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14화
꿈틀!
쿠르르르륵!!
크레이 백작이 흘린 대량의 피.
4줄기의 ‘적색 꼬리’가 크레이 백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카츠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본래는 크레이 백작의 적을 처단해야 하는 꼬리들이 도리어 크레이 백작의 육신을 물어뜯겠답시고 흉포히 덤벼드는 것이다.
콰작!
퍼엉-!
옆구리로 파고드는 꼬리에 쥐어뜯기고, 이어서 목덜미로 파고드는 꼬리들은 신경질적으로 쳐 내는 크레이 백작.
새롭게 흐르는 피조차 제어되지 않음을 느낀 그의 이가 꽈드득! 가루가 될 기세로 세게 갈렸다.
“인간 따위가...!”
인간을 하위종으로 인식하는 뱀파이어.
그중에서도 정점으로 군림하는 직계 크레이의 입장에서 작금의 사태는 무척 충격적이었고 또한 치욕적이었다.
“인간 따위가 나의 고귀한 피를 농락하다니!!”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에게 맹공을 당하고, 각양각색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감정 표현이 희미했던 크레이 백작이다. 마치 재롱떠는 가축들을 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었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고 분노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꼬리에 위협 당하는 그를 지켜보는 다른 직계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크레이! 뭐냐, 그 한심한 꼴은? 혈왕의 후예임을 자처하던 네가 어찌 고작 인간에게 농락당하는 거지?”
혈왕.
시조 베리아체가 지녔던 무수히 많은 칭호 중 하나다.
생전의 그녀는 세상 모든 피의 주인이었고, 그 어떤 대상의 피라도 스스로의 의지대로 통제했었다. 심지어 살아 있는 생물의 몸속에 흐르는 혈류조차 역행시켜서 목숨을 빼앗는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그 혈왕의 후예를 자처해 온 인물이 다름 아닌 크레이 백작이었던 것이다.
크레이 백작은 본인이 베리아체의 능력 중 하나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덕분에 후작 후보까지 올랐던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백작 중에서도 유난히 프라이드가 높은 존재였다.
한데 지금 고작 인간에게 낭패를 겪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백작들은 그 모습이 우습고 통쾌했다.
“닥쳐라!!”
비웃는 형제들에게 소리친 크레이 백작.
좌우서부터 덤벼드는 4개의 꼬리 중 2개를 소멸시켜 버린다.
그러자 남은 2개의 꼬리가 더 이상 카츠에게 반응하지 않고 크레이 백작의 의지를 따랐다.
크레이 백작이 아직 불완전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결국 후작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수족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꼬리의 숫자가 고작 2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꼬리를 3개 이상 펼치기 시작하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반면 그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는 못했다.
“네놈...!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쓰레기가 감히 내게 이런 수모를!!”
고작 2개의 꼬리만을 몸에 휘감은 크레이 백작의 모습은 종전과 달리 초라해 보였다.
그가 지상의 카츠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죽인다...! 네놈이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마! 목덜미를 물어뜯고, 살점과 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조리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마!!”
잔인한 선포와 동시에 폭사하는 살의!
[뱀파이어 백작 크레이가 <직계의 억압>을 사용합니다.]
[필멸자는 저항하기 어려운 강력한 압박입니다! 상태 이상 ‘공포’에 걸립니다!]
“큭...!”
템빨단원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대폭 하락하는 능력치가 그들에게 강한 불안감을 선사했다.
그때.
“정화!”
성녀 루비가 따스한 빛을 방출하여 템빨단원들을 감싸 주었다.
그러자 템빨단원 모두가 공포를 순식간에 극복하고 멀쩡해졌다.
크레이 백작을 비롯한 다른 직계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저 힘은 뭐지?”
생물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역할이 존재하는 법이다.
개돼지 같은 가축들이 오로지 인간에게 충성하고, 잡아먹힐 운명을 타고났듯이, 인간은 뱀파이어의 가축 같은 존재였다. 직계 뱀파이어에게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숙명이었다.
한데 그 숙명을 뒤틀어 버리는 힘이라니?
카츠에게 집중되어 있던 직계들의 시선이 루비에게 꽂혔다.
최초에는 그리드가 끌었던 어그로가 카츠에 이어서 루비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크레이 백작에게 크게 한 방 먹인 후 지상으로 다시 추락했던 레가스는 소외감을 느꼈다.
“아니, 저에게도 관심 좀....”
직계들의 입장에서 나는 관심조차 안 가는 피라미라는 뜻일까?
레가스가 자극 받았다.
“하하... 더욱 더 수련에 정진해야겠네요.”
파직-!
파지지지직!
직계들이 루비를 노려보는 동안 레가스의 몸에 뇌전이 휘감기기 시작한다. 아수라를 강림시키는 전조였다.
그를 카츠가 말렸다.
“하늘도 못 나는 주제에 지금 아수라화해서 뭐하게?”
“.....”
대부분의 변신 스킬들이 그렇듯이, 아수라화 또한 페널티와 지속 시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레가스는 높은 도약력을 지녔을 뿐 하늘을 날지는 못했다.
반면 뱀파이어에게는 비행 능력이 있었다. 일반 뱀파이어는 육신을 박쥐나 연기로 변신시켜야만 비행이 가능했지만, 직계는 비행 능력을 마치 패시브처럼 갖췄다. 아무런 제약 없이 허공을 노녔다.
직계들이 하늘에 떠있는 동안은 레가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템빨단원들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구도인 것이다.
카츠는 우선 구도를 바꿔야 한다고 판단했다. 크레이 백작이 자신에게 큰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핫!”
크레이 백작이 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크게 콧방귀 뀐 카츠.
그가 자신을 처참하게 죽이겠노라 선언한 크레이 백작에게 어깨를 으쓱인다.
“무서워서 하늘 위로 피신해 있는 주제에 주둥이 하나는 잘 놀리는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채로 지껄이기만 해 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고?”
과거부터 성격 개차반으로 유명한 카츠였다. 늘 도발적인 언행을 일삼고 다녔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 또한 지존을 목표로 삼는 최상위 랭커인 바, 늘 경쟁해 왔고 경쟁에 익숙했다. 겉으로 보이는 언행과 달리 사고 능력은 늘 예리하고 냉정할 수 있게끔 노력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크레이 백작은 타고난 강자다. 경쟁할 상대조차 적었고 싸움에 익숙하지 못했다. 거기에 높은 자존심이 맞물려서 냉정을 금세 상실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한다고!!”
포효하는 크레이 백작!
그가 잠시 루비에게 돌렸던 시선을 다시금 카츠에게 향하면서 하강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레이 백작이 지면에 떨어지는 순간, 동시에 방출된 마력에 지면이 산산조각났다. 도시 전체가 흔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 일대를 장악했고 카츠를 비롯한 템빨단원 전원의 신형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뱀파이어 백작 크레이가 <마력 방출>을 사용하였습니다!]
[대지가 격동하고 일대의 마나가 역류합니다!]
[상태 이상 ‘균형 상실’에 걸립니다. 행동에 큰 제약이 생깁니다.]
[상태 이상 ‘마나 봉쇄’에 걸립니다. 마나를 자원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 입부터 찢어 주마!!”
“큭....”
재차 포효하는 크레이 백작을 코앞에서 마주한 카츠의 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엄청난 위압감이다. Satisfy에서 종(種)의 격차라는 건 절대적이군.’
히든 클래스는 각자 특별한 콘셉트를 지니고 있다. 대부분 한 가지 특성에 특화되었고, 이는 때때로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강점이 되었다.
그리고 에픽 클래스 ‘블러드 워리어’의 궁극적인 콘셉은 ‘피의 주인’이다. 자신을 비롯한 그 누구의 피라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고, 그건 카츠가 자랑하는 최대, 최강의 힘이었다.
하지만 카츠는 크레이 백작의 꼬리를 통제했던 시점부터 깨닫고 있었다.
에픽 등급에 불과한 자신의 능력은 직계에게 통용되지 않음을.
근거는 충분했다.
대상의 피를 장악할 때 소모되는 특수 자원 <혈제(血制)>가 크레이 백작의 꼬리를 통제하는 순간 급속도로 하락했기 때문이다.
카츠의 계산에 따르면, 카츠가 크레이 백작의 꼬리를 통제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고작 1분에 불과했다.
그래, 크레이 백작이 꼬리를 2개로 줄이지 않았더라도 결국 꼬리의 통제권은 크레이 백작에게 되돌아갔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크레이 백작의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 탓에 꼬리를 2개로 줄였고, 결과적으로 카츠는 큰 공을 세운 셈이 됐다.
“뭐, 혈 마법 따위는 없어도 돼.”
떨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인 카츠가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나는 원래 전사니까. 큭큭! 이렇게 된 이상 때려죽여주마!!”
슈악-!
카츠가 강력한 흡혈 능력을 자랑하는 혈기를 머금은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풀 버프 상태의 그리드보다 공격 속도가 3배 가까이 느렸다.
하지만 크레이 백작은 육체 능력에 특화된 직계가 아닌 바, 카츠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찔렸다.
아니, 애초에 그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새끼 강아지의 무딘 이를 두려워하는 인간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쿠콱-!
쿠콰콰콰콰콱!!
카츠의 검이 크레이 백작의 가슴을 관통함과 동시에.
크레이 백작의 2개 꼬리가 그물처럼 펼쳐지더니 카츠의 몸을 집어삼켰고, 이어서 세게 조였다.
피의 올가미였다.
카츠는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생명력도 단 일격에 3분의 2 깎여 나갔다.
하지만 카츠는 웃고 있었다.
“흥, 이 정도 해 줬으면 충분하겠지?”
크레이 백작은 카츠 때문에 꼬리의 숫자를 줄였고, 스스로 지상에 내려왔다.
강점을 버린 것이다.
지금의 그는 동료들이 알아서 처리해 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카츠에게는 있었다.
강한 신뢰다. 카츠 또한 이제는 템빨단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은 그의 신뢰에 보답했다.
“카츠! 내 뒤로 숨어라!!”
토반과 반트너가 카츠를 피의 올가미로부터 구출, 자신들의 방패 뒤로 숨겼다.
이어서 아수라화를 마친 레가스, 검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크리스, 백마 위에 올라탄 폰의 맹공이 크레이 백작을 덮쳤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펑-!
퍼퍼퍼퍼퍼퍼퍼펑!!
지슈카의 화살과 제드노스와 라엘라의 마법, 그리고 라우엘의 기공술이 동료들을 원호했고,
“보스 레이드에는 제가 일등 공신 아니겠습니까?”
푸우우우욱-!
대상에게 생명력 비례 데미지를 입히는 이벨린의 ‘가시’가 완전한 타이밍을 잡고 크레이 백작의 심장을 찔렀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성녀 루비의 치유 능력 덕분이었다.
“허억... 허억....”
동료들이 상처 입을 때마다 힐을 주고, 상태 이상에 걸릴 때마다 정화시켜 주는 Satisfy 최강의 치유사 성녀!
연속되는 마법의 사용으로 정신적, 체력적 압박을 느끼고 있는 그녀를 3마리의 직계들은 여전히 주시하고 있었다.
“저건 안 된다. 위험한 존재야.”
“동의한다.”
크레이 백작이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그저 웃으며 지켜보던 직계들이지만 루비에 대해서만큼은 반응이 달랐다. 여유가 전혀 없었다.
대악마의 영혼조차 멸하는 성녀의 위험성을 뱀파이어인 그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것이었다.
“확실하게 죽여 놔야겠군.”
지상으로 하강한 3마리의 직계들이 루비를 둘러싸고 선다.
“세희는 내가 지켜!”
성녀의 기사 섹시여고생이 늘 그랬듯이 루비를 보호해 보지만.
“흥.”
직계들은 하나하나가 템빨단원 최상위 랭커보다 강력한 바, 고작 200레벨대에 불과한 섹시여고생이 그들로부터 루비를 지켜 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희생 스킬로 몇 회의 공격을 무마시키긴 했으나 그게 한계였다.
“죽어라.”
“너의 피는 마시고 싶지 않군. 한 줌 재가 되어라.”
지이이이잉-
루비의 작은 얼굴을 겨냥하는 직계들의 손 위로 떠오르는 암흑의 마력.
죽음을 직감한 루비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템빨단원들은 이미 진즉부터 그녀를 구하고자 몸을 날렸으나 크레이 백작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어딜 가려고!!”
콰쾅!
쿠콰콰콰콰쾅!!
“크아아아악!!”
“제, 제길...! 루비 양....!”
사방팔방으로 회오리치는 2개의 꼬리가 템빨단원들을 휩쓴다.
넝마가 된 템빨단원들이었지만 스스로의 몸은 돌보지 않았다. 오로지 루비만을 보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그녀라는 사실을 템빨단원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간절한 마음과 달리, 그들과 루비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템빨단원들의 손은 루비에게 닿지 못했다.
반면.
“동생은 오빠가 지켜.”
그리드는 이미 루비의 곁이었다.
카츠가 등장해서 활약해 주는 시점부터 희망을 품었던 그.
구석에 쭈그려 앉아 <아이템 합체>를 전개,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과 <실패작>을 합쳐 온 그가.
“회(回).”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펑!!
직계들이 루비에게 쏜 암흑 마력을 더 큰 피해로 되돌려 줬다.
[투기가 80을 돌파하였습니다.]
크레이 백작과 싸우는 과정에 상승되었던 투기가 더욱 더 높아지면서 자색, 적색의 기운이 짙어진다.
폭발적인 투기에 휩싸인 그리드가 소리쳤다.
“갓 핸드! 노에! 랜디! 이야루그트!!”
콰르르르릉!!
묠니르를 무장한 갓 핸드들, 대상의 가장 높은 스탯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주인에게 전이시켜 주는 노에,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랜디, 그리고 지옥 제일의 검사였던 이야루그트.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서 활약, 직계 셋의 발을 잠시 묶었고.
“암흑의 룬 개방! 대장장이의 분노!!”
그리드는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면서 돌진했다.
그리고.
“연살파극(聯殺派極)!!”
이미 큰 상처를 입고 있는 크레이 백작에게 Satisfy 최강의 스킬을 꽂아 넣었다.
크레이 백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가까이 있는 다른 직계들은 놔두고 왜 굳이 나한테까지 뛰어와서 나를 공격하느냐,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의문을 해소시켜 줄 요량으로 후로이가 그리드 대신 소리쳤다.
“그분께서는 원래 약한 놈만 패신다!!”
“뭐...!”
내가 약하다고?
개소리에 흥분해서 방어력이 하락하는 크레이 백작!
그의 몸을.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연속으로 폭발하는 <붉은 벼락>과 <검은 불꽃>이 <어두운 곳에서 공격력 상승>옵션과 <스킬 데미지 상승>옵션을 지닌 실패작의 공격력과 결합되어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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