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22화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허억... 허억.... 큭...!”
연신 피를 토하는 그리드의 시야가 붉게 점멸한다.
생명력이 위험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뜻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경고였다.
그의 귓가로 놀의 음성이 들려왔다. 격노와 살기가 점철된 음성이었다.
“네놈들이... 네놈들 인간 따위가....!”
[뱀파이어 백작 ‘놀’이 <직계의 위압>을 전개합니다.]
쿠르르르르르르르!!
대기가 떨린다. 루쏜이 흘린 피가 이룬 강에 파동이 일었다.
모든 하위종에게 공포와 절망을 선사하는 직계의 위압.
오늘 레이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템빨단원들에게 큰 장벽으로 작용했던 힘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저항하였습니다.]
도시에 존재하는 템빨단원은 그리드밖에 없었다.
직계의 위압은 이제 무의미했다.
루쏜을 레이드하는 과정에서 그리드를 제외한 템빨단원 전원이 사망한 까닭이다.
꽈드득, 이를 간 그리드가 붉게 충혈된 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화를 낼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아니냐?”
직계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 쉬울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았다. 다만, 파티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던 것이 그리드와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췄던 것이다.
도시의 지형은 물론이고 루쏜과 놀의 개인 특성을 사전에 파악하고,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로부터 각종 버프 물약을 조달해 오고, 도시 곳곳에 알람 마법 함정을 설치해 놓는 등.
템빨단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하지만 레이드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놀의 능력 때문이었다.
놀은 단지 방어력과 저항력이 뛰어난 탱커가 아니었다. 그의 스킬 구성은 오히려 서포터에 가까웠다. 회복과 이니시에이팅 능력에 특화되었다.
피의 해일과 여진을 수시로 일으키면서 템빨단의 진형을 몇 차례나 깨뜨렸고, 템빨단이 기껏 총력을 쏟아서 빈사상태에 빠뜨린 루쏜을 또 몇 차례나 회복시켰다.
특히 그 회복 능력 <헌혈>이 문제였다.
놀의 헌혈은 루쏜의 생명력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방어력까지 상승시켰다.
덕분에 템빨단의 피해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커졌다. 루쏜을 사냥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소요하고 말았고, 그 과정에서 템빨단원 전원이 사망에 이르렀다.
그리드는 소름이 돋았다.
만약, 루쏜이 크레이 백작 레이드 때부터 서포터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템빨단은 하늘이 뒤집히는 한이 있더라도 7번 도시를 공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등의 NPC들을 파티에 참전시켰더라도 공략을 장담하지 못했을 수준이다.
‘나태의 저주...’
저주에 빠진 직계들이 만사를 귀찮아하며 협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그리드에게는 천만 행운이었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 엘핀스톤을 레이드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나태의 저주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혈왕 후보> 칭호의 능력이 증오스러웠다.
자신을 마주치는 직계들은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된다.
이 효과는 후작 펜릴과 공작 마리로즈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터.
백작보다 몇 배, 몇 십 배씩 더 강할 그들을 레이드할 가능성은 전무해 보였다.
하지만.
“너는 예외지.”
킥, 그리드가 독기에 찬 미소를 그렸다.
“오늘 내 동료들을 해친 대가를 조만간 똑똑히 치르게 될 거다.”
“닥쳐라!!”
격분한 놀이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나태의 저주로부터 해방 된 그는 살의조차도 의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푸욱-!
생명력 회복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 직전.
놀이 찔러오는 지팡이에 가슴을 꿰뚫린 그리드의 시야가 흑백으로 변했다.
[사망하였습니다.]
[36.2퍼센트의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그리드의 부츠>를 잃었습니다.]
***
“피해 규모는?”
7번째 뱀파이어의 도시 입구.
부활하자마자 돌아온 그리드가 질문하자 이미 사전에 조사를 끝내 놓았던 라우엘이 보고했다.
“전원 경험치를 잃었고 이 중 14명이 장비 아이템을 드롭했습니다.”
“뭐? 14명이나?”
Satisfy에서 사망은 두려운 요소다. 플레이어에게 엄청난 페널티를 안겨줬다. 레벨에 비례한 경험치 손실은 기본이고, 보유 중인 아이템 중 일부를 드롭할 여지도 있었다.
그중 특히 최악은 장비 아이템을 드롭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장비 아이템의 가치가 높은데다, 만약 주력으로 사용하는 아이템을 잃기라도 했다가는 당장의 전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이랄까.
“장비 아이템을 드롭하는 확률은 1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잖아?”
그렇다.
플레이어 사망 시 장비 아이템의 드롭 확률은 꽤 낮은 편이다.
그리드가 체감하기로는 50퍼센트 정도 되는 것 같았지만.
‘설마... 다들 나한테 재수 없음이 옮은 건가?’
파티원 중 절반 이상이 장비 아이템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그리드!
필요 이상의 죄악감을 느끼는 그에게 라우엘이 더욱더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폰 님과 반트너 님은 주력 무기와 방패를 잃었어요.”
“.....”
그리드는 대검을 사용할 때나 종종 스왑해서 쓰는 그리드의 부츠를 잃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심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아이템의 재물적 가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폰과 반트너는 당장 사용해야 하는 무기와 방패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열망의 무아검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 그리드는 걱정이었다.
힐끔, 폰과 반트너에게 시선을 돌려 보자 시선이 딱하고 마주친다. 그들은 이미 진즉부터 그리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창....”
“방패....”
“.....”
새로운 창과 방패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애틋한 눈빛!
차마 만들어 달라고 말은 못하고, 창과 방패만 중얼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이지 형제처럼 빼닮아 있었다.
다만 폰은 훤칠한 미남자이고 반트너는 대머리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
“제작법이야 준비돼 있어. 어차피 레이드에 다시 도전하려면 모두의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도 기다려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템을 다시 만들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아.”
아이템 제작이야말로 그리드 힘의 원천이다. 아이템을 제작함으로써 상승하는 능력치 효과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또한 폰과 반트너는 공짜를 바라는 게 아니다. 이들은 그리드가 제작해 주는 아이템에 늘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도 남는 시간 동안 아이템을 제작하는 것이 좋았다.
다만, 문제는.
“재료가 없다는 거지.”
“.....”
“.....”
폰이 사용하던 <흑룡창>과 반트너가 사용하던 <화염 방패>는 벨리알의 부산물을 재료로 제작한 최고의 아이템들이었다. 그것과 똑같은 것을 다시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내가 더 강했어도.’
루쏜을 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이토록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책하는 그리드에게 지슈카가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부족한 게 아니라 우리가 부족한 거야. 괜한 자책하지 마.”
폰과 반트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가 약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다. 그리드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
분위기가 우울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파티원들이 가치 높은 아이템을 잃은 상태였으므로 부담감이 컸다.
특히 국가대항전이 머지않았다는 점이 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각국을 대표하는 최강의 랭커들이 모이는 자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참전해도 부족할 판국에 힘이 약화되다니, 다들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라우엘의 표정은 밝았다.
“사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요. 잃은 아이템들이야 되찾으면 그만입니다.”
떨어뜨린 아이템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뭘까?
Satisfy에 유저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어느 사냥터에도 유저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으므로, 일단 한 번 아이템을 떨어뜨리게 되면 그걸 되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황급히 부활해서 아이템을 떨어뜨린 장소로 달려간다고 해 봤자, 이미 그 장소에는 아이템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진즉에 다른 유저가 가져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도시는 평범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레이단의 광활한 사막 곳곳에 은밀하게 존재하며, 난이도 자체가 높은 이 뱀파이어의 도시들은 일반 플레이어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힘든 장소였다.
또한 라우엘은 이미 진즉부터 뱀파이어의 도시를 통제하고 있었다. 가치 높은 사냥터를 템빨단 외 플레이어가 점령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였다.
이는 플레이어들의 정서상 그릇된 일도 아니었다. 영지 내에 존재하는 사냥터를 통제하는 것은 그 영지를 보유한 길드의 특권이기도 했으니까.
“우리가 떨어뜨린 아이템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내일 다시 7번 도시로 가서 아이템을 되찾고 놀을 레이드하도록 하죠.”
“듣고 보니 그렇네. 누가 이미 가져갔을 거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도시 입구는 계속 우리가 지키고 있기도 하니까.”
“좋아, 내일 되찾자고.”
“아자아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모두가 희망을 품고 내일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라우엘이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너무 들뜨지들은 마세요. 놀이 서포터에 가깝다고는 해도 백작은 백작입니다. 종합적인 전투력이 다른 백작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요. 강한 상대입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다가는 아이템을 회수하기 전에 또 죽을 거예요.”
또한.
“놀은 자신의 서포팅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대량의 뱀파이어와 사역마를 통솔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드 님 덕분에 나태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으니 부지런히 싸우겠죠.”
“.....”
그리드의 가슴이 뜨끔했지만 라우엘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일 뿐이다. 딱히 그리드에게 눈치를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내일 레이드의 관건은 떨어뜨린 아이템을 얼마나 빨리 회수하느냐에 있습니다. 혹시 아이템을 다 회수하기도 전에 놀과 마주치게 되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요.”
크리스가 긍정했다.
“맞아. 놀은 다른 백작에 비해서 공격 스킬이 부족한 대신 CC기와 지속력이 크레이보다 더 뛰어난 놈이다. 만반의 준비 없이 놈을 해치운다는 건 불가능해. 각자 아이템을 잃어버렸던 지점을 잊지 말고 기억해 놓도록 하자.”
라우엘이 마지막으로 경고를 덧붙였다.
“놀은 반드시 레이드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놀을 레이드하지 못하고, 놀이 펜릴이나 마리로즈에게 합류하게 되면....”
꿀꺽!
곳곳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동시에 최악의 상상을 떠올린 것이다.
뱀파이어 후작 펜릴이나 공작 마리로즈에게 놀의 서포팅 능력이 가세 될 경우....
“펜릴과 마리로즈는 앞으로 영원히 레이드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도 있어요.”
***
“다들 기억하고 있는 거 맞지?”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7번 도시에 재입장하기에 앞서서 그리드가 질문했다. 노파심이었다.
파티원들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리드 네가 만들어 준 소중한 아이템을 떨어뜨린 지점을 잊을 리 없잖아?”
“나도 기억한다.”
대답을 확인한 그리드가 다시 한 번 주지시켰다.
“좋아. 그럼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도록 하자. 우리가 아이템을 회수하기 전까지 놀에게 침입을 발각당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알았어.”
여태까지 뱀파이어 도시를 여러 차례 공략한 경험이 있는 템빨단원들이다. 그들의 경험에 따르면, 도시에 입장하자마자 보스가 등장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전투를 진행하면서 큰 소란이 발생해야지 뒤늦게 보스가 침입자의 출현을 알고 모습을 드러내는 식으로 레이드가 진행됐었다.
하여, 당연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는 템빨단원들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믿음을 그리드 또한 품은 것이 문제였을까?
이들의 믿음은 배신당하고 만다.
“후후훗, 기다리고 있었다.”
“.....”
7번 도시에 입장함과 동시였다.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놀과 마주친 것은.
놀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을 사전에 알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족히 500은 넘어 보이는 뱀파이어와 그 배 이상 되는 사역마 대군을 거느린 채 말이다.
초네임드급 NPC의 놀라운 인공지능이었다.
“다... 다음에 다시 올게. 하하.”
어색하게 웃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
“XX.... 우리 애들 다 불러.”
7번 도시 입구.
도시에 다시 입장할 엄두를 못 내고 우왕좌왕 중인 템빨단원들에게 그리드가 이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왕명이다.
수천, 수만을 뜻대로 움직이는 영향력을 지닌 왕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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