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10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최근 카심의 근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왕자 로드가 다섯 살이 넘은 해부터 상당히 짓궂어진 까닭이다. 조금씩 엇나간 행동을 했다.
고작 그게 근심거리가 되느냐고?
그래, 된다.
만약, 로드가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짓궂은 성격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4~8살짜리 아이를 괜히 ‘밉다’고 표현하겠는가? 로드 또래의 아이들은 본래 다 그런 법이다.
하지만 로드는 평범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타고난 지능이 비범하였고, 그 어떤 분야라도 빠르게 적응할 만큼 재능이 특출했다.
보고 있노라면, ‘훗날 필시 전설이 될 것이다.’ 라는 확신이 들 지경이었다. 그뿐이랴? 심지어 권력까지 타고났다.
그토록 영리하고 영향력이 큰 아이가 짓궂은 성격을 지녔다는 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방금 전만 해도 보라.
시녀장 얀페이를 쥐락펴락하였고, 얀페이는 로드가 왕자라는 이유만으로 딱히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아직은 장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만약, 로드가 조금의 악의라도 품게 된다면?
‘왕자의 장난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어.’
암살을 생업으로 삼았던 그림자의 왕 카심은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알고 있다. 비뚤어진 권력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몇 번이나 봐 왔다.
‘정서교육에 힘써 왔는데도 어찌 이런...’
로드에게 붙은 스승은 현재 카심 한 명이 아니었다.
전설의 농부 피아로와 대현자 스틱세이, 그리고 대장장이 칸과 가끔씩 찾아오는 교황 데미안까지 로드를 교육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 모두 로드에게 올바른 사고관을 주입시키고자 노력했다. 피아로는 농부들과 병사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알려 주었고, 스틱세이는 전 종족을 아우르는 도덕심을 알려 주었으며, 칸은 교만하지 않은 장인 정신을, 데미안은 올곧은 신앙심을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는 점차 비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심각한 문제다.’
카심은 로드가 태어난 직후부터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는 로드를 단순한 제국의 복수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 자식처럼 아꼈다. 그렇기에 더욱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로드의 비뚤어져가는 성격을 어찌 고쳐야할지 그로서는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허나, 다행히도 그의 근심 걱정은 빠르게 해소된다.
“응? 뭐야, 우리 로드. 오늘도 공부하느라 고생한 거야?”
출정을 나갔다가 귀환한 국왕 그리드.
땀과 흙에 절어 있는 로드의 행색을 보고 걱정하며 그를 포근히 안아 준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좋다만, 그보다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마음껏 뛰어놀도록 해라. 로드 너는 아직 어려. 과도한 책임감을 품고 사서 고생할 필요 없어.”
“아바마마....”
그리드의 커다란 가슴에 꼭 안긴 로드가 눈시울을 붉힌다.
대륙 최고의 천재, 템빨국의 유일한 후계자, 전설의 후예 등등.
로드는 태어난 순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아 왔고,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짓눌려 왔다.
그것이 늘 스트레스였다.
단지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재능이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혹사당하는 자신의 신세를 원망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로드는 자신의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표출할 수 없었다. 하나같이 기대만 보내는 주변인들에게 힘들다고 토로했다가 실망시키기가 두려웠고, 위대한 아버지를 망신시키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한데 지금 이 순간.
“아빠는 로드가 건강하고 행복하면 그걸로 족해. 그리고 로드가 혼자이기보다는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면 좋겠어. 우리 로드가 늘 행복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얼마나 멋질까.”
“.....”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계시는 것이다.
꾸욱...
그리드의 품에 얼굴을 묻은 로드가 앵두 같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복받쳐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철이든 다섯 살 무렵부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던 로드.
그 어린아이가 오늘 마음을 다잡는다.
‘아바마마, 소자 오늘부터 더욱더 열심히 공부할게요. 다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게요. 반드시 아바마마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게요.’
철의 냄새가 배어 있는 아버지의 품이 너무 좋다.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의 크고 거친 손에 행복을 느낀다.
간신히 울음을 참아 낸 로드가 활짝 웃었다.
그림자 속에서 이를 훔쳐보는 카심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부친의 역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
“변하셨군요.”
그리드의 집무실.
그리드와 독대하게 된 라우엘이 꺼낸 말이다.
그는 로드를 품에 안고 속삭이던 그리드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로드에게 온갖 교육을 시키고자 노력하던 그리드가 아닌가?
그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어린아이가 땀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세희가 떠오르더라고.”
“루비 님 말씀이십니까?”
“응.”
못난 오빠를 대신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아이.
세희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온갖 학원을 전전하였고 늘 밤늦게 귀가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드도 잘 알고 있다.
“단지 재능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혹사당할 이유는 없지. 뭐, 왕자로서 쌓아야 할 최소한의 교양은 쌓아야겠지만...”
“전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로드 왕자는 훗날 템빨국 최대의 전력이 될 인재가 아닙니까? 영재 교육을 중단하는 것은 템빨국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직결되는...”
“굳이 아들에게 의지할 필요 없이 내가 더 강해지면 그만 아니야? 이번에 정치력 스탯도 생겼어. 내외적으로 내가 더 노력할 테니까 로드 이야기는 그만하자.”
“.....”
무의식중에 의지하던 브라함이 떠난 이후, 더욱더 강한 책임감을 갖게 된 그리드이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최고에 도달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는 해이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노력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보다 뱀파이어의 도시 공략 순서는 정했어?”
뱀파이어의 도시에 잠들어 있는 네임드 보스들은 최상급 아이템을 드롭한다. 뱀파이어의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템빨단원들의 전력을 상승시키는 것은 중요했다.
“네, 마리로즈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2번 도시와, 위치상 난이도가 가장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1번 도시는 공략 목록에서 일단 제외하였습니다. 나머지 7개 도시를 아래 순번부터 순차적으로 공략하도록 하죠.”
“공략 멤버는?”
“전하를 포함해서 자작급 이상의 최상위 인원으로 파티를 구성하도록 하시죠.”
템빨국에서 자작급 이상의 플레이어라 하면, 전 체다카 길드원 중에서도 최상위 멤버들이 포함된다. 지슈카, 폰, 레가스 등 말이다.
거기에 또 극검, 유페미나, 크리스, 카츠 등이 있다.
“어마어마하네....”
“사실 처음에는 보다 다양한 인원을 파티에 포함시키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인 전력 상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까요.”
제국은 발할라 공략에 실패하였고, 그 원인을 무패왕의 후예에 두고 있을 공산이 컸다.
당장은 두려워서 발할라에 접근하지 못하고 템빨국을 먼저 공략하는 식으로 우회할 여지가 있었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템빨국 전체의 전력이 성장하게끔 의도하는 편이 좋다고 라우엘은 생각했었지만.
“3차 전직자 이하가 지금 와서 성장해 봤자 솔로 넘버 나이트를 상대할 실력을 쌓는 건 불가능하죠. 차라리 상위 멤버의 육성에 주력하는 편이 제국을 상대하기에 좋을 거라고 사료합니다.”
솔로 넘버 나이트의 실력을 직접 목격한 그리드가 동의했다.
“그건 그렇지....”
특히 크리스와 페이커, 그리고 레가스의 성장이 기대되는 그리드였다.
대인전에 강력한 그들이 지금보다 더욱더 실력을 쌓을 경우, 어쩌면 솔로 넘버 나이트와 일대일로 대적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루비 님과 섹시여고생 님도 함께하실 겁니다.”
“....걔네가 시간이 된대?”
“최근의 두 분은 학업보다 Satisfy에 집중하면서 노력해 주고 계십니다.”
“그, 그래...”
뱀파이어들에게 미리 애도를 표하는 그리드였다.
그리고 이 순간 그리드의 불운이 발동했다.
***
“.....”
황성 타이탄의 국립묘지.
제국의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그곳에 적기사단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상복 차림이다.
발할라와의 전쟁에서 사망한 동료들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일동 묵념.”
검은 옷차림인지라 더욱 눈에 띄는 흰 피부.
청발의 여인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그녀를 따른다.
“...로렉스 경, 반드시 당신의 원수를 갚아드리겠습니다.”
“디아 경...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을게요.”
“.....”
적기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한다. 가슴 시린 다짐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대장 메르세데스는 침묵한 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역할은 슬픔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는 것에 있었기에.
“떠날 채비를 해라.”
장례식이 끝난 후.
답답한 상복을 풀어 헤친 메르세데스가 종자 스카이에게 명했다.
순간, 스카이에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피의 복수>
난이도:SSS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는 사망한 동료들의 넋을 기리고자 합니다.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근신 기간 동안 발할라에 잠입하여 무패왕의 후예를 찾아 죽일 각오입니다.
메르세데스의 종자인 당신은 그녀와 행동을 함께하며 그녀가 목적을 이룰 수 있게끔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무패왕의 후예의 사망.
퀘스트 보상:적기사단 입단. 적기사단에 입단할 경우 능력치와 스킬 상승 등의 혜택을 얻게 됩니다.
퀘스트 실패 시:레벨 -5.
‘드디어...!’
플레이어 최초의 적기사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오로지 이 순간만을 목표로 노력해 온 스카이의 야심이 들끓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고 올라가서.’
언젠가 솔로 넘버 나이트가 되고 메르세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리라.
‘그리고 널 내 여자로 만들어 주마.’
음흉하게 웃는 스카이.
그의 시선은 느슨해진 상복 틈새로 엿보이는 메르세데스의 하얀 목덜미를 훑고 있었다.
***
“형제가 셋이나 죽었다.”
시조 베리아체가 친히 잉태하여 낳은 아홉 직계.
그들은 뱀파이어 중에서도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절대자였으나 나태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 대부분을 잠든 채 보냈다.
하여, 형제인 엘핀스톤과 티라멧, 그리고 라티나가 사망했다는 소식 또한 상당히 뒤늦게 접하고 말았다.
“티라멧과 라티나는 몰라도 엘핀스톤까지 당했다는 것은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엘핀스톤은 백작이다. 아홉. 아니, 브라함을 포함하면 열 명이 되는 직계 중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 실력자인 것이다.
“근데 고작 인간에게 당하다니...”
“소문의 전설 중 하나 아닐까? 왜, 뮐러인가 하는 그런 놈들 있잖아.”
“넌 대체 몇백 년 만에 일어난 거냐? 뮐러나 다른 전설들 모두 죽은 지 오래다.”
“엥....? 그럼 대체 어떤 인간이 엘핀스톤을.... 음... 음냐음냐....”
“....쿠울.... 쿠울....”
“.....드르러렁!!”
수백 년 만에 모인 직계들.
공작 마리로즈와 후작 펜릴을 제외하고 ‘한곳’에 모여 앉은 그들 백작 넷이 갑자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나태의 저주의 무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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