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19화
매달 50회 이상의 선행을 베풀 것.
성녀 클래스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성녀가 선행을 베풀지 않으면 성녀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며, 두 번 다시는 성녀가 될 수 없다.
말인 즉, 루비는 성녀로 전직한 후 지난 수년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선행을 베풀어 왔다는 뜻이다.
날개 잃은 천사, 레베카의 화신 등등.
루비에게 도움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다양한 이름으로 찬양했다.
어느 음유시인은 노래했다.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는 그리드일지언정, 가장 사랑받는 플레이어는 루비일 것이라고.
남매가 다 해 먹고 앉았다, 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지만, 그 말은 웅변가 후로이의 외침에 묻히고 조작돼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곳곳에서 열일하는 템빨단원들이었다.
“성녀님, 루비 성녀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오늘 빵이 아주 잘 구워졌답니다.”
“성녀님, 이 팔찌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윈스톤의 시장에서 발견한 물건인데, 성녀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 구매해 왔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한쪽 귀 멧돼지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입니다. 최근 날씨가 추워지고 있으니 걸치고 다니기에 좋을 거예요. 혹시라도 감기 걸리지 마세요. 슬플 겁니다.”
“성녀님!”
“루비 성녀님!”
[라인하르트의 제빵사 잭슨으로부터 품질 좋은 호밀 빵 10개를 받았습니다.]
[라인하르트의 상인 에일로부터 하급 에메랄드 팔찌를 받았습니다.]
[라인하르트의 사냥꾼 리발로부터 멧돼지 가죽 옷을 받았습니다.]
[라인하르트의....]
....
...
성녀 루비가 거리에 나올 때마다 연출되는 광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발견하면 달려와서 선물을 안겨 줬다.
본래 한사코 거절하던 루비였으나,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것이었다. 루비가 선물을 거부하면 좌절하고, 심할 경우 우울증에 빠졌기 때문에, 루비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선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루비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과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루비가 받는 선물의 양과 질도 늘어났다.
루비가 하루 평균 받는 선물의 가치는 이제 약 80골드에 달할 정도였다.
80골드!
한화로 환산하면 무려 10만 원의 가치다.
그간 쌓아 온 선행 덕분에, 루비는 이제 로그인만 해도 하루 10만원의 공돈을 벌게 된 셈이었다.
그녀가 몇 달 전부터 오빠 그리드의 용돈을 거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게임으로 돈 버는 사람 대열에 합류한 루비.
주변에서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굳이 대학에 진학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 오빠처럼 게임하면서 돈 벌면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하지만 루비는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접지 않았다.
Satisfy의 미래를 불안하게 여겨서가 아니다.
여느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그렇듯, 오로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초중고 시절을 바쳐 온 루비다. 그녀는 자신의 그간 노력이 수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좋은 대학의 가치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단,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하겠다던 목표는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템빨국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학에 진학하고 나면 게임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지겠지.’
싫지 않다. 오히려 좋다.
그녀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무엇보다도 오빠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설령 게임이 싫었더라도 오빠를 위해서라도 집중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루비는 학용품 하나 구입할 때마다 돈을 걱정했었다. 하굣길에 군것질거리 사 먹는 일조차 사치였을 정도로 그녀는 경제적 여유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그녀의 입장에서 최근의 풍족한 삶은 하염없이 감사한 것이었다.
‘이게 다 오빠 덕분이야.’
그리드를 생각하는 루비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과거, 그리드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 쉬고 걱정하던 것이 실제였는지 이제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아빠랑 엄마도 매일 웃기만 하셔. 오빠 덕분에 집안이 행복으로 가득해.’
너무나도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오빠다.
루비는 오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라우엘은 그녀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다.
“루비 님, 백성들에게 3일에 한 번씩 명예의 전당으로 찾아가라고 종용해 주십시오. 그곳에 생긴 그리드 전하의 석상에 반드시 3일마다 기도를 올리라고 말해 주세요.”
병사들에게는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일반 백성은 다르다. 국가가 백성의 일과에 강제적인 명력을 삽입할 경우, 반감을 사서 민심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여 라우엘은 루비의 인망을 이용했다.
“부탁드립니다.”
“....알았어요.”
번헨 열도 정화 이후, 스틱세이는 번헨 열도에 입장할 수 있는 게이트의 봉인을 대부분 해제시켰다. 이제 라인하르트에서도 번헨 열도까지 비교적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쉽게다.
특히 명예의 전당은 번헨 열도에서도 가장 마지막 섬에 위치해있다.
라인하르트에서 명예의 전당을 왕복하는데 최소 5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라인하르트 백성들의 시간을 3일에 한 번씩 5시간씩 뺏어야한다는 뜻.
루비는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오빠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부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내가 그들에게 더 잘해 주자. 조금 더 노력하자, 세희야.’
사람들이 루비에게 부탁하는 선행의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는 중이다. 루비를 위험에 빠뜨릴 때도 허다했다. 하지만 루비는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붉고 도톰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각오를 다지는 루비.
두 손을 말아 쥐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그녀의 모습은 기가 막히게 사랑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헤실헤실 웃던 라우엘이 험험, 헛기침을 뱉었다.
“백성들은 걱정할 것 없어요. 참배는 도리어 그들에게 좋은 일이 될 겁니다. 5시간씩 꾸준히 걸으면 체력 스탯이 오를지 또 누가 압니까?”
“흥... 당신의 말은 안 믿어요.”
“네, 차라리 믿지 마십시오. 당신을 실망시키는 죄인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
라우엘은 스스로의 멘트가 완벽하다고 자부했다. 여신의 마음조차도 사로잡을 만큼 낭만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루비는 라우엘의 말을 안 들은 귀가 사고 싶었다.
라우엘 또한 모태 솔로였다.
***
<그리드 전하의 석상에 참배>
난이도:템빨국 반복 퀘스트.
3일에 한 번, 명예의 전당으로 이동해서 그리드 전하의 석상에 참배하십시오.
퀘스트 보상:20회 연속으로 참배할 때마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중 하나 획득.
“.....”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들에게 떠오른 새로운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플레이어들은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번에 가서 보니까 명예의 전당에 있는 석상 중에서 그리드 석상 버프가 제일 쓰레기던데....”
“그나마 제작 계열 직업군은 버프라도 있지, 우리 같은 전투 계열 직업군 플레이어한테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고.”
“검무 쓰는 직업군이 몇 개나 되려나....”
“와, 근데 그리드 진짜 똑똑하지 않냐?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새로운 퀘스트를 만들어 버리네.”
“똑똑하다기보다는 야비한 거 아니냐.”
“아, 열 받아. 그리드 세트 얻으려면 퀘스트 안 할 수도 없고.”
“에이, 썅. 명예의 전당까지 가려면 몇 시간을 걸어야 되는데.”
“라빗 행정관이 번헨 열도 이동 주문서를 따로 판매한다던데....”
“헐? 장사 제대로 해 먹는구만? 그 왕에 그 신하네, 썩을. 끼리끼리 아주 잘 만나셨어.”
투덜투덜!
새로운 퀘스트를 부여받은 템빨국 플레이어들의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애초에 그리드 세트를 얻고자 템빨국으로 이주한 그들이다.
2달마다 그리드 세트를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거부할 리 만무했다.
“내 참 더러워서. 그리드 세트 다 모으면 곧바로 제국으로 떠야지.”
“난 발할라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 이상이다.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 템빨국은 그저 거쳐 가는 단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를 묵과할 라우엘이 아니었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종류를 늘리도록 하죠.”
현재 양산형 그리드 세트는 무기, 갑옷, 투구, 장갑, 부츠로 구성되어 있다.
고작 다섯 부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의 발을 장기간 묶어두기엔 무리가 있었다.
“재단 기술도 배우셨잖아요? 망토랑 팬티까지 세트에 구겨 넣죠. 기왕이면 양말도.”
“...못해.”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세트 효과는 다섯 부위로 종결됐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됐다. 이제 와서 망토와 팬티 등을 추가해 봤자 세트 효과가 추가되진 않는다.
황당해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사악한 미소를 그려보였다.
“굳이 세트 효과가 없더라도 이름만 같으면 눈속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퀘스트 보상으로 팬티와 망토를 가장 먼저 지급함으로써 플레이어들이 그리드 세트를 수집하는 속도를 늦추도록 하시죠.”
“...양심 있어?”
“저는 플레이어들을 위해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만? 옵션 붙은 팬티를 제작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세상에 전하가 유일하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그 좋은 팬티를 어디 가서 구하겠습니까? 다들 기뻐할 겁니다.”
“.....”
그래, 방어력 1이라도 올릴 수 있는 게 어디냐.
납득한 그리드가 여태까지 틈날 때마다 만들어 두었던 팬티 더미를 라우엘에게 던져 주었다.
“앞으로 새로운 팬티를 만들 때마다 계속 보내도록 하마.”
“훌륭하신 용단입니다, 전하.”
“....양말도 만들어 봐야지.”
만약, 그리드에게 양심이 있었다면 ‘사람들에게 망토라도 좋은 걸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안족과의 교류를 위해서 란스티어의 망토를 양산하려던 그리드였으므로, 질 좋은 망토를 양산하는 것이 환경적으로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 또한 양심이 없었다. 벌써부터 싸구려 양말 제작법을 구매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아니, 장기적으로 보면 이래선 안 되지.’
아차,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플레이어들의 발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으려면 망토라도 좋은 걸 만들어 줘야겠어. 양말 제작법도 배우고.’
그나마 라우엘보다는 나은 그리드였다.
이렇듯 템빨국은 오늘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저 한 가지 문제는, 루반나의 반란을 잠재운 제국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것이었다.
***
“무패왕의 후예를 놓쳤다고?”
황도 타이탄.
대륙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궁전으로 손꼽히는 황궁에 황제의 격한 음성이 울려 퍼진다.
“쓸모없는....! 반란군의 수괴를 놓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황제 쥬앙데르크는 분노하고 있었다.
검공 리미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혐오가 깃들었다.
“당대의 적기사단은 정말이지 하찮구나! 피아로가 있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
쥬앙데르크는 대륙의 주인을 자처할 수 있는 권력자이다. 그가 바보일 리 없다. 그는 당대의 적기사단이 황비 마리의 영향력에 놓여 있음을 알고 있었고, 당연히 적기사단을 경계했다.
건수만 생겼다하면 이들에게 제약을 주고 약화시켰다.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와 두 번째 기사 루카스에게 책임을 묻겠노라! 그 둘을 세 달 근신에 처한다!!”
“폐, 폐하...!”
군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검공 리미트가 깜짝 놀랐다.
메르세데스와 루카스는 적기사단의 중추.
그들이 세 달이나 자리를 비웠다가는 적기사단의 운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 뻔했다.
물론 쥬앙데르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쥬앙데르크는 리미트가 재고를 부탁하기도 전에 선수를 쳐서 말했다.
“걱정 마라. 세 달 동안 카일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니라.”
‘카일....!’
카일은 제국의 다섯 기둥 중 한 명이다.
다섯 기둥 중에서 유일하게 젊었고, 그로 인해서 지금 당장은 능력이 완전치 못했으나 그만큼 발전 가능성은 큰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쥬앙데르크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검공 리미트가 사태의 심각성을 즉시 파악했다.
‘카일은 높은 인덕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지만 사실은 선동과 조작에 능숙한 뱀이다.’
지난 수년 동안 계속되는 출정에 적기사단은 지쳐 있었다. 그들이 여태껏 쉬지 않고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대를 뛰어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당대의 적기사단은 전대의 적기사단과 비교 당했고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전 에트날 왕국에서 몇 명의 적기사가 살해당하고, 비교적 최근에는 여섯 번째 기사 레이도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온갖 소문이 난무하면서 적기사단의 마음이 꺾이기 시작했다. 불안이 그들을 지배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메르세데스와 루카스가 사라지고 뱀 같은 카일이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면...
‘카일이 적기사단을 지배하거나 와해시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폐하의 노림수일 테고.’
이는 황비 마리에게 분산된 권력을 다시금 쥬앙데르크에게 집중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며, 다섯 기둥 중에서 비교적 입지가 약한 카일의 영향력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터.
황비의 파벌에 속한 검공 리미트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부권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반란군 수괴.
그것도 역사상 제국에 가장 큰 위협이었던 무패왕의 후예를 놓친 적기사단의 실책은 엄청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황제와 검공의 대화를 퀘스트 형식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네크로맨서 랭킹 1위이자 아그너스의 최측근인 베라딘이었다.
‘여기서 리미트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퀘스트 내용이 결정되겠군.’
정황상, 카일이 이끌게 될 적기사단은 발할라에 분노의 철퇴를 날릴 가능성이 높았다. 감히 무패왕의 후예를 빼돌린 아레스를 황제가 용서할 리 없었다.
이때 황비의 측근인 리미트가 내릴 선택은 무엇일까?
카일이 발할라를 멸하고 공적을 쌓는 모습을 과연 그가 순순히 지켜볼 수 있을까?
‘어쩌면 아그너스 님과 아레스가 손잡는 모습을 볼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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