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4권 - 4화
제국 역사상 가장 두려운 존재를 꼽는다면 드래곤도, 대악마도 아니다.
바로 루반나의 왕, 마드라였다.
제국은 그를 상대로 97번의 전쟁을 치렀으나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했다.
대륙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백전의 경험을 쌓았던 병사들도, 신묘한 책략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책사들도, 든든한 무력으로 제국을 군림시켰던 기사들도.
모두 다 마드라 앞에서는 평등했다. 한낱 애송이였다.
마드라의 용맹에 제국의 병사들은 겁쟁이로 전락하였고, 마드라의 책략에 제국의 책사들은 팔푼이로 전락하였으며, 제국의 기사들은 마드라의 무력을 감당하지 못했다.
많은 정보가 은폐된 탓에 제국 백성들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황실 역사실록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만약, 마드라가 3년을 더 살았다면, 다른 국가들은 루반나의 신하가 되기를 자처했을 것이다. 만약, 마드라가 5년을 더 살았다면, 제국은 영토의 절반을 잃었을 것이다. 만약, 마드라가 10년을 더 살았다면... 제국은 존재하지 못했으리라.』
무패왕!
그 이름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국 황실에 공포로 각인되어 있었다.
제국이 속국 루반나를 유난히 억압했던 이유다.
황실은 무패왕을 배출한 나라가 두려웠다. 제2의, 제3의 무패왕이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근심하며 루반나를 주시하고 루반나 백성들을 무력화시켰다.
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루반나에 무패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당대 황제 쥬앙데르크는 체통도 잊고 몸을 벌벌 떨었다.
“무패왕의 후예를 멸하라!”
황명은 즉각 떨어졌다.
제국의 정예 군대와 적기사단이 모두 루반나로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황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발할라의 왕, 아레스의 개입으로 무패왕의 후예를 놓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상황까지 온 것이다.
적기사단은 책임을 부여 받았다.
감히 제국에 거역한 발할라를 벌하고, 그들이 데려간 무패왕의 후예를 찾아 멸할 것.
로렉스와 적기사단이 새로이 하달 받은 임무였다.
하지만 사실, 로렉스는 이번 임무 또한 실패할 거라고 보고 있었다.
발할라를 벌하는 일이야 쉽지만, 무패왕의 후예는 이미 쥐새끼처럼 어딘가 숨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놈을 쉽게 찾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십만대군 봉쇄검.”
놈이 스스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다.
“무패왕의 후예...!!”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 로렉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여태까지 자신과 칼을 맞대고 싸운 괴한 놈의 정체가 바로 무패왕의 후예였다니?
‘믿을 수 없다!’
얼마 전, 로렉스는 무패왕의 후예를 루반나에서 만난 바 있다.
그리고 무패왕의 후예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전설 속 무패왕과 달리, 무패왕의 후예는 지략이 출중하지 못했고 무력도 평범한 수준에 그쳤던 까닭이다. 심지어 무패왕을 상징하는 검술을 사용하지도 않았었다.
한데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고작 2주 만에 다시 만난 무패왕의 후예는 무패왕을 상징하는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십만대군 봉쇄검.
로렉스의 가문에 대대로 구전되어 온 저주 받은 기술.
무패왕이 검을 뽑으니 십만대군의 발이 묶였다던가?
“허황되다!!”
로렉스가 버럭 소리치면서 전설을 부정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무패왕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존재였던 까닭에, 로렉스는 그를 온전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십만대군을 봉쇄하는 검?
3류 작가의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을 힘이라고 로렉스는 확신했다. 무패왕과 관련된 모든 것이 거짓이라 단정 짓고, 하늘 위의 저 괴한 놈 또한 허풍쟁이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펑-!
퍼퍼퍼퍼퍼퍼퍼퍼펑!!
하늘과 대지를 적색으로, 자색으로 물들이는 투기의 폭죽.
적기사단원들과 함께 이에 적중 당한 로렉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전설은 진실이었음을.
[봉쇄당합니다! 3초 동안 이동할 수 없으며 스킬과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실화라고?
옴짝달싹 않는 다리를 느낀 로렉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다른 적기사단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파앗-!
시야에 묵색의 검광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십만대군 봉쇄검을 발현함과 동시에 하강한 그리드가 휘두르는 검이었다.
“놈...!”
황급히 도끼를 든 로렉스가 방어를 시도했다.
하지만 신속한 몸놀림과 대장장이의 분노 버프 효과를 받은 그리드의 쾌검은 극에 달한 바, 초당 6회 꽂히는 검을 온전히 방어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쩌어어어엉-!
깊이 눌러쓴 투구 중앙에 묵색의 검이 날아와 꽂히고,
퍼어어어어어어엉!!
이어서 검은 불꽃이 폭발한다.
공격 대상이 된 로렉스와, 그 주변에 석상처럼 굳어 선 적기사단원 모두가 큰 피해를 입고 각혈했다.
이를 본 아레스와 아레스 군단원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적기사단.
대륙을 지배하는 사하란 제국의 최강 무력 집단.
만인에게 공포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그들을 그리드는 지금, 단 혼자서 일거에 휩쓸고 있는 것이다.
“비상식적인 녀석 같으니라고...!”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아레스가 쥐어 짜내듯이 외친다.
“자네가...! 자네가 최고야!! 자네가 지존이라고, 그리드!!”
그리드.
최초의 레전드리 전직자이고, 최초의 국왕이며, 또한 영웅 중의 영웅이 된 사내.
그를 최고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최고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아레스의 솔직한 심정이었고 외침이었다. 아레스 군단원 중 그 누구도 그의 외침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리드는...
‘지존...!’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두근!
로렉스를 베어 넘기면서, 아레스의 외침을 듣는 그의 심장이 크게 뛴다.
‘내가 지존이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누구나 인정하는. 나 또한 인정하는 최고의 플레이어가 지금 이 순간 내게 지존이라고 외쳤다.
평생을 바보처럼 살았고, 재능이 없어 셀 수 없이 많은 고배를 마셔왔던 내게, 희대의 천재가 독점해 왔던 타이틀을 부여한 것이다.
[투기가 60을 돌파하였습니다.]
인생의 대부분을 무시와 조롱만 받고 살았던 그리드에게 있어서 인정받는 일만큼 기쁜 것은 없다.
하물며 보통 사람이 아니라 군신이라고 칭송 받는 아레스에게 최고라는 찬사를 받은 것이다.
이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하는 그리드에게.
“노오오오오옴!!”
봉쇄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로렉스가 포효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공격이었다.
도끼날이 마치 세 갈래로 나뉜 것처럼, 로렉스의 도끼는 한 번에 3개의 궤도를 가지고 그리드를 덮쳤다.
로렉스의 지속형 액티브 스킬, 삼점격의 발현이었다. 이는 로렉스를 상징하는 비기이기도 했다.
“단지 빠르기만 해 봤자 이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로렉스!
그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맞아 주면 그만이지.”
“...!!”
로렉스가 아차 싶었다.
눈앞의 괴한. 아니, 무패왕의 후예 놈.
잠시 빨라져서 내 공격을 회피하고 있었으나 돌이켜 보면, 그 전까지는 내 공격을 온전히 얻어맞고 버텨 오지 않았던가?
놈에게 회피는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던 것이다. 공격을 적중시키는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퍼어억!!
깨닫는 로렉스의 도끼가 그리드의 가슴을 강타했고.
푹-!
푸푸푸푸푸푹!!
이를 악문 그리드가 반격했다.
여전히 받는 피해량 3배의 디버프를 안고 있는 로렉스였다.
“크아아아아악!!”
타격과 피격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더 큰 고통을 느끼는 쪽은 이제 그리드가 아닌 로렉스였다.
다른 적기사들이 그를 돕고자 시도했지만.
퍼퍼퍼퍼퍼퍼퍼퍼펑!!
또 한차례 검은 불꽃이 폭발하면서 그들을 저지했다.
“도대체 무슨...!”
이토록 강력한 광역 스킬을 어떻게 계속 쓸 수 있는 거지?
놈에게는 마나의 한계도 없는 건가?
동요하는 적기사단원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게.... 이게 무패왕의 힘....”
“....!”
무패왕.
그래, 눈앞의 적은 무패왕의 후예다.
우리의 상식으로 측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깨닫는 그때.
[투기가 70을 돌파하였습니다.]
십만대군 봉쇄검을 사용한 이후 잠시 옅어졌던 그리드의 투기가 다시 짙어졌다.
신속한 몸놀림과 대장장이의 분노의 위력이었다. 극상의 공격 속도를 발휘하게 된 그리드의 투기 축적 속도는 전과 비할 바 없이 빨라져 있었다.
[투기가 71을 돌파하였습니다.]
[투기가 72를 돌파하였습니다.]
[투기가....]
투기 축적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로렉스를 돕고자 전투에 합류한 적기사단이 문제였다.
여러 명이 그리드를 둘러싸고 협공하는 행위, 득보다는 실이 더 컸다.
급기야.
[투기가 최대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신속한 몸놀림과 대장장이의 분노 지속 시간이 딱 10초 남은 시점.
<도란의 반지>와 <티라멧의 허리띠>, 그리고 <최초의 왕> 효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그리드의 시야에 이와 같은 알림 창이 떠올랐다.
“몰아붙여라!!”
로렉스와 적기사들은 공격의 기세를 높였다.
간헐적인 회복 스킬로 목숨을 유지하던 그리드의 생명력이 죽기 직전까지 떨어졌음을 확인한 그들은 이제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때라고 판단했다.
그리드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최대치로 상승한 투기 덕분에 근력, 민첩, 체력 수치가 50퍼센트 상승한 그리드.
그가 템빨왕을 상징하는 힘이라기에는 다소 애매한, 그 특수한 힘을 개화시켰다.
“흑화.”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폭사하는 마기.
그리고.
“십만대군 학살검.”
“....!!”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칵!!
초당 30회.
최강 신속의 검격이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퍼부어진다. 칠흑의 검광이 허공을 수놓자 주변이 온통 검게 물들 지경이었다.
이에, 로렉스와 일대의 적기사단원 전원이 난도질당했다.
[대상에게 65,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67,8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66,67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검은 불꽃이 폭발...!]
[목표 대상의 반경 10미터 이내에 공격력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스플래쉬 데미지를 입힙니다!]
[대상에게 32,1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9,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검은 불꽃이 폭발...!]
[목표 대상의 반경 10미터 이내에 공격력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스플래쉬 데미지를 입힙니다!]
[대상에게....]
[대상에게....]
그리드가 연(聯)을 애용했던 이유는, 타격 횟수가 많은 만큼 열망의 무아지경의 뇌전 검의 옵션 발동 확률 또한 상승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논리는 십만대군 학살검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리고 십만대군 학살검은 연(聯)과 달리 단일 대상 공격 스킬이 아니라 광역 공격 스킬이다.
다수의 적을 여러 번 때리는 만큼, 검은 불꽃이 폭발할 확률도 높았다. 훨씬 더!
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
아직은 플레이어가 접할 수 없는 최상급 마법, 메테오가 하늘에서 수차례 떨어지면 이럴까?
아레스와 아레스 군단원들는 쉬지 않고 폭발하는 검은 불꽃이 리벨론 숲의 일각을 초토화시키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이날.
[스물세 번째 기사 로브를 해치웠습니다.]
[스물여섯 번째 기사 켄트를 해치웠습니다.]
[스물아홉 번째 기사 오르도를 해치웠습니다.]
[열두 번째 기사 테오를 해치웠습니다.]
[열네 번째 기사 쉔을 해치웠습니다.]
[열다섯 번째 기사 비오를 해치웠....]
....
...
30번대부터 20번대 적기사가 궤멸했다. 또한 10번대 적기사도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세 번째 기사 로렉스를 해치웠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적기사단의 레드 아머>를 획득하였습니다.]
[<로렉스의 레드 아머>를 획득하였습니다.]
[<로렉스의 대형 도끼>를 획득하였습니다.]
세 번째 기사 로렉스 또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이럴 수가...!”
“네놈! 무패왕의 후예!!”
생존한 적기사들이 다섯 번째 기사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그들은 비교적 멀쩡했다. 로렉스처럼 피해가 누적된 상태도 아니었고, 받는 피해 3배 디버프를 받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각자의 방어 스킬로 어떻게든 최대한 몸을 지킬 수 있던 것이다.
반면 그리드는 망신창이였다.
[신속한 몸놀림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대장장이의 분노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허억.... 허억.....”
생존 스킬을 전부 다 소모한 상태. 버프까지 끝났다.
흑화의 사용으로 최대 생명력은 절반으로 하락한 상태이다.
‘이대로는 못 싸워.’
불사를 잃는 건 곤란하다. 불사는 최후의, 최후의 보루다.
판단한 그리드는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에 전장을 이탈해야한다고 판단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기사들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파직!
파지지지직!!
[강력한 뇌전이 당신을 구속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높은 평정의 효과로 구속 지속 시간을 단축시킵니다.]
“단신으로 적기사단을 여기까지 몰아붙이다니, 과연 무패왕의 후예로군요. 당신의 목을 폐하께 바치면 아주 기뻐하시겠네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부터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그리드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뭐지?’
혼란에 빠진 그리드.
그의 눈앞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든 물체를 투과시키는, 투명한 피부의 인영이었다.
피부가 점차 하얗게 변하면서 모습을 드러낸 인영의 주인, 머리도, 눈썹도, 피부도, 심지어 눈동자까지 희다.
“안녕하세요? 카일이라고 합니다.”
제국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
그리드에게는 아직 미지인 존재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자, 죽으세요.”
파직!
파지지직!!
“큭...!”
[속박 해제까지 1초 남았습니다.]
뇌전을 머금은 카일의 손이 그리드의 안면을 뒤덮는 이때.
“시체 일으키기.”
퍼엉-!
카일의 바로 등 뒤.
로렉스가 사망한 지점으로부터 데스나이트가 일어나 카일을 공격했다.
로렉스의 데스나이트였다.
“...허?”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한 카일이 아주 찰나 움찔했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드가 몸을 속박하고 있던 뇌전의 기운을 뿌리쳤다.
황급히 카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그의 등 뒤로부터,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음성이 들려왔다.
“킥... 킥킥, 너는 내꺼야. 나 말고 다른 놈한테 뒤지지 말라고.”
“너는....!”
등 뒤로 고개를 돌린 그리드가 경악했다.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운 눈.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녹색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사내, 아그너스.
바알의 계약자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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