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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41화 (536/1,794)

템빨 33권 - 17화

그리드의 게임 플레이 방식은 독특하다. 좋게 표현하면 보통 사람과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게임 센스가 없었다.

만약,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영웅왕의 칭호를 얻었으면 어땠을까?

가장 먼저 투기라는 자원에 대해서 연구해 봤을 것이다.

투기가 어떤 경우에 상승하며 하락하는지, 투기 상승으로 인한 능력치 효과는 정확히 어떻게 체감되는지, 투기가 10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발생한다는 페널티는 무엇인지 등등.

새롭게 얻은 자원에 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완벽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달랐다.

투기의 효과는 상세 정보에 나열되어 있는 바, 그리드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고, 굳이 분석까지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투기가 10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발생한다는 페널티? 어차피 투기는 항상 10으로 유지된다는데 뭘 사서 걱정이냐, 싶어서 일단 신경 껐다. 차차 알아 가면 될 문제라고 보았다.

결국, 번헨 열도 공략 이후 그리드가 가장 먼저 집중했던 부분은 마드라라는 ‘인물’이었다.

마드라의 강함에 반하고, 그의 호의에 감격한 그리드의 머릿속에는 온통 마드라 생각밖에 없었다. 일기장을 읽고 마드라의 검술을 얻기 전까진 투기 자원을 신경도 안 썼을 정도이다.

이는 그리드가 얼마나 감정적인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만약, 그리드가 일반적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였다면 평생을 하수로 썩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Satisfy는 NPC의 중요도가 높았고, 그리드의 이 특이한 게임 접근법은 언젠가부터 그의 강점이 되고 있었으니 아이러니하다.

“흠.”

라인하르트 인근 초보자용 사냥터.

10레벨 미만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그곳은 로드가 갓난아기 시절에나 찾던 장소다.

소수의 초보자와 나무꾼들만 보이는 그 평화로운 장소에 우뚝 선 그리드가 지나가는 사슴을 검으로 후려쳤다.

퍽.

당연히 사슴은 그리드의 일격에 사망했다. 초당 4회 날리는 그리드의 검격 중 첫 번째 검격을 얻어맞는 순간 잿빛으로 산화하였고, 이어지는 3회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끄응....”

그리드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벌써 20마리째 사슴을 사냥하였건만 투기가 10에서 꼼짝도 안 했던 까닭이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뱀파이어 도시에서 크리스와 대화하며 사냥했을 당시.

진혈족이 아닌 평범한 뱀파이어나 사역마들은 아무리 때려잡아도 투기가 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몇 마리의 사슴을 더 사냥해 본 그리드가 확신했다.

‘약한 상대와는 싸워 봤자 투기가 오르질 않는가 보군. 여기서 말하는 약함의 기준을 정확히 파악해야 투기 관리가 용이해지겠어.’

판단한 그리드가 사냥터를 옮겼다. 난이도가 낮은 곳부터 높은 곳까지 순차적으로 이동하면서 몬스터들을 종류별로 학살했다. 이 과정에서 템빨골을 소환하여 템빨골들의 성장에도 신경 썼다.

결과.

‘나보다 30레벨 이상 낮은 상대하고는 아무리 싸워 봤자 투기가 안 오르네.’

그리드는 최소 326레벨이 넘는 몬스터와 싸워야지만 투기가 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대로 나보다 레벨이 높은 상대에게는 투기가 빠르게 오를 것 같은데?’

근거 있는 분석이었다. 몬스터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투기 상승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나보다 레벨이 10 낮은 몬스터는 10대 때리거나 10대 맞아야 투기가 1 오르고, 동레벨 몬스터에게는 8대 때리거나 8대 맞아야 투기가 1 오르는군. 흠...’

투기는 까다로운 자원이었다. 적에게 공격을 명중시키거나 적의 공격을 허용할 때만 축적됐다. 그리드 자신이나 상대방이 공격을 회피하거나 방어하면 투기 수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리드의 표정이 더욱더 썩어 들어갔다.

투기 축적 공식이 플레이어에게까지 적용될 거라고 생각하자 속이 쓰라렸던 것이다.

그리드는 통합 랭킹 3위였으니까.

20억 플레이어 중에서 그보다 레벨이 높은 사람은 공식적으로 2명밖에 없다.

‘아무래도, PvP에서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겠네.’

당장 제3회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가 상대하게 될 적 대부분은 그리드보다 레벨이 30 이상 낮을 것이었다. 그럼 투기는 써먹지 못하는 자원이 되는 셈이다.

“에라이, 염병.”

영웅왕.

여러모로 강자에게만 빛을 발휘하는 칭호였다. 조건부로 최상의 효과를 발휘했으니 나쁘다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역시 아쉬운 감은 있었다.

키야아아아!!

그리드가 투기에 대해서 분석하고 투덜거리는 사이.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여성형 몬스터가 등장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대상에게 상태 이상 석화를 걸어 버리는 <퇴화한 메두사>의 출현이었다.

‘어느새 바위 숲까지 발을 들였었나.’

바위 숲.

울창한 산림이 통째로 석화에 걸려 있는 숲이었다.

라인하르트 인근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사냥터로 꼽히는 이곳에는 유저의 발길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량으로 출몰하는 퇴화한 메두사를 상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던 까닭이다.

석화 내성을 최소 80퍼센트 이상 갖춘 사람들이 <정화>마법을 보유한 레베카교 사제를 반드시 멤버로 섭외해야만 파티 플레이가 가능한 수준의 사냥터였다. 솔로 플레이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그리드는 예외였다.

[퇴화한 메두사와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석화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퇴화한 메두사와...!]

[저항하였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저항....]

“????”

그리드를 포위하면서 등장한 다섯 마리의 메두사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멍청한 인간 놈, 멀뚱멀뚱한 눈으로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기에 돌덩어리로 변하리라 보았건만 멀쩡했던 까닭이다.

그리드가 놈들에게 파(派)를 날린 후 갓 핸드와 함께 협공을 펼쳤다.

[대상에게 25,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8,100의 피해를....]

‘개꿀.’

퇴화한 메두사의 레벨은 350이다. 심지어 정예 몬스터로 분류되기 때문에 그리드에게도 짭짤한 경험치를 줬다. 또한, 상태 이상에 특화된 개체인 까닭에 일반적인 정예 몬스터보다 신체 능력은 약한 면이 있었다.

그리드는 놈들을 손쉽고 빠르게 해치우면서 투기를 쌓아 갔다.

도중에 <말락서스의 망토>를 착용, 피비린내 옵션으로 몰이사냥을 유도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투기가 20을 돌파하였습니다.]

비슷한 레벨대의 몬스터와 전투를 치르다 보니 투기가 빠르게 상승했다.

각도에 따라서 적색으로도 보이는 자색 기운이 그리드의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대상에게 32,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투기가 상승할수록 그리드는 높아지는 공격력을 체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냥 속도가 빨라졌으니 절로 신이 났다.

‘아차.’

바위 숲의 메두사를 멸절시킬 기세로 사냥에 열중하던 그리드가 본래 목적을 상기했다. 어느새 50까지 치솟은 투기를 확인한 그가 스킬 창을 열었다.

“....당장 사냥터로 가 보시죠. 투기를 쌓은 후에 검술을 사용해 보세요.”

그리드의 뇌리에는 스틱세이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반복해서 울리고 있었다.

<십만대군 봉쇄검(열화판)>Lv.1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의 20퍼센트 피해를 입히며 3초 동안 ‘봉쇄’ 효과를 줍니다. 봉쇄에 걸린 대상은 이동이 불가능하며 스킬과 마법 사용이 차단됩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5,000, 검기 2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분

*투기 자원 획득으로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십만대군 학살검(열화판)>Lv.1

공격 대상의 반경 10미터에 있는 모든 존재(피아 구분 불가)에게 공격력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총 30회 입힙니다.

스킬 자원 소모:마나 8,000, 검기 5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투기 자원 획득으로 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미친!!”

투기가 일정 수치까지 도달하면 자연히 스킬 자원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예상이 맞았다.

그리드가 자괴감에 빠졌다.

‘처음부터 투기를 확인했으면 간단히 해결됐을 문제잖아!’

혼자서 괜한 걱정에 빠져가지고 심력 소모만 오지게 했다. 시간 낭비도 제법 컸다.

그리드는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을 개탄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끄으.... 오빠 화났다.”

죄 없는 메두사들에게 화풀이를 결심하는 그리드!

신속한 몸놀림까지 전개해 가면서 메두사들을 복날 개 패듯이 후려 패기 시작한다.

끼약!

꺅!!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메두사들의 비명이 바위 숲 곳곳에 메아리치기를 십여 분.

[투기가 70을 돌파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리드가 십만대적검 발동에 필요한 자원을 전부 모았다.

“플라이.”

파앙-!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브라함의 부츠>를 신은 후 하늘 높이 떠올랐다.

“여덟, 열 넷.... 스물, 서른 둘.”

흑발을 나부끼며 상공에 선 그리드의 시야에 30여 마리의 메두사가 포착된다.

바위 숲 곳곳을 배회하고 다니던 녀석들이 피 냄새를 맡고 지금도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씨익!

그리드의 입가로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무패왕의 위엄을 떠올린 그가 말투를 따라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짐의 무용이니라.”

쿠오오오오오오오!!

그리드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던 자색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효과가 어찌나 현란한지, 그리드의 모습을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게 될 정도였다.

“십만대군.”

자색 폭풍의 틈새로 그리드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이는 것이 보인다.

그리드는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봉쇄 검.”

퍼엉-!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축제가 펼쳐진다.

자색의 투기 폭풍이 그리드의 검 끝을 타고 마치 폭죽처럼 사방팔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표적은 지상의 모든 메두사.

그리드의 ‘시야에 닿는 모든 대상’이 투기의 폭죽에 강타당하고 상태 이상 봉쇄에 빠진다.

키익...!!

캬아아아아!!

공격력 계수가 낮은 십만대군 봉쇄검의 위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투기 폭죽에 강타당한 메두사들은 물리적인 데미지를 별로 입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봉쇄였다.

최대 3초 동안 이동과 스킬, 마법의 사용을 차단시켜 버리는 최악의 CC기.

그것이 메두사들을 석상처럼 굳어 버리게 만든 것이다.

사람들을 석상으로 만드는 일에 익숙했던 메두사들은 평소와 반전 된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십만대군.”

지상으로 내려온 그리드는 선고한다.

“학살검.”

죽음을!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카카칵!!

초당 30회 쏟아지는 검격.

대상은 그리드의 바로 앞에 선 메두사였고, 실질적인 공격 범위는 대상이 된 메두사의 반경 10미터이다.

펑-!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스플래쉬, 스플래쉬, 스플래쉬 데미지의 향연!!

연달아 폭발하는 검은 불꽃이 메두사들을 바위 숲 통째로 날려 버렸다!

[대상에게 15,3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6,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8,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제작한 이후 연(聯)을 애용했던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째, 높은 타격 횟수 때문에 검은 불꽃의 발동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며, 둘째,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누적시킬 때마다 데미지 상승’효과가 고스란히 적용됐기 때문이다.

즉, 연(聯)을 대상에게 적중시키는 순간 그리드의 공격력은 100퍼센트 즉각 상승해 왔다는 뜻이다.

한데 십만대군 학살검은 한 술 더 떴다.

학살검의 피해 범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30회 중첩 피해를 입다 보니 그들 모두에게 그리드의 공격력이 100퍼센트 상승 적용됐다.

“큭...! 크하하하하핫!!”

희열!

쾌감!!

부르르, 몸을 떤 그리드가 결국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시야 한쪽에는 데미지 효과 알림 창이 수백 회 이상 갱신되고 있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의 대상에게 30회씩 피해를 입혔으니 알림 창 갱신 속도가 빛과 같았다.

“마무리다....!”

몰이사냥의 쾌감에 지배당한 그리드!

다 죽어 가는 메두사들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려던 그가 움찔, 놀라면서 행동을 멈췄다.

[투기가 0으로 하락했습니다.]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앞으로 10분 동안 투기가 회복되지 않으며 모든 능력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미쳤...”

사실, 그리드가 딱 70의 투기만 확보한 이후 스킬을 사용한 이유는 페널티를 체험해 보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만만한 메두사들을 적합한 실험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페널티가 이렇게까지 심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캬오!!

“히, 히익...!”

모든 능력치 50퍼센트 하락!

이 상태로 수십 마리의 메두사들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건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리드는 아직까지도 말락서스의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서 멀쩡한 메두사들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 갓 핸드! 노에! 랜디! 템빨골!!”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리드가 황급히 망토를 벗어던지며 펫을 소환했다. 오래간만에 외출한 노에와 랜디가 그에게 반갑다고 인사하기도 전이었다.

“나 도망 다닐 동안 몸빵 좀 해 봐!!”

“.....”

지옥제일 마수 멤피스의 학습 능력은 무척 뛰어나다. 한때 입에 욕을 달고 살던 그리드를 섬기다 보니 다양한 욕을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노에가 욕을 사용한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다. 고귀한 자신이 체통도 잊고 저급한 욕설을 지껄여야할 정도로 열 받는 상대를 만나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이 순간 만나고 말았다.

“그것 참 빌어먹을 주인 놈이다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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