뿐이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참가시킬 생각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저 제자리만 지키고 서서 뱀파이어들에게 겁만 주면 충분했다.

왜?

첫째 이유, 병사들이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사망이라도 하면 템빨국에 큰 손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둘째 이유는.

‘이 많은 병사들과 경험치를 나눌 생각은 없어!’

그리드는 레이드에 피아로와 아스모펠만 참전하더라도 자신과 파티원들이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대폭 하락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병사들까지 참전시켜서 경험치를 분배하는 일을 그리드가 원할 리 없었다. 기껏 힘들게 직계 뱀파이어를 레이드해 놓고 쥐똥만 한 경험치만 얻으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그래서 그리드는 병사들은 제자리에 대기시켜 놓고 피아로와 아스모펠만 레이드에 참가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동맹을 도와라!! 은혜를 갚을 때다!!”

“해일 일으키기!!”

“.....”

제멋대로 원군으로 달려온 맥스옹과 수인족 군대가 모조리 레이드에 참전하는 바람에 계획이 물거품 되고 말았다.

이제는 레이드가 아니라 전쟁이었고, 그리드와 파티원들은 놀을 사냥하더라도 경험치를 바랄 수가 없게 됐다.

“하.....”

의욕을 잃은 채 한숨 쉬는 그리드!

피아로, 아스모펠, 맥스옹의 분투를 지켜보면서 그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굳이 레이드에 참가할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의욕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의욕을 잃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죽여 버리겠다!!”

피아로, 아스모펠, 맥스옹 세 사람의 다구리에 분노한 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발동되는 그의 대단위 마법에 템빨국 병사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그리드를 각성시키는 장면이었다.

경험치를 아쉬워하고 있던 그리드가 현실로 돌아왔다. 놀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상기한 그가 병사들을 수호하며 전진, 온갖 버프 스킬을 두르고 놀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 놓인 인물들과 힘을 하나로 합칩니다!]

[플레이어 공통 히든 피스 <협동 스킬>을 플레이어 최초로 개방하였습니다!]

[최초 개방 보상으로 <협동 스킬> 사용 시 추가되는 데미지가 20퍼센트 영구 상향됩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그리고 맥스옹과 그리드.

이들 네 사람은 의도적으로 스킬을 연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가 동시에 완벽한 타이밍을 읽었고, 서로를 신뢰하였기에 스킬을 연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협동 스킬>에 포함된 스킬들의 위력이 240퍼센트 상승합니다! 당신의 스킬 데미지는 총 260퍼센트 상승합니다!!]

콰자작-!

절구질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위력을 자랑하게 된 피아로의 파천(破天)이 놀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콰르륵!

콰르르르르륵!!

아스모펠의 회검(灰劍) 또한 그 못지않은 위력으로 놀을 베고, 또 베었다. 대상의 치유 효과를 완벽하게 봉인하는 회검(灰劍)의 효력이 미쳐 날뛰는 놀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바다 찌르기!”

대상의 체력 비례 데미지를 자랑하는 맥스옹의 궁극기 또한 피아로의 필멸을 연상시키는 위력을 발휘했다.

“커윽....!”

동시에 날아와 꽂히는 세 사람의 스킬이 놀의 생명력 게이지를 순식간에 위험 수준까지 떨어뜨렸다.

폭주 상태에 돌입한 대가로 방어력을 상실한 놀에게 세 사람의 협동 스킬은 무척이나 치명적이었다.

피를 토하면서 기세를 잃는 놀.

그의 흐릿해지는 시야에 그리드의 모습이 드리운다.

“연살파극(聯殺派極)!!”

“놈....!”

네 가지 검무를 동시에 추는 그리드에게 형제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하였던 놀이다.

놀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태어나고 수백 년.

나태의 저주 탓에 수면만 취해 온 자신이다.

드디어 저주를 극복하고 이제야 삶을 만끽하려하는 이때, 마치 하루살이처럼 세상을 눈에 담지 못하고 소멸하는 것을 놀은 원치 않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고 싶었다. 도시를 벗어나고, 사막을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유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푹-!

푹! 푹!! 푹!!! 푸욱-!!!

“....!!”

그리드의 공격에 실린 위력은 놀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설 정도로 강력했다.

협동 스킬의 위력이다.

안 그래도 큰 피해를 입고 있던 놀에게 적중하는 그리드의 공격은 사형선고 그 자체였다.

콰르르르르릉-!!

펑!

퍼퍼퍼퍼퍼퍼펑!!

연속적으로 찔리고, 찔리고, 베이는 놀의 몸을 계속해서 검은 불꽃이 집어삼킨다. 마치 잿더미로 만들어 소멸시키겠다는 기세였다.

‘아.... 아아아.....’

놀의 시야가, 정신이 점점 더 희미해진다.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고통조차 그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그가 느끼는 것은 오직 하나.

미련.

삶에 대한 갈망뿐이다.

‘이 또한 저주인가...’

놀은 생각한다.

만약, 자신이 여전히 나태의 저주에 시달리는 상태였다면, 이 순간의 죽음이 그토록 두렵고 슬프지는 않았을 거라고.

그저 귀찮을 뿐인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 또한 크게 나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품었으리라고 놀은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의 놀은 나태의 저주를 극복한 상태였다. 삶을 만끽해 보고 싶다는 의욕과 바람을 품은 상태였다.

지금 이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놀에게 끔찍한 고통이 되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그를 지배했다.

번쩍!

파도와 같은 검기를 내뿜고 치솟았던 그리드의 검이 이내 벼락처럼 내리꽂힌다.

최후의 일격이다.

‘어머님.... 태어나 이룬 것 하나 없는 이 못난 자식.... 존재할 가치조차 없던 이 하루살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당신께서 저를 낳아 주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건만, 타고난 저주의 숙명이라는 것은 정녕 극복하기 어렵군요.’

주마등처럼 스치는 삶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침실로 사용하던 관과 어머님의 얼굴뿐이다.

놀은 그 사실이 지독히도 허무했다. 어머님께 죄송했다.

‘만약.... 만약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와 준다면....’

이번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부질없는 바람이다. 이미 끝이다.

질끈.

놀이 두 눈을 감았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드의 검은 이제 그의 코앞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던 놀이 의문에 빠졌다.

자신의 두개골을 수박처럼 갈라 버렸어야 할 그리드의 검이 코앞에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착각인가?’

이미 나는 베였고, 나의 혼은 영겁의 <혼돈>을 떠돌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 이미 나는 죽었을 것이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이내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 놀이 슬그머니 두 눈을 떴다.

자신의 저주받은 혼을 영원히 거두게 될 <혼돈>의 풍경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한데.

“허억.... 허억.....”

눈을 뜬 놀이 본 모습은 <혼돈>이 아니었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그리드였다. 그의 양손에 쥐어진 거대한 대검은 놀의 눈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모두가 그리드를 주목하고 있었다.

어째서 놀을 죽이지 않은 것인지,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뭐....지?”

놀의 시선 또한 같았다.

그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린 그리드의 의도가 무엇인지 조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리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놀의 목숨을 끊겠다는 듯이, 재차 대검을 휘두르다가 또 한 번 놀의 코앞에서 검을 멈추기를 반복할 뿐이다.

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냐...? 왜 나를 죽이지 않고 살리는 것이냐?”

설마.

“네놈....! 네놈 나를 동정하는 것이더냐!!”

“.....”

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할 뿐이다.

이에 놀은 확신했다.

“맞구나... 네놈, 나를 동정한 게야. 내가 삶에 미련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마음이 약해진 게야....”

놀은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는 생김새를 지녔다. 고작 13살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가녀린 몸과 여린 음성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 따위가...!! 직계인 이 몸을 동정하고, 자비를 내리다니...!!”

주르륵!

쥐어짜듯이 소리치는 놀의 두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작 인간에게 동정 받았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서?

아니다.

기뻤기 때문이다.

태어난 이유조차 증명하지 못한 채 그저 존재해 왔을 뿐인 자신.

일말의 가치조차 없는 자신을 누군가가 동정하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는, 놀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한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지난 며칠 동안 자신과 몇 번이고 싸웠던 인간이다.

놀은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래.... 너만큼은.... 너만큼은 나의 가치를 엿보았던 거로구나. 지난 며칠 동안의 체험을 통해서, 너는 내가 존재해도 좋은 뱀파이어임을 통감하게 된 게야.”

“....?”

“....고맙다. 나를 부정하지 않아서, 나를 긍정해 줘서. 네 덕분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감동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

“네 덕분에 부지할 수 있게 된 목숨이다. 남은 삶, 너를 위해 쓰겠다. 너의 곁에서, 네가 믿어 준 나의 가치를 증명하며, 너의 호의에 보답하겠다.”

“......”

끝까지 아무 말이 없는 그리드였다.

놀은 그가 감격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당연하다.

일개 인간이 직계 뱀파이어의 주인이 된 것이다. 전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역사로 명기하더라도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전설로써나 구전될 이야기였다. 놀은 그리드가 감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리드를 대신해서 피아로가 입을 열었다.

“그리드 전하를 섬기겠다니 그것 참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우선 나와 함께 밭일을 하자.”

“[email protected]##...”

놀이 저도 모르게 악마어를 뱉었다.

이 미친 검성 놈은 대체 언제까지 농부인 척 연기를 하면서 자신을 바보 취급할 심산인 건지, 놀은 무척 불쾌했다. 그리드에게는 호감을 품은 반면 피아로에게는 적개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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