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7화
“적의 잔당을 쫓아라!!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자비를 버려라!! 제국의 뼛속 깊이 공포를 새겨라!!”
브라함과 무무드가 리벨론 숲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후.
적기사단과 제국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를 개시했다.
발할라와 무패왕의 후예를 멸하라는 황명?
수행 불가다.
세 번째 기사에 이어서 다섯 기둥조차 패주시킨 저 괴물 같은 무패왕의 후예를 상대할 여력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크악!!”
“히이익!!”
제국군은 한시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의 퇴각 속도는 무척 느렸다. 리벨론 숲의 험난한 지형과 기후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반면 리벨론 숲에서 꾸준히 훈련을 받아 온 발할라군 병사들은 날랬다. 사기까지 승천한 그들은 금세 제국군을 따라잡았고 도륙을 개시했다.
푹-!
푹푹푹!!
츠카카카칵!!
끔찍한 광경!
발할라군 병사들은 마치 악마 같았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제국군 병사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항복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 다시는 발할라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제국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 행위인 것이다.
“저놈들이 신났군...!”
아군 병사들이 무참하게 살육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다섯 번째 기사 디아가 이를 갈았다. 감히 제국의 신민을 해치는 발할라 놈들에게 그는 깊은 살의를 품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돕겠답시고 말머리를 돌리진 않는다.
그가 챙겨야할 것은 언제든지 충당할 수 있는 병사들이 아니라 적기사단이었기 때문이다.
‘메르세데스 님께서 안 계시는 동안 우리 적기사단은 너무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 이상 기사를 잃었다가는 메르세데스 님을 뵐 면목이 없어.’
콰작!
“크악!”
적기사단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온 적장을 날려 버린 디아.
그는 그나마 한 가지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황제에게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점이다.
‘무패왕의 후예는 폐하께서 그토록 총애하시는 다섯 기둥 카일조차도 막지 못했다. 우리 적기사단이 이번 임무에 실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던 거다.’
황제는 적기사단을 처벌하지 못하리라.
적기사단을 처벌하려면 그토록 총애하는 카일도 함께 벌해야했으니까.
‘...하지만 의외였다.’
디아는 무패왕의 후예와 리치의 마법 폭격에 무력해졌던 카일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는 소문보다 더 약했어. 아무리 다섯 기둥 중 최약체라고는 하지만 로렉스 경 이하였다.’
1대1 승부에 약한 로렉스가 호각(?)을 이뤘던 무패왕의 후예를 카일은 잠시도 막지 못했다. 카일이 로렉스보다 약하다는 뜻이 된다. 다섯 기둥의 명성은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던 것이다.
‘반면 메르세데스 님과 루카스 님은 어떤가.’
첫 번째 기사와 두 번째 기사.
자신과 로렉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그들의 명성은 실제보다 도리어 축소되어 있다. 황제가 그들의 공적을 제대로 기리지 않은 결과다.
‘사실은 다섯 기둥들보다 메르세데스 님이 가장 뛰어나신 게 아닐까.’
다그닥! 다그닥!!
디아는 적기사단의 최후방을 달리고 있었다.
적의 추격으로부터 적기사단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위치였다.
위험한 각오를 다진 이상, 물론 책임은 따른다.
“천하의 적기사단이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모습을 다 보네! 푸흐흐!!”
발할라의 대장군 럭.
한쪽 손으로 말의 고삐를 쥔 채, 다른 한 손에는 거대한 언월도를 들고 디아의 측면으로 붙어 온다.
거리가 좁혀진다 싶었을 때.
쩌어어어어엉-!!
럭의 언월도가 호선을 그렸고, 이를 검으로 막아내는 디아의 상체가 살짝 흔들렸다.
“놈...!”
디아가 깜짝 놀랐다.
그는 여태껏 럭과 몇 번이나 싸워 봤지만, 늘 지면에 발을 붙인 채 검술을 교환했을 뿐이다. 이때는 디아가 압도적으로 럭을 이겼었다.
한데 지금, 달리는 말 위에서 검 대신 창을 든 럭의 전투력은 평상시보다 배 이상 강했다. 디아조차도 경각심을 느끼게 만들 지경이었다.
럭이 히죽 웃었다.
“내가 기마술 레벨이 엄청 높거든. 그리고 말 위에서 사용하기에 검은 적합한 무기도 아니고 말이야!”
쩌어엉-!!
럭의 언월도가 이번에는 직각으로 떨어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검을 들어 이를 막는 디아의 균형이 살짝 무너지고 말았다.
“디아 경!!”
뒤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린 적기사들이 질색했다. 그들이 말머리를 돌리려하자 디아가 일갈했다.
“앞만 보고 달려라!! 너희가 향해야 할 곳은 메르세데스 님의 곁이다!!”
“하, 하지만...!”
적기사들은 알고 있다.
로렉스가 무패왕의 후예를 상대하는 동안 발할라군 병사들을 수천 명 이상 베어 넘긴 디아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의 그는 사기가 승천한 적장들의 추격을 홀로 뿌리치지 못한다.
걱정하는 적기사들에게.
“나는 다섯 번째 기사다!! 너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의무다!!”
디아가 소리친다.
그는 생각한다.
윗사람은 아랫사람들에게 의지가 되어야하는 법이라고.
메르세데스 님처럼 말이다.
“너희들의 등은 내가 지킨다! 가라! 아무 생각 말고 황성으로 향해라!!”
쩡! 쩡! 쩌저저정-!!
럭이 휘두르는 언월도의 폭격을 연신 방어하면서 발악적으로 외친 디아.
그는 생존을 포기했다.
말머리를 돌려 럭과 정면으로 맞섰다. 럭을 지원 오기 시작하는 스캇 등의 유명한 적장들 수십 명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적기사단은 영원하다...!”
지금은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그 이름, 피아로.
젊은 시절, 아직 흑기사단원이었던 디아는 그를 동경했다.
자신 또한 언젠가는 저 붉은 기사처럼 선두에서 적을 멸하고 아군을 지키겠다는 꿈을 품었다.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쩌정! 쩡!!
검을 비틀어서 럭의 언월도에 실린 무게를 흘려 낸 디아가 그대로 돌격, 럭의 가슴을 베어 버린다.
“쿨럭...!”
럭이 토해 내는 피가 허공에 수놓이고,
“후회는 없다!!”
디아가 포효했다.
낙마하는 럭의 등을 밟고 도약한 스캇이 내지르는 검에 가슴을 찔리면서도, 그의 검은 단 한순간도 쉬지 않았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적장들을 베고, 또 베고, 베이면서 제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결국.
“...징한 놈.”
다섯 번째 기사 디아의 무용 탓에 아레스 군단원들은 적기사단을 놓치고 말았다. 디아가 버티는 동안 적기사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아레스 군단원은 수십 명이나 사망했다. 과연 솔로 넘버 나이트의 위용이었다.
“유언은?”
디아의 뛰어난 무용과 숭고한 희생정신에 반한 아레스가 친히 묻는다. 전쟁에서 적장에게 갖출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나는....”
무거워지는 눈꺼풀. 흐릿해지는 시야.
털썩!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있던 디아가 무릎을 꿇고 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에 쥔 검은 놓치지 않는다.
“...나는.... 피아로 님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나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배반자라는 오명을 씻어 내시기를.”
쏴아아아아--
누구를 위한 유언인가.
검은 피를 토하는 디아의 몸이 잿빛으로 흩어진다.
아레스가 묵념했다.
***
카일이 패주하고 아그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그리드는 한쪽에 앉아 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전쟁을 수습하는 발할라군대의 강력한 힘을 주시하면서 말이다.
그의 귓가로 브라함의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드.
“뭐야, 멀쩡하네?”
콧방귀 뀐 그리드가 핀잔을 주었다.
“저번에는 무무드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기절하더니만, 오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 잘 붙들고 있구만? 아이고, 대단하셔라.”
중요한 순간마다 도움 안 되는 브라함이다.
이번에는 결과적으로 일이 잘 해결됐다지만, 그래도 역시 썩 마음에는 안 들었다.
퉁명스럽게 대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뱉었다.
-미안하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
브라함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은 없을 터다.
한데 그 오만방자한 인간이 사과를 한다고?
“뭐, 뭐야? 뭐 잘못 먹었어?”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반문했다.
-내가 육신을 되찾는 일에 실패하고, 번헨 열도에서 너와 재회하였을 때. 그때 내가 너의 육신을 빌리면서 했던 말을 너는 기억하고 있느냐?
“....?”
평소와 달리 기운 없는 브라함의 음성에는 온화함이 깃들어 있었다. 인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얘 진짜 왜 이러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브라함!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문득 한 가지 퀘스트를 떠올렸다.
<전설의 대마법사>
★히든 퀘스트★
브라함은 본래의 육신을 되찾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는 소진한 마력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한 공간에 머물기 바라며, 그 공간으로써 당신의 육신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일 경우 당신은 강력한 힘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퀘스트 수락 보상:브라함과의 호감도 50%로 상승,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 <전설의 대마법사>
현재 진행형의 퀘스트.
그리드는 이 퀘스트 덕분에 레전드리 세컨드 클래스를 얻었고, 이후 지금까지 브라함의 영혼과 함께하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브라함은 최소 1년에서 최대 4년 동안만 나의 몸을 빌려 달라고 했어.’
그리고 함께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Satisfy 시간 기준으로 말이다.
“...마력을 다 회복한 거야?”
질문하는 그리드의 목소리가 떨린다.
영원히 함께할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자, 왠지 모를 아쉬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온 까닭이다.
정이다.
그리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브라함에게 깊은 정이 들어있었다.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말이야 트롤이지, 사실 브라함 덕분에 얼마나 승승장구해 왔던가? 즐거운 일도 많았다.
브라함은 든든한 조력자였으며, 또한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드의 감정을 읽은 브라함이 피식 콧방귀 뀌었다.
-그래, 회복되었다. 기뻐해야할 일이지. 한데 너의 그 반응은 뭐냐? 내가 그렇게나 좋았던 게냐?
“.....”
그리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끄럽다는 이유만으로 부정하기에는, 그에게 브라함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
그리드가 침묵하자 브라함도 침묵했다.
사실 정 하면 브라함이 아니겠는가.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추방당한 이후, 인간으로서 살아오는 과정에서 그는 애정이라는 감정을 알게 됐다.
그렇기에 파그마를 소중하게 여겼었고, 무무드를 질투하면서도 걱정하였으며, 지금은 또 그리드를 사랑하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브라함이 애써 경쾌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는 경사다. 이제 너도, 나도 자유다. 나는 나의 육신을 되찾게 될 터이고 너는 나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된다.
피해.
브라함의 표현이 그리드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리드는 눈치챘다.
무무드의 리치를 만날 때마다 통제가 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해서 브라함이 자책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드가 황급히 부정했다.
“아니야, 브라함 너는 내게 피해를 입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생각해 봐. 도리어 네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너와 함께하면서 나는 늘 기쁘고 감사했어.”
-....고맙다.
힘겹게 감사를 말하는 브라함.
그의 음성 또한 떨리고 있었다.
그리드의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스파아아앗-!
그리드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강력한 힘의 근원.
바로 브라함의 영혼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정녕 떠나려하는 것이다.
그리드가 다급히 외쳤다.
“뭐야? 왜 그렇게 서둘러? 천천히 해! 천천히 가라고!!”
-큭큭, 무려 3년이나 기다려 온 순간이다. 나는 어서 떠나고 싶다. 나의 온전한 육신을 한시라도 빨리 되찾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럽잖아!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회포는 풀어야지!!”
구구절절하게 외치는 그리드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그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부르르르르....
브라함의 영혼이 경련을 일으킨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그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선물을 주마. 너의 몸에 몇 가지 마법 수식을 각인시켜 놓겠다. 나중에 지력이 충족되면 새로운 마법을 익힐 수 있을 게야. 나의 부재 따위는 느낄 수 없을 테지.
“브라함...!”
-큭큭, 계집처럼 굴지 마라. 말하지 않았느냐? 내 육신을 되찾겠다고. 결국 같은 시대를 살아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게다.
스파아아아아앗-!!
브라함의 푸른 영혼이 그리드의 가슴으로부터 튀어나왔다.
브라함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순간이다.
“브라함!!”
순식간에 하늘 높이 도달하는 브라함의 영혼을 향해서 그리드가 손을 뻗어 보지만....
‘잘 있거라.’
브라함의 영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 저 너머로 사라졌다.
광속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푸른 영혼.
쩌적! 쩌저저저적!
조금씩 금이 간다.
‘지금의 내 상태로는 무무드의 리치에게 온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리드 너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게야.’
브라함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리드에게 민폐가 되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물론 최초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싶었다. 그리드는 단지 자신의 마력이 회복되는 동안 머무는 그릇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함께하다 보니 그게 아니게 됐다.
그리드가 좋아졌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게 됐다.
‘걱정 마라. 내가 설령 소멸할지라도,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네게 은혜를 갚을 터이니. 잘 지내거라. 너는 후회 없는 삶을 살거라.’
쩍! 쩌저저적!!
푸른 영혼에 더욱 더 많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브라함은 괘념치 않았다.
그리드와의 작별에 집중했다.
‘새로운 전설이여, 네게 찬사와 경외, 그리고 애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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