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5권
=======================================
템빨 35권 - 1화
“하압!!”
“이야아압!!”
“얌마! 그 공격을 옆으로 굴러서 피하면 어떡하냐!! 사방팔방이 적으로 가득한 전장 한복판에서 나 죽여줍쇼, 하고 배 내미는 꼴밖에 안 되잖아!! 막아!! 이 악물고 막으라고!!”
왕도 라인하르트.
병영 곳곳에 위치한 연병장에서 기합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새벽에도, 막말로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군사령관 아스모펠의 독특한 훈련 방침 때문이었다.
‘전쟁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법’이라고 주장한 아스모펠은 야간 훈련 또한 주간 훈련만큼의 비중을 두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물론 24시간 내내 혹사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중대 별로 로테이션을 돌려서 병사들의 체력을 안배했다.
덕분에 템빨국 병사들은 어두운 밤에도 평소와 비슷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동대륙에서 넘어온 주작단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일 강해지는 것이 실감 나. 저분의 훈련법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수애 아가씨께서도 인정하신 분이니까.”
높은 직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병장에 출근하는 아스모펠이었다.
가끔 보면 병사랑 구분도 안 됐다. 늘 병사들 사이에 녹아들어서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주작단원들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높은 직책에 있으면서도 저토록 병사들을 아끼고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괜히 판덕공.... 아니, 괜히 그리드 전하의 측근이 아니야.”
훌륭한 주인 밑에 훌륭한 부하가 있는 법!
주작단원들은 그리드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아스모펠 같은 부하도 있는 거라고 믿었다. 자신들 또한 아스모펠 같은 존재가 되기를 열망했다. 자신들이 강하고 특별하다고 해서 병사들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고, 특혜를 바라지도 않았다. 항상 병사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이에 기존의 템빨국 기사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안 그래도 강했던 사람들이 훈련조차도 우리보다 더 빡세게 하려고 하다니...”
<서부의 신성> 로이먼.
본래 레이단의 평범한 병사였던 그녀는 아스모펠에게 발굴되어서 기사가 되었고, 이후 피아로에게 직접 훈련을 받아 왔다.
능력치 한도치가 없는 네임드 NPC로서 그리드에게도 큰 기대를 받고 있는 인재였다.
잠재력만큼은 최고인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기사로 승격되고 몇 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에서 손꼽히는 강자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주작단원들과 비교하면 아직 다소 부족했다. 동대륙 출신인 주작단원들의 레벨이 기본적으로 무척 높았기 때문이다.
“저들하고 똑같은 훈련량을 소환하는 정도로는 저들을 평생 따라잡지 못할 거야. 우리도 더 열심히 훈련하자.”
“좋아! 힘내자!!”
로이먼을 필두로 기사들 또한 큰 열정을 품었다. 주작단의 존재가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귀여워.’
이제는 대부분의 기사들이 로이먼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몇 년을 같이 생활하였으니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이먼은 자신의 정체가 발각됐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여전히 남자인 척 보이려고 열심히 애쓰는 중이었다. 압박붕대를 최대한 활용해서 탈의실과 목욕탕조차도 동료들과 함께 쓰려고 노력했다. 자신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후다닥 도망치는 동료들의 모습에 의아함도 못 느끼고 말이다.
“음! 동료들끼리 아주 화기애애하군!”
피아로 또한 여전히 로이먼의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를 훈련시킨답시고 가장 오래 곁에 붙어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자란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로이먼 본인이 스스로를 남성이라고 밝혔으니 의심의 여지없이 남성이라고 믿는 것이었다.
하여, 피아로는 기사들이 로이먼을 여동생처럼 아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로이먼이 그저 훌륭한 리더로서의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동료들이 잘 따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아....”
아스모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자신의 친구가 영영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리란 생각에 근심이었다.
그때였다.
“왕명이오!!”
연병장으로 몇 기의 기마가 진입했다. 그들은 연병장의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곳곳에 소리쳤다.
“수비 병력을 제외한 전군, 내일모레까지 레이단의 사막으로 집결하라는 템빨왕 전하의 명령이오!!”
“....!!”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그리드 전하께 혹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나 먼저 출발하겠네!”
군대의 통솔은 아스모펠에게 맡기고 홀로 떠나려하는 피아로였다.
그를 아스모펠이 말렸다.
“만약 전하께서 위급한 상황이셨다면 기사 소환을 사용하셨을 테야. 너무 걱정 말고 전하의 명령대로 병사들을 통솔해 가도록 하세.”
“음... 그렇군.”
전하를 너무 걱정한 나머지 내가 너무 흥분하고 말았다.
아스모펠 덕분에 진정할 수 있었던 피아로가 침착하게 병사들을 통솔했다.
이날.
일부 수비군을 제외한 라인하르트의 모든 병력이 출정 길에 올랐다. 매일 병사들의 함성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연병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허, 대체 무슨 일일꼬.”
스테임 공작.
템빨국의 도독으로서 대공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 평가 받는다.
북부의 6개 도시를 다스리는 그는 항시 위엄이 넘쳤다. 템빨왕 그리드의 장인답게 체통을 잊지 않고자 늘 신경 썼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왕도 라인하르트의 모든 병력이 그리드를 구원하고자 출정’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까닭이다.
“당최 무슨 일이기에.”
혹 사위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체통도 잊고 우왕좌왕하는 스테임 공작이었다.
한때는 <북부의 신성>이라 칭송 받았고, 이제는 <북부 최강>으로 등극한 젊은 기사 라덴이 그를 안심시키고자 노력했다.
“전하께서 정녕 위험한 상황에 놓이셨다면 이곳 북부에도 원군 요청을 보내셨을 겁니다.”
하지만 그리드는 북부에 원군 요청을 하지 않았다. 굳이 북부까지 나설 필요도 없다는 뜻. 스테임 공작이 우려할 정도로 그리드가 위험한 상황은 아닐 거라는 것이 라덴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지는 법이다. 스테임 공작은 걱정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혹시 모른다. 혹시 몰라.”
그리드는 템빨국 그 자체다. 그리드가 템빨국을 세웠고, 템빨국은 그리드를 위주로 돌아간다.
설령 그리드에게 변고가 생겼다가는 템빨국 전체가 흔들릴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스테임 공작은 사랑하는 자신의 딸 아이린과 손주 로드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원군을 파견해야 겠어.”
원군 요청지가 레이단의 사막이라는 점이 다소 걸리기는 한다.
이곳 북부는 서부 레이단과 달리 무척 추운 지방이었고, 그 탓에 북부의 병사들은 추위에 강한 반면 더위에 약했으니까.
원군을 보내더라도 과연 사위에게 제대로 도움이나 될까?
“에잇, 없는 것보단 낫겠지.”
마음을 다스린 스테임 백작이 군대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원군은 제가 이끌겠습니다.”
라덴이 나섰다.
“저는 레이단의 사막을 이미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번 출정에는 제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아직 에트날 왕국이 존재하던 시절.
렌 왕자가 레이단을 침공한 일이 있었다. 그때 레이단 수호에 일조하고자 싸웠던 것이 다름 아닌 라덴이었다.
“음, 그래. 자네야말로 적임자로군.”
스테임 공작이 라덴에게 언제나와 같은 눈빛을 보냈다.
오직 신뢰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질풍대를 이끌고 가게. 일반 기마대보다 3배 이상 빠른 행군이 가능한 그들이라면 시일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게야.”
“질풍대를...!!”
질풍대는 북부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마대였다. 또한 질풍대 대장은 벌써 10년 이상 피닉스가 담당하고 있었다.
스테임 공작이 라덴에게 잠시나마 질풍대를 맡긴다는 뜻은, 피닉스의 후임으로 라덴을 점찍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감격한 라덴이 깊이 고개 숙였다.
“반드시 기대에 보답하는 무훈을 세우고 돌아오겠나이다.”
“그리드 전하께서 무사하시기만을 비네.”
***
“라인하르트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동향이 포착되었습니다.”
수인족의 왕국 세이렌.
“뭐라? 자세히 말해 보아라.”
“예.”
쏼라쏼라.
“음.... 으으음....”
아들의 보고를 접하는 맥스옹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지기 시작한다.
템빨국의 전황을 보아, 아무래도 나와 우리 왕국의 은인이며 맹우인 그리드가 위험에 처한 듯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맥스옹으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당장 전군을 소집하라!! 내 친히 군대를 이끌고 템빨왕을 도우러 가겠다!!”
“예!!”
이견은 없었다.
맥스옹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수인족 군대는 즉시 집결하였다.
수인족.
타고난 육체 능력과 마력이 인간을 가뿐히 초월하는 종족이다. 만약 그들이 수중 생활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지배하는 땅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었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이다.
그 강력한 종족이.
“출발한다!!”
“우오오오오!!”
오로지 그리드를 구원하고자 육지에 올랐다.
수인족 왕 맥스옹을 필두로!!
***
“아들아. 우물우물.”
“네, 후작 각하. 쩝쩝.”
요새도시 파트리안.
높디높은 성벽 위에 아슈르 부자가 나란히 서 있다. 귀공자들이 깊은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쩝쩝. 그리드 전하를 증오했었다. 우물우물. 이후 같은 편이 되어서도 썩 호감은 느끼지 못했지.”
“....알고 있습니다. 쩝쩝.”
대화를 나누면서도 계속 찐 감자를 먹는 아슈르 후작과 블란드 남작이었다.
감자를 돼지 사료로 인식하고 일평생 먹지 않았던 귀족 부자의 입장에서 뒤늦게 접한 레인보우 포테이토의 맛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중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커다란 레인보우 포테이토 하나를 모조리 다 먹어 치운 아슈르 후작.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는 그의 행동에서는 교양이 철철 넘쳤다. 과연 명가 출신은 달라도 달라 보였다. 뺨에 붙은 감자 조각을 버리지 못하고 혀로 핥아 먹기 전까지는.
“그 어느 국가보다 빠르게 성장 중인 템빨국을 보면서, 요즘에는 그리드 전하를 섬기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도시 파트리안은 그 지리적 특성상 언제라도 전화에 휩쓸릴 수 있는 도시였다. 항시 대량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에트날 왕실은 무능했고, 파트리안은 언제나 병력 부족에 시달렸었다. 그 탓에 파트리안의 주민들은 항상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파트리안 주민들의 얼굴에 활기가 넘치고 있다. 든든한 강병들이 도시를 지켜 주고 있으며, 강력하고 부패하지 않은 왕실이 항시 우리를 보살펴 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전하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전하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지 어렴풋이나마 상상할 수 있어. 이제 나는 그를 존경한다.”
“.....”
블란드가 은은한 미소를 피어올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사람을 존경한다고 하자 기뻤던 것이다.
아슈르 후작이 본론을 꺼냈다.
“그리드 전하는 이 나라의.... 아니, 이 대륙의 보배다. 대륙을 공포로 물들여 온 저 사하란 제국에 유일하게 항거할 수 있는 영웅이다. 그분은 늘 안전해야 한다. 그러니 아들아, 나 또한 레이단에 원군을 파견하려고 한다.”
“타당한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출사하였다가는 저 가우스 왕국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원군은 블란드 네가 이끌도록 해라. 반드시 그리드 전하를 지키고 너 또한 무사 생환하여야 한다. 이는 명령이 아닌 부탁이다.”
“기대에 부흥하도록 하겠습니다.”
파트리안 병사들의 평균 레벨은 템빨국 내에서 가장 높다.
가우스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특성상, 그리드와 라우엘 모두 파트리안 방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강병들이.
“당장 사막으로 간다!”
“예!!”
대마법사 아슈르의 아들이자, 농부 피아로의 제자인 마검사 블란드의 지휘 아래 성문을 빠져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