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13화
반짝반짝!
썬 가드가 남긴 빛의 잔재가 반트너의 대머리를 여전히 눈부시게 만든다.
그 탓에 4마리 직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느낀 반트너가 슬금슬금, 두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하하하... 요즘 쓰는 투구 디자인이 너무 구려서 안 보이게 해 놨더니....”
“.....”
어색한 침묵만이 감돈다.
평소 같았으면 배를 잡고 반트너를 비웃었을 폰조차도 꿀꺽, 마른침만 삼켰다.
그만큼 4마리 직계의 등장이 충격적이었다.
“...7은 행운의 숫자라며?”
“.....”
누군가의 핀잔에 극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한 개의 도시에 4마리의 직계. 그것도 백작급 직계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최악의 경우다. 극검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라우엘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여러 문헌을 토대로 조사해 본 결과에 따르면, 직계 뱀파이어는 나태의 저주를 엄청 강하게 받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도시를 떠날 정도로 부지런하지 못했고, 수십, 수백 년 이상 관에 틀어박힌 채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들이 자신의 도시를 떠나 특정 구역에 모인 일은 설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니면 저들 넷 모두가 이 도시의 주인인 건가?’
지끈지끈!
라우엘이 두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계획이 틀어지자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었다.
“죄송... 합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어 사죄하는 라우엘.
그는 도시 정벌 계획의 발안자인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희생해서 동료들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탈출하려면 도시의 주인을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그 전까지는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라우엘이 희생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파티의 생존 가능성은 제로인 것이다.
‘낭패다....!’
나의 부주의함이 템빨국의 전력을 약화시키게 생겼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좌절하는 라우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그의 어깨 위로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크고, 거칠고, 따뜻한 손이었다.
라우엘이 그 손의 주인을 모를 리 없다.
“그리드 전하...”
손길을 느끼고 시선을 돌리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과할 시간에 머리를 굴려.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냉정할 수 있게끔 노력한다지 않았어? 노력해. 정신 차리라고.”
“.....”
그래, 라우엘은 스스로의 약점을 이미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게 되면 평정심을 상실하고 대처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이는 책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책사란 어떤 변수라도 침착하게 대처하며 늘 최선을 도출할 수 있는 존재여야 했으니까.
“그렇게 끝장났다는 표정 짓지 마.”
4명의 백작급 직계?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력하게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드의 의지였다.
“우리가 버틸 동안 너는 생각해 내라.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말이야.”
동료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워낙 호승심 강한 레가스와 유아독존인 카츠 등은 멀쩡한 기색이었지만, 템빨단원이라고 해서 누구나 용맹무쌍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특히 루비가 겁에 질려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겠노라고 약속했다.’
리더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힘든 상황일수록 더욱더!
터엉-!!
상기한 그리드가 하늘 위로 몸을 날렸다.
홀로 4마리 직계에 맞서는 것이다.
“그리드...!”
끝이다.
우리 모두 죽었다.
경험치와 아이템을 손실하게 되었음에 절망하고 좌절하던 일부 템빨단원들.
그들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그리드를 뒤늦게 발견하고 번뜩 정신 차렸다.
이미 4마리 직계의 코앞까지 도달한 그리드의 몸에는 검은 마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흑화. 신속한 몸놀림.”
[암흑 마력을 증폭시킵니다.]
[암흑 마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력으로 대체합니다.]
[흑화가 유지되는 동안 종족이 반마(半魔)로 변경됩니다.]
[반마 상태에서는 생명력 최대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공격력, 마력, 민첩성이 각각 3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이 암흑 속성으로 전환됩니다.]
[1분 동안 회피율이 30퍼센트, 민첩성이 2배 상승합니다.]
홀로 4마리 직계와 맞서는 그리드!
그는 생존에 힘을 실었다. 최대한 오래 버티면서 직계들의 힘을 파악하고 동료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각오였다.
핏-!
피피피피피피핏!!
“호오.”
감흥 없는 표정으로 인간들을 내려 보던 4마리 직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웬 인간 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덤벼 오기에 자살하려는 속셈인 줄 알았건만, 날다람쥐처럼 날렵한 것이 의외로 만만찮은 까닭이었다.
“흥미롭군.”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쉬지 않고 쏟아지는 검광의 폭풍!
그 안에 선 4마리 직계들의 피부 위로 선혈이 낭자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최고 공속에 도달한 그리드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방어도, 반격도 못하는 건가? 좋아, 완전히 답 없는 상대들은 아니었어.’
직계들의 민첩성을 어렴풋이 파악한 그리드가 춤사위를 펼쳤다. 이번에는 방어력을 가늠할 의도였다.
“연(聯)!”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캇!!
평타보다 위력적인 초당 20회의 검격이 <백작 크레이>의 몸을 베고, 베고, 또 벤다.
갓 핸드들은 그리드의 주변을 굳건히 지키면서 다른 백작들의 반격을 경계하였고, 그리드는 시야에 떠오르는 알림 창을 확인했다.
[대상에게 16,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8,7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0,600의 피해를....]
....
...
‘나쁘지 않아!’
방어력 또한 크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다. 세 번째 기사 로렉스보다 약간 못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리드가 희망을 품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2마리 정도는 사냥할 수도 있겠어.’
그리고 결국 도시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4마리 중 2마리를 해치워 놓으면, 다음에 다시 도전할 때는 무조건 도시 공략에 성공할 테니까.
그리드가 판단하는 그때였다.
“오호라, 그렇군. 그 반지를 보아하니 바로 네가 엘핀스톤을 봉인한 인간이로구나.”
그리드의 맹공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있던 백작 크레이가 비릿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그의 시선은 엘핀스톤의 반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세등등한 꼴을 보니 엘핀스톤 녀석이 어지간히 한심하게 굴었나 보지? 뭐, 나와 달리 후작 후보에조차 들지 못했던 놈이니까.”
스파아아아앗----
“....?”
시간이 멈춘 건가?
그리드가 한순간 착각에 빠졌다.
크레이 백작의 몸 곳곳에 생긴 검흔으로부터 흘러내리던 핏물이 중력의 법칙을 거부하고 멈춘 까닭이다.
한 방울, 한 방울씩 흩어진 선혈들이 허공을 부유한다.
“뭘 멍하니 있느냐.”
“....!”
시간이 멈춘 게 아니었다.
크레이 백작의 음성을 듣고 번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검을 재차 휘두르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콱!!
크레이 백작이 흘린 대량의 피.
허공에 멈춰 있던 그 대량의 피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이더니 그리드를 노리고 용솟음친다.
퍼어어어어어엉-!
“큭...!”
선혈의 줄기에 강타당하고 침음하는 그리드의 얼굴이 고통과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19,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손실한 생명력 전부를 대상에게 흡수당합니다.]
강력한 흡혈 능력!
크레이 백작의 선혈 공격은 그리드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입힌 피해량의 100퍼센트를 자신의 생명력으로 전환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제기랄, 역시 직계...!’
육체 능력이 비교적 평범(?)하다고 해서 방심할 상대가 아니었다.
엘핀스톤이 검술과 마법에 특화되었고, 티라멧은 육체 능력에 특화되었듯이 크레이는 흡혈 능력에 특화되어 있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덥썩!
가슴을 강타당하고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그리드의 안면을 크레이 백작이 손으로 부여잡는다.
이어서.
“블러드 토네이도.”
푸화하하하하하하하학!!
살아 있는 뱀처럼 똬리를 튼 채 크레이 백작의 몸을 감싸고 있던 선혈 기둥.
그것이 크레이 백작의 주문에 호응하여 회오리처럼 휘몰아친다.
이에 휘감기는 그리드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17,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왕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둡니다. <최초의 왕>칭호 효과로 1분 내에 잃은 생명력만큼의 보호막이 생성됩니다.]
[모든 지형 적응력이 100퍼센트 상승하고 이동속도와 방어력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음...?!”
대상에게 완전한 죽음을 선사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선혈의 폭풍.
그 속에 갇힌 인간 놈이 곧 죽으리라고 확신하던 크레이 백작이 짐짓 놀랐다. 인간 놈의 육신 위로 강력한 보호막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쿠콱!
쿠콰콰콰콱!!
선혈의 폭풍에 쉽사리 찢겨 나가던 인간 놈의 육신이 갑자기 폭풍에 저항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리드가 삼겹갑 세트를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로 스왑한 덕분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연살(聯殺)!!”
푹-!
폭풍을 꿰뚫고 쏘아지는 검격.
지독한 살기를 품은 그것이 크레이 백작의 심장을 1회.
푹푹푹푹!!
2회, 3회, 4회 연달아 관통한다.
“쿨럭...!”
한 움큼 피를 토한 크레이 백작이 그리드로부터 황급히 거리를 벌렸으나, 그게 도리어 화근이 되었다.
“하하핫! 이거 너무 재미있군요!!”
직계 4마리의 등장과 함께 위축되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도리어 기뻐하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흑뇌승천권!!”
파직!
파지지지직!
언제, 어느 때고 강한 상대와의 싸움을 염원하는 아수라, 레가스였다.
그리드와 달리 하늘을 날 수 없는 그, 그리드가 4마리 직계와 싸우는 동안 한쪽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간 뒤 지붕으로부터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점이 하필이면 그리드를 피한 크레이 백작이 이동한 지점이었다.
“허를 찌르는 협공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이 나타나 기습해 오자 당황하는 크레이 백작!
퍼어어어어어어어엉-!
그의 곱상한 얼굴에 레가스의 주먹이 깊숙이 꽂힌다.
그리고 이때.
“날아오르라!!”
“레일 스피어!!”
다른 템빨단원들이 호응해서 맹공을 퍼부었다. 진혈족 뱀파이어를 일거에 소멸시켰던 20여 개의 공격 스킬이 크레이 백작을 동시다발적으로 덮쳤다.
츠카칵!
퍼엉-!
콰콰콰쾅!!
맞고, 맞고, 또 맞고!!
템빨단원들이 퍼붓는 공격에 크레이 백작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고, 흘리는 피의 양도 많아진다.
재앙의 서막이었다.
“흐으음... 인간 놈들이 하나같이 강해서 놀랍구나.”
솔직하게 감탄하는 크레이 백작.
그가 몸에 두른 선혈 기둥의 숫자는 이제 하나가 아니라 무려 4개였다.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강해지는 존재.
그것이 바로 크레이 백작의 실체였던 것이다.
이에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하나의 선혈 기둥만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던 그가 이제는 4개의 기둥을 두르고 있었으니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던 것이다.
“크레이가 4개의 ‘꼬리’를 만든 모습은 수백 년 만에 보는 것 같군.”
“브라함에게 6개의 꼬리로 대항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던 후로는 처음이지?”
“인간 놈들치고 제법이었어.”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3마리 직계들은 모두 크레이 백작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나서기 전까진 말이다.
“큭...! 큭큭큭!! 양민 따위가 내 앞에서 피를 무기로 써?”
블러드 워리어 카츠.
애들도 아니고, 굳이 떼거지로 모여서 사냥 다녀야 하는 이유가 뭐냐며 투덜거리던 그.
파티가 9번 도시와 8번 도시를 정복하는 내내 팔짱만 끼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전면에 나선다.
“오로지 나야말로 이 세상 모든 피의 주인이다.”
콰륵...!
콰르르르륵!!
“....!!”
크레이를 비롯한 4명의 직계 모두가 두 눈을 부릅떴다.
크레이가 몸에 두르고 있는 4개의 선혈 기둥이 폭주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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