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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62화 (557/1,794)

템빨 34권 - 16화

그리드가 크레이 백작과 호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크레이 백작만큼 강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템빨단원들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작새 실드!”

번쩍번쩍!

도끼를 버린 반트너가 무장한 초대형 방패가 구애하는 공작새를 형상화한 오러를 띄운다. 크레이 백작의 시선을 끄는 용도였다.

“성스러운 포효!!”

악한 존재에게 고통을 주는 토반의 외침은 크레이 백작의 청각을 마비시킴으로써 그의 반응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고,

“너희 어머님...!!”

후로이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베리아체를 자꾸만 찾아 댔다.

도발과 디버프의 멈추지 않는 연계.

쉬지 않고 각종 스킬을 사용하는 이 셋만 해도 그리드에게 큰 도움이 되는 중이다.

크레이 백작의 상태 이상 저항력은 무척 높으므로 대부분의 도발과 디버프를 저항했고, 설령 도발과 디버프에 걸리더라도 1초 내에 회복해 버렸지만, 그 짧은 빈틈마저도 그리드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플라워 랜스!”

후로이 탓에 잠시 울컥하였다가 그리드에게 가슴을 크게 베인 크레이 백작의 신형이 무너짐을 목격한 지상의 폰이 힘껏 창을 던진다.

크레이 백작의 후방 경계 능력이 떨어진 순간을 완벽히 포착한 공격이었다.

푸욱-!

크레이 백작의 등에 꽂힌 장창으로부터.

스파앗-!

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대상의 ‘전신’을 동시다발적으로 찢어발김으로써 대량의 출혈 효과와 회복 불가 효과를 유발하는 스킬이었다.

폰은 크레이 백작의 흡혈 능력을 봉쇄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상태 이상일수록 명중률이 낮은 법이다.

[대상이 저항하였습니다.]

“씨부럴.”

그리드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걸쭉한 욕설에 능숙해진 폰!

백마와 함께하는 고상한 미남자인 그를 연모하는 수많은 여성 팬들이 지금의 그를 본다면 팬심을 잃으리라.

“겁쟁이 서양 귀신 놈! 썩 내려오지 못할까! 발검, 섬(殲)!!”

“상승 검!”

“단도 투척.”

“나는 돌이라도 던져야 하나....”

크리스, 극검, 페이커, 이벨린 등의 근접 전투 계열 직업군 템빨단원들은 크레이 백작이 상공 15미터 이상까지 날아오른 시점부터 무력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몇 개 안 되는 중장거리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멈추지 않고 스킬을 전개했고, 정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짱돌이라도 주워다가 집어 던지는 식으로 크레이 백작에게 데미지를 누적시켰다.

“가소롭다!”

최초에는 작은 피해 따위 무시하던 크레이 백작이었으나.

슈욱- 푹!!

푸푸푸푸푸푹!!

“큭....!”

신화급 무기 <주작궁>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위시하여 끊임없이 속사를 날리는 지슈카 탓에 크레이 백작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제드노스와 라엘라의 마법 또한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쿠콰콰콰콰콰콰콰쾅!!

크레이 백작은 오로지 그리드에게만 집중했다.

그리드가 활약할 수 있는 이유가 템빨단원들 덕분이라고는 하나, 결국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그리드임을 시사하는 장면이었다.

“죽어라!!”

연살파극(聯殺派極)과 극살(極殺)에 공격당한 직후.

6개의 꼬리를 모조리 소환하여 템빨단원들에게 저항하던 크레이 백작이 결국에 승기를 잡았다.

그리드를 구속하는데 실패하고 사방팔방에 펼쳐져 있던 피의 그물을 일제히 미사일 형태로 전환, 전방위로부터 그리드를 덮치게끔 상황을 만들어 냈다.

“큭...!”

“그리드!!”

“안 돼!!”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위협적인 맹공에 고립당한 그리드.

본인부터가 위기임을 직감했고, 템빨단원들 또한 그의 죽음을 예상했다.

크레이 백작.

엘핀스톤과 비교해서 여러모로 ‘약하다’는 판정을 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진짜 실력은 사실 엄청났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엘핀스톤만큼이나 강력한 광범위 CC기부터 보유하고 있지 않던가. 카츠와 루비의 활약이 없었다면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됐으리라.

과연 백작은 백작이다.

슈우우우우우우우우욱-!!

강력한 공격력으로 갓 핸드들을 경직시킨 후 돌파, 그대로 그리드에게 도달하는 여섯 개의 붉은 꼬리!

“오빠!!”

이를 본 루비의 절규가 하늘에 울려 퍼지는 그때.

스르륵-

그리드의 검은 눈동자가 자색으로 물들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에 귀속된 <열망의 무아경>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스슥.

스스스스슥.

“....!!”

“뭣...!!”

크레이 백작과 템빨단원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은 엄폐물조차 없는 상공에서, 자신의 이동속도보다 빠르게, 그것도 피하기 어려운 절묘한 궤도로부터 날아오는 6개의 공격을 그리드가 물 흐르듯이 회피해 버렸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어두운 상공에 수놓이는 자색의 옅은 빛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게 뭐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구사하는 대표적인 템빨이 바로 서클 렌즈이다.

서클 렌즈라는 아이템이 괜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얼굴에서 눈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척 크다. 눈동자가 1mm만 커져도 인물이 확 나아 보일 정도였다. 하물며 눈동자 색이 변한다면 그만큼 또 눈에 띄는 일도 없다.

“저건 또 무슨 변신이야?”

그렇다.

지금, 템빨단원 모두는 그리드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뱀파이어의 도시 내부.

자색의 안광을 흩뿌리기 시작한 그리드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변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주 심한 색맹밖에 없을 것이다.

크레이 백작이 분노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고작 인간 따위가 대체 내게 몇 번의 수모를 안기는 것이냐!!”

치욕만이 가득한 이 싸움, 크레이 백작은 어서 빨리 끝내고 싶었고 드디어 끝이라고 믿었었다. 자신의 꼬리들이 그리드를 물어뜯어 죽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그리드는 또다시 살아남았다. 과거, 어떤 뱀파이어가 인간을 두고 이족 보행하는 바퀴벌레라고 하더니 괜히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듯했다.

“순순히 죽으란 말이다!!”

쿠와아아아아앙-!

크레이 백작이 포효하자 지상의 템빨단원 전원 상태 이상에 빠졌다. <직계의 위압>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전설. 어지간한 상태 이상에 저항한다.

츠카카카칵-!

그리드의 최강 무기가 크레이 백작의 가슴을 베어 버리자.

퍼어어어엉-!!

검은 불꽃이 폭발한다.

이에 휩쓸린 크레이 백작이 크악! 드물게 큰 비명을 내질렀다.

100을 달성한 투기와 공격력을 3배 상승시켜 주는 <열망의 무아경>의 위력이다.

지금의 그리드는 방금 전과 비교해도 최소 3배 이상 강했다.

스팟-!

퍼어어어어어엉!!

재차 검을 휘두르는 그리드에게 또 베인 크레이 백작이 검은 불꽃에 휩쓸리면서도 저항한다. 자신의 곁으로 회수한 여섯 개의 꼬리 중 2개를 그물로 펼쳐서 그리드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나머지 4개의 꼬리로 그리드를 사방으로부터 공격했다.

조금 전과 같은 수법이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리드의 자색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참 단순하게도 싸우는군.”

명백한 조소!

인간에게 비웃음을 사는 날이 올 줄이야?

“....!”

분노에 휩싸이던 크레이 백작이 경악했다.

스슥.

스스슥.

그리드가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여섯 개의 꼬리 공격을 모조리 회피해 버린 까닭이다.

‘우연이 아니었다고?’

부릅떠진 크레이 백작의 적안에 그리드의 움직임이 투영된다.

춤.

놈은 춤을 추고 있었다.

사방으로부터 용솟음치는 붉은 꼬리들을 모조리 회피하고 등진 채.

“파그마의 검무, 연(聯).”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퍼퍼퍼퍼퍼퍼퍼퍼펑!!

100에 도달한 투기가 상승시켜 준 근력과 열망의 무아경 상태로 상승한 공격력 3배를 기반으로 날리는 초당 20회의 공격이 앞서 그리드가 사용한 연살파극(聯殺派極)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하였고,

“크윽....! 그래...! 그랬군...!!”

크레이 백작은 이제야 눈치챘다.

뜨거운 불꽃이 점멸하는 묵색의 대검. 간헐적으로 푸른 서리빛이 감돌기도 하는 그 무기가 품고 있는 위력이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이 바로 드래곤의 무기더냐!!”

드래곤.

신마저도 위협하는 지상 최강의 생물.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대자들이 하찮은 인간의 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시절이 있다. 한때 그들은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고, 마치 인간처럼 무기와 갑주를 무장한 채 세계를 여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때 남겨진 유산이리라.

그래, 지금 크레이 백작은 자기 합리화를 시전하고 있었다.

인간이 드래곤의 무기라도 얻어 온 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고작 인간들 따위에게 당할 리 없다는, 그런 확고한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합리화였다.

그에게 그리드가 참혹한 현실을 주지시켰다.

“드래곤의 무기? 아닌데, 이거 내가 만든 건데?”

“개소리!! 믿겠냐!!”

역시 인간의 허풍에는 한도가 없다.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크레이 백작이 6개의 꼬리 전부로 토네이도를 생성했다.

쥐새끼처럼 잘 빠져나가는 인간 놈에게 애초에 피할 길 없는 절망을 선사할 요량이었다.

“슬슬 끝인가.”

“졸렵다. 나는 자러 가겠다.”

“나도.”

지상에서 멍한 표정으로 전투를 지켜보던 직계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 버리는 6개 블러드 토네이도를 본 그들 모두 크레이 백작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콰득-!

콰드드드드드드드득!!

흉포한 블러드 토네이도들이 고대의 건축물들과 메마른 나무, 높이 솟은 절벽 등을 모조리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이런...!”

“피해!!”

회전하는 과정에 하나로 융합된 블러드 토네이도는 이내 지상의 템빨단원들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규격을 확장했다. 이러다가 도시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거대한 회오리였다.

제아무리 템빨단원들이라도 냉정할 수가 없었다. 특히 겁 많은 라엘라는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그들을 진정시키고 통솔하는 인물, 전 체다카 길드의 수장 지슈카였다.

“크레이 백작도 빈사 상태야. 그리드가 이번 일격만 버텨 낸다면 역습을 날릴 수 있을 거라고. 알았어? 우리가 반드시 그리드를 지킨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크레이 백작의 레이드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지금 여기서 그를 죽여 놔야만 차후 7번째 도시에 재도전할 때 승산이 높아졌다.

“모두 전력으로 그리드를 엄호해!!”

“좋아!!”

지잉-!

스파아아앗!!

템빨단원들의 방어 계열 마법과 스킬들이 모조리 그리드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폭발 계열 마법과 스킬들은 그리드를 덮치고 있는 회오리의 기세를 늦추는 용도로 이용됐다.

템빨단원들 본인들을 덮쳐 오는 회오리?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다 그리드를 대신해서 희생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드! 반드시 크레이 백작을 죽여라!”

이 외침이 닿을까.

선혈의 회오리 속에 갇힌 그리드에게 소리치면서도, 템빨단원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츠칵-!

츠카카카카칵!!

[12,4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1,650의 피해를....]

이미 전력을 쏟아 내고 지쳐 있는 템빨단원들의 몸을 회오리가 덮치기 시작했다.

죽음이 도래한 것이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콱!!

도시를 집어삼킨 초대형 회오리가 발생시키는 굉음에 청각을 지배당한 템빨단원들.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는 그리드에게밖에 의지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눈을 감는다.

동시에.

-------!!

살을 찢던 회오리가 사라졌고, 귀를 찢던 굉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후두둑.

쏴아아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아니, 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좋게 휘몰아쳤던 핏줄기들이 이제는 맥없이 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템빨단원들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본다.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하는 크레이 백작과, 그의 심장을 찔렀던 검을 거두는 그리드의 모습을.

그리드의 흑발이 초(超)의 영향으로 너울거리고 있었다.

“토네이도? 피하면 그만이지.”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요량일까.

넝마가 된 그리드는 전신을 엄습하는 고통을 참아 내고 밝게 웃었다.

자색으로 물들었던 그의 눈동자가 검정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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