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17화
‘직계 중에서도 특출하구나.’
그리드는 크레이 백작과 사투를 벌이는 내내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마검 이야루그트의 전 주인이었던 엘핀스톤 백작이다.
그를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크레이 백작은 강했다. 티라멧, 라티나와는 비교가 안 됐다.
새삼 엘핀스톤을 떠올리게 되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만약, 현재 시점에서 엘핀스톤이 등장하게 됐다면 어땠을까?’
루비의 단발성 정화 스킬로는 해결할 수 없는 <블러드 필드>에 템빨단원 대부분이 무력화 됐을 것이고, 확정 즉사 스킬에 그리드 또한 불사의 이점을 살리지 못했을 터였다.
‘심지어 이야루그트를 소환했을 수도...’
엘핀스톤 레이드 당시 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던 그리드는 급기야 사망에 이르렀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 엘핀스톤 레이드는 손에 꼽을 만큼의 고난이도 레이드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차라리 엘핀스톤을 빠른 시점에 만났던 것이 행운이었다.
라고, 그리드는 광범위하게 펼쳐진 블러드 토네이도를 돌파하면서 생각했다.
중첩 전개됨으로써 필드 자체를 지배해 버리는 마법으로 승화된 블러드 토네이도.
‘모든 논타켓 스킬을 회피’하는 종횡무진의 기능 자체를 무력화시켰던 필드 마법이 지금의 그리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열망의 무아경 상태에 돌입한 그리드의 회피율은 99퍼센트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그리드는 혈빛의 칼바람을 모조리 회피해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8,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큭.”
99퍼센트는 결국 100퍼센트가 아니다. 더군다나 크레이 백작의 명중률이 높을수록 99퍼센트 회피율은 더욱 하락 적용될 여지가 있었다.
거침없이 블러드 토네이도의 영역을 돌파하는가 싶던 그리드의 살갗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여섯 개의 기둥이 되어 날아왔던 적색 꼬리를 회피한 직후,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왔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초(超)!”
생명력이 아슬아슬해서 더 이상의 접근은 어렵다.
판단한 그리드가 초월자 모드에 진입했다.
공격력을 2배 상승시켜줌과 동시에 기본 공격을 원거리 공격력으로 전화시켜 주는 보조형 파그마의 검무, 초(超)의 발현이었다.
퍼펑-!
퍼퍼퍼퍼퍼펑!!
더욱 더 강력해진 그리드가 휘두르는 ‘원거리 평타’가 블러드 토네이도 너머의 크레이 백작을 타격하기 시작했고.
“노오오옴!!”
쿠콰콰콰콰콰콱!!
분노하는 크레이 백작의 감정에 호응한 블러드 토네이도가 더욱더 흉포해졌다.
하지만 그 기세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열망의 무아검을 착용한 그리드의 평타는 기본 상태로도 군대를 몰살시키는 위력을 발휘하는 바, 그 어떤 초월자에게도 밀리지 않는 공격력이었다.
계속, 계속 그리드의 평타에 얻어맞으면서 검은 불꽃에 몇 차례나 휩쓸린 크레이 백작의 생명력이 급기야 고갈 직전까지 이르렀다.
“커억...!”
핏빛의 회오리 너머, 크레이 백작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인다. 동시에 블러드 토네이도의 기세가 미세하게 약해졌고, 그리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열망의 무아경에 의지한 채 블러드 토네이도를 결국 돌파하고 종국에는 크레이 백작에게 도달, 파그마의 검무 극(極)과 살(殺)을 날렸다.
쏴아아아아아아-
도시를 집어삼킬 기세로 커졌던 블러드 토네이도가 빠르게 걷히기 시작한다.
그리드의 검에 찔린 크레이 백작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쿨럭...! 크흐윽...! 내가...! 이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하는 크레이 백작을 응시하는 그리드의 얼굴에 일말의 동정심이 깃들었다.
크레이 백작이 6개의 꼬리 전부를 회오리로 변형시키는 순간, 그리드는 그가 명백한 생존 욕구를 표출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그리드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불허함과 동시에 도시의 모든 위험 요소를 삭제할 심산으로 보였으니까. 즉, 크레이 백작은 진즉부터 자신의 위기를 직감하고 있던 것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직계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자존심?
아니, 애초에 직계들에게는 돕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불쌍한...”
세상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늘 혼자였던 그리드였기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네가 진 건 네가 약해서가 아니야. 단지 내게는 동료들이 있었고 네게는 없었다. 그 차이야.”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였을까?
그리드가 크레이 백작에게 썩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위안을 던졌다.
세상에, 몬스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정하며 위로하는 사람이 그리드 말고 또 있을까?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기겁하거나 비웃고도 남았다.
“...인간 주제에 나를 동정하다니, 빌어먹을 놈. 후작 펜릴과 공작 마리로즈는 정말로 조심해야 할 게다. 펜릴은 어머님의 힘을 2개나 물려받았고 마리로즈는 어머님의 재림 그 자체...”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로 그리드를 응시하면서, 크레이 백작은 나름 보답을 한답시고 조언해 줬다.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혐오하였던 브라함과 엘핀스톤.
그들과 비교하면 차라리 그리드가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리드가 보유한 <혈왕의 자격> 칭호와 <판덕공> 칭호, 그리고 그리드 고유의 성격이 결합되어서 우연치 않게 발생한 결과다.
마지막에나마 크레이 백작은 그리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다.
솨아아아아아아.
결국, 크레이 백작이 완전한 잿빛으로 흩어졌고.
“....너희들 성격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다.”
새삼 브라함을 떠올리게 된 그리드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9번 도시의 주인, 뱀파이어 백작 크레이가 모든 힘을 소진하여 강제 수면에 듭니다.]
[파티장 ‘그리드’를 포함한 파티원들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
[파티원 ‘루비’와 ‘섹시여고생’의 레벨이 추가로 3 올랐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크레이의 팔찌>를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최고급 오팔>을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축복받은 무기 강화석> 12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축복받은 방어구 강화석> 16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보유한 <암흑의 룬>에 <크레이의 힘>이 각인됩니다.]
[파티원 ‘크리스’가 보유한 <보완의 룬>에 <직계 위압 내성>과 <혈마법 내성>, <흡혈 능력>이 각인됩니다.]
“.....”
레이드의 묘미는 당연히 보상에 있다.
레이드 보상을 확인한 그리드가 씁쓸한 마음을 털어 내고 기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크리스가 최근에 획득했다는 룬에 귀속된 힘에 주목했다.
‘이름 그대로 레이드하는 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보완해 주는 룬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가치를 지닐 듯한 룬이다.
자기가 다 뿌듯해지는 그리드였다. 동료들과, 그리고 동생들과 힘을 합쳐서 강적을 하나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 기뻤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뭐...? 7번 도시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크레이 백작의 정체, 이곳 7번 도시가 아니라 앞서 공략한 9번 도시의 주인이었음을!
“이런!!”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크레이 백작만 레이드하면 퇴로가 열릴 것으로 기대하였건만, 예상치 못한 반전이 펼쳐지자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잠깐! 다들 진정하세요!”
라우엘이 다급히 소리쳤다.
“직계들 모두 자리를 떠난 상태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회복할 시간이 있어요. 그리고 크레이 백작이 그랬듯, 나머지 직계들 또한 협동하지 않고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공산이 큽니다.”
그래,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직계가 3명이나 있으면 뭐하는가? 각자 따로따로 놀고 있는데.
그들을 각개격파 하다 보면 무사히 7번 도시를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처참이 깨지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리드 때문이었다.
[시조 베리아체의 직계를 총 4명 봉인하였습니다. 칭호 <혈왕의 자격>이 <혈왕 후보>로 승격합니다.]
<혈왕 후보>Lv.1
모든 직계의 왕이 될 자격을 쟁취하고 후보에 올랐습니다.
일반 뱀파이어에게 높은 위압감을 줍니다. 당신을 적대하게 되는 일반 뱀파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15퍼센트 하락합니다.
진혈족 뱀파이어에게 혼란을 줍니다. 당신을 적대하게 되는 진혈족 뱀파이어의 모든 능력치가 8퍼센트 하락합니다.
직계 뱀파이어에게 경계심을 줍니다. 당신을 마주하게 되는 직계 뱀파이어는 나태의 저주로부터 일시적으로 각성합니다.
“아...?”
<혈왕의 자격>은 일반 뱀파이어의 능력치를 10퍼센트 하락시키고 진혈족 뱀파이어의 능력치는 도리어 10퍼센트 상승시켰던 반면, 직계 뱀파이어에게는 흥미와 호감을 주는 효력을 발휘했었다.
그렇기에 크레이 백작 또한 마지막 순간에나마 그리드에게 호감을 전달했던 것이다.
하지만 <혈왕 후보>는 직계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완전히 달랐다. 직계가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게 만들 정도로 큰 경계심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XX, 엿 됐...”
그리드가 욕설을 뱉는 순간.
“크레이가 당했어?”
<백작 에티마>
템빨단이 크레이 백작을 공략하는 내내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다가 급기야 자리를 떠났던 직계 셋 중 하나가 재등장했다.
“이런 썩을!”
템빨단은 크레이 백작을 레이드한 여파로 잔뜩 지친 상태였다. 온갖 스킬들에 재사용 대기 시간이 걸려있는 건 둘째 치고 스태미나부터 부족했다.
백작 에티마가 크레이급의 강자라고 감안할 경우, 템빨단의 생존 가능성은 0퍼센트에 도달하는 것이다.
후로이가 나섰다.
“전하!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다른 이들을 데리고 피신하소서!”
늘, 언제나.
위기의 순간마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그리드를 지키는 후로이였다.
그를 보고 그리드는 다짐했었다.
두 번 다시는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강해지겠다고.
“후로이, 이제부터 지키는 건 내 역할이야.”
저벅.
큰 걸음으로 내딛는 그리드, 후로이의 앞으로 나선다.
여전히 100을 달성하고 있는 투기에 휩싸인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아껴 두었던 극의를 꺼냈다.
화르륵-!
그리드의 전신이 불꽃에 휩싸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요하게 일렁이는 홍염이 그리드의 눈썹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조리 뒤덮었다.
벨리알의 힘, 그중에서도 불꽃의 권능이 개방된 것이다.
“장담해. 너는 크레이보다 약하다. 안 그래?”
크레이는 본인을 후작 후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죽기 전, 펜릴과 마리로즈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반면 나머지 세 명의 직계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에티마가 크레이보다 약하다는 확실한 근거였다.
“큭큭, 인간 따위가 뭘 안다고 멋대로 재단하는 게지? 설사 내가 크레이보다 약하다고 해도 지금의 네가 뭘 할 수 있을까?”
에티마는 그리드의 몸이 상처투성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두른 강렬한 불길을 바람 앞의 등불쯤으로 인식했다.
순간.
퍼엉-!
그리드가 날아올랐다.
불꽃에 휩싸인 그는 마치 혜성 같았다.
“아이템 변신!”
스파아앗-
그리드를 뒤따르는 갓 핸드들이 리파엘의 창으로 변모했고,
“하찮은 인간 따위가!”
상공의 에티마는 대검을 꺼내 들었다. 크리스의 공격력을 가뿐히 압도하는 횡베기로 그리드에게 맞섰다.
상처투성이의 인간 따위 일검으로 해치우리라 믿으면서, 그리드가 휘두르는 공격을 피하지도 않고 반격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이었다.
바로 그게 첫 번째 패인이었다.
“연살(聯殺)!!”
<불꽃의 권능>은 압도적인 생명력 회복력을 자랑하는 바, 그리드는 이미 상당량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또한.
푸욱-!
푹푹!!
[대상에게 539,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암흑의 룬에 귀속된 <크레이의 힘>의 효과로 대상에게 입힌 데미지를 100퍼센트 흡혈합니다!]
<크레이의 힘>
패시브
재사용 대기 시간:5분
대상에게 입힌 데미지의 100퍼센트를 흡혈합니다. 흡혈량이 최대 생명력을 초과할 경우, 초과한 생명력 수치에 비례하는 지속 시간을 지닌 <적색 꼬리>를 소환합니다. <적색 꼬리>는 최대 2개 보유할 수 있으며 제어할 수 없습니다.
또한 지금의 그리드에게는 새로운 힘이 함께하고 있었다.
크레이 백작보다 못한 에티마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막강한 힘이었다.
“큭...! 뭣이!!”
그리드에게 연살(聯殺)을 얻어맞음과 동시에 반격하였던 에티마 백작.
자신의 예상과 달리 그리드가 죽지 않고 버티자 놀랐다가, 이어서 자신의 목덜미에 뱀처럼 꽂혀 오는 작은 2개의 적색 꼬리를 발견하고 또 한 번 기겁한다.
‘멍청한 크레이 놈! 인간에게 당한 것으로 모자라서 힘까지 흡수당한 거냐!’
터텅!!
크레이 백작의 생전 힘을 너무 의식한 게 문제다.
에티마는 자신의 목덜미에 꽂혀 오는 적색 꼬리를 대검으로 방어하였고, 그 탓에 뒤이어 날아오는 리파엘의 창 4자루는 방어하지 못했다.
두 번째 패인이다.
푹-!
푸푸푹!!
“컥...!”
레베카교의 3대 신기가 발휘하는 치명적인 신성력!
4개의 창에 꼬챙이처럼 꿰인 에티마가 눈을 뒤집고 움찔거렸다.
그에게 그리드가 속삭였다.
“피라미.”
화르륵!
거대한 불꽃의 구체가 에티마의 눈앞에서 피어오른다.
대상의 생명력에 비례하는 피해를 입히는 <여왕의 업화>였다.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지축을 흔드는 폭발.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파그마의 검무.
불꽃 권능의 영향으로 더 큰 화염을 머금은 열망의 무아검이 에티마를 베고, 찌르기를 반복했다. 주작궁 덕분에 무한한 스테미나를 자랑하는 지슈카의 원호도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템빨단원들 또한 속속들이 참전하기 시작했다.
반면 에티마는 끝까지 혼자다.
세 번째 패인이다.
잠시 후.
[7번 도시의 주인, 뱀파이어 백작 에티마가 모든 힘을 소진하여 강제 수면에 듭니다.]
템빨단원들을 가둬 두고 있던 7번 도시의 출입구가 개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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