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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66화 (561/1,794)

템빨 34권 - 20화

어쌔신하면 떠오르는 인물?

3살짜리 어린아이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템빨국을 보위하는 그림자를 떠올릴 것이다.

살신 페이커 말이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최강의 PK실력을 보유한 그의 무용담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어쌔신 하면 그를 떠올리는 것이 응당 당연한 수순일 지경이었다.

단, ‘국가대항전에서 활약했던 어쌔신’이라는 전제를 붙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페이커는 건국식 외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타르마를 떠올렸다.

다크 게이머 집단 <블러드 카니발> 출신의 어쌔신 타르마.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명성 그대로의 솜씨와 활약을 펼쳤었다.

그리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번 국가대항전에서는 반드시 설욕할 수 있다.’

그리드에 의해 블러드 카니발이 와해된 이후, 동대륙의 모래 왕국 가야에 숨어들었던 타르마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온갖 퀘스트를 수행한 끝에 드디어 모래와 바람을 다루는 비술을 습득한 그는 자신이 한층 더 강해졌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불과 3달 전까지만 해도 사냥할 엄두조차 못 냈던 영물들을 손쉽게 사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실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볼 때마다 그토록 강하게 느껴졌던 그리드도 이제는 한 수 아래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 힘만 있으면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퍼석-!

타르마의 손에 붙잡힌 여우 인간의 장검이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서 흩어진다.

타르마가 얻은 특수 스킬 중 하나인 <풍화(風化)>의 힘이다.

대상이 ‘사물’로 분류 될 경우 붕괴, 분해시킬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몬스터나 플레이어가 무장한 아이템 또한 사물로 분류된다.

그리드의 템빨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완벽한 카운터 능력인 것이다.

‘풍화의 지속 시간은 5초.’

협곡의 영물들을 멸살시킨 후, 지그시 눈을 감은 타르마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시물레이션의 시작이었다.

과거에 자신이 직접 상대해봤던, 그리고 최근에 더욱 더 성장한 그리드를 적으로 상정한 채 상상으로 전투를 진행해보는 것이다.

결과는.

‘이긴다!’

타르마는 보았다.

그리드가 자랑하는 아이템들을 모조리 풍화시킨 후 전투에서 승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

씨익!

타르마의 뾰족한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걸린다.

그는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에게 수모를 되갚아주고, 바닥 쳤던 자신의 명성을 이전보다 더 높이 끌어올릴 수 있다는 확신을 품었다.

‘그럼 이제 스폰을 구해볼까.’

그리드가 손해를 입을 경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타르마가 벨토 왕국 전쟁을 떠올렸다.

‘아그너스가 그리드를 적대하고 있었지?’

산 자와 죽은 자의 왕이 되겠노라고 선언했던 임모탈의 주인이지만 그리드와 아레스의 협공 앞에 퇴각하고 말았었다.

아그너스 그자라면 필시 그리드를 커다란 장벽으로 인식하고 있을 터다.

‘그리드가 국가대항전에서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하게 만들어준다고 하면 그자 입장에서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겠지.’

S.A그룹은 이전 국가대항전과 마찬가지로 메달리스트들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조했다. 그리드가 메달을 따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였고, 그리드의 적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익인 것이다.

확신한 타르마가 아그너스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아그너스의 별명이 왜 미친개인지를 여실히 실감했다.

“그리드를 잡아줄 테니까 돈을 달라고? 그게 무슨 미친 개소린지 이해가 안 되는데? 응~~?”

“왜 이해가 안 된다는 거요? 그리드가 메달을 못 따게 되면 당신에게 이익으로 작용하리란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게요?”

“킥킥킥? 그리드는 내 사냥감이다. 너 따위가 잡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아니, 그리드가 당신의 사냥감인 거랑 내가 못 잡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내 사냥감을 건드는 놈들은 내가 죽일 거거든.”

“....??”

또라이인가?

대화가 자꾸 어긋나고 뜻이 통하질 않는다. 마치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 같다.

어이가 없어진 타르마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저 돈 주기가 싫어서 연기하는 건가? 쫌생이 같은 놈이로군.’

...아니, 단지 수전노로 보기 보다는 의외로 영리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어차피 자신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내가 그리드를 해치울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걸 테지.’

내가 그리드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그너스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라고, 추측한 타르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다른 의뢰인을 찾아보도록 하지.”

스르륵.

어둠 속으로 퇴장하는 타르마.

그가 사라진 자리를 지그시 응시하던 아그너스가 베라딘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방금 그놈 누군데?”

“하하, 피라미는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저자를 피라미 취급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쾌하게도 웃는 베라딘이다.

그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타르마는 이미 몇 차례나 그리드를 상대해본 인물이다. 그만한 인물이 그리드를 사냥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었다는 건 그만큼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뜻일 테지.’

타르마가 의외로 큰 활약을 펼쳐주지 않을까?

‘올해 국가대항전은 특히 기대되는군. 아그너스 님께서 참가하지 않으시는 건 다소 아쉽지만.’

이미 벨토 왕국 전쟁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아그너스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공식석상에 참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그가 규칙에 얽매여야하는 행사에 참가했다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크라우젤을 따르는 과정에서 하오가 품게 된 확신이다.

“260레벨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하오는 이제 감탄하고 경악하기도 지쳤다.

크라우젤의 압도적인 레벨링 능력은 이미 진즉부터 상식선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말의 시간 낭비조차 허용하지 않는 사냥터 이동 동선, 그 어떤 사냥터에서도 최적의 효율을 발휘하는 전투 구상 능력, 몬스터를 일망타진하는 압도적인 무력 등등.

크라우젤의 레벨링 솜씨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곁에서 그를 보고 어렴풋이나마 배운 하오의 레벨링 속도 또한 전과 비교해서 1.4배 상승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크라우젤은 본인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드는 최근 보름 동안 10레벨 가까이를 올렸어. 그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알렉산더가 부정했다.

“그자는 번헨 열도 클리어 보상 덕분에 광속으로 성장할 수 있던 거 아니야? 이후에도 계속 네임드 레이드에 집중하는 것 같고.”

그래, 네임드급 보스 레이드가 아니라면 그리드의 현재 레벨링 속도는 설명이 안 됐다.

또한 네임드급 보스 레이드 대상은 항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네임드급 보스라는 게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라우젤은 바로 그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네임드 보스 레이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 네임드 보스가 출현하는 사냥터를 여러 개 독점해서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물론, 크라우젤 또한 수많은 네임드 보스의 출몰 장소를 독점하고 있었다. 일반인은 상상조차 못하는 장소에서 출몰하는 네임드 보스들이 벌써 여러 마리 크라우젤에게 사냥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크라우젤은 대량의 경험치를 안겨주는 몬스터와 보스가 동시에 출몰하는 사냥터. 즉, 뱀파이어의 도시 같은 사냥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라우젤이 확보하고 있는 네임드 보스 출몰 장소는 대부분 잡몹들이 함께였다.

‘이래서는 결국 따라잡지 못할 수도.’

생각하는 크라우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초조함이라는 감정이 그를 긍정적으로 자극시키는 것이다.

늘 선두에 섰던 자신이 이제는 누군가를 뒤쫓아야하는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 크라우젤은 신선하고 재밌었다. 천상 게이머답다.

‘그래도 기왕이면 국가대항전까지는 300레벨을 달성하고 싶었는데... 현재 속도로는 두 달 뒤에 272쯤 되려나.’

아쉬워하는 크라우젤의 표정을 읽은 걸까?

하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PvP에 참가하실 예정입니까?”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렙차는 80에 육박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크라우젤은 아직 300레벨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탯이 3차 각성을 못 했다. 지금 상태로는 그리드의 능력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때 그리드를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이 참가할 것이 분명한 PvP에 크라우젤이 참가한다?

그건 엄청난 페널티였다. 공평하지 못한 싸움이었다.

하오는 크라우젤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올해 국가대항전에서만큼은 그가 PvP에 참가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우상이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필시 가슴 아픈 경험일 테니까.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하오에게 크라우젤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할 거다.”

곁에서 설마설마하고 있던 알렉산더가 깜짝 놀랐다.

“뭐야! 그건 완전 바보짓이잖아? 그리드는커녕 크리스나 데미안 같은 놈에게 질 수도 있다고? 굳이 불리한 싸움을 해서 명성을 깎아먹을 필요가 있어?”

“저도 알렉산더와 비슷한 생각입니다. 특히 그리드도 원치 않을 겁니다.”

하오는 크라우젤만큼이나 그리드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 둘이 서로를 라이벌로 여기는 것도 안다. 한쪽이 불리한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둘 모두가 아쉬워할만한 일이다.

아니,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가 아쉬워하겠지.

생각한 하오가 의견을 피력했다.

“당신들의 재대결은 서로가 완벽한 준비를 마쳤을 때여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모두가 저의 의견에 공감할 겁니다.”

실로 세기의 대결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두 사람의 명승부를 기대할 것이다. 허무해선 안 된다.

하오는 확신했고, 알렉산더 또한 음, 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했다.

순간.

“혹시 내가 진다는 가정을 붙이고 있는 건가?”

크라우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늘 혼자였던 시절을 연상시키는, 생각을 읽기 어려운 고요한 눈빛이었다.

“나는 이길 각오로 싸울 거고, 승산이 있다고 믿고 있다.”

하오와 알렉산더는 망각해선 안 된다.

크라우젤은 천외천이다.

그리고 레전드리 클래스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검성>으로 전직한 지금의 그는 고작 레벨이라는 개념에 발목이 붙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올해가 가장 승산이 높을 거야.”

“....?”

크라우젤의 박력에 눌려서 숨죽였던 하오와 알렉산더가 동시에 의아해졌다.

올해가 가장 승산이 높을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들에게 크라우젤이 어깨를 으쓱였다.

“몇 번이나 말했잖나? 그리드의 잠재력은 최강이라고. 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큰 폭으로 강해질 테지. 그와 최대한 레벨을 맞추겠답시고 시간을 끌었다가 싸우게 되면, 두 번 다시는 이기지 못할 수도 있어.”

“.....”

말도 안 되는 엄살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진심이었다.

‘오로지 검술 하나만 발전시킬 수 있는 나와 달리.’

그리드는 검술은 물론이고 아이템과 마법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다.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하지 못한 현재 시점에서 크라우젤은 자신보다 그리드의 잠재력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 판단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는 그리드의 재능에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그의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처음 겨뤘을 때도, 두 번째 겨뤘을 때도.

크라우젤은 그리드가 보였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을수록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 마치 거울을 마주한 듯 하였으니까.

두근, 두근, 두근.

그리드가 크라우젤을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크라우젤 또한 그리드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뛰고 흥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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