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39화 (534/1,794)

템빨 33권 - 15화

덜컥.

혜성 그룹 회심의 역작,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뚜껑이 조용히 열린다.

안에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신영우였다.

‘검호 시절의 피아로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네.’

과거, 피아로는 자신이 오러를 버리고 검기를 둘렀다고 표현했던 바 있다.

무슨 무협지마냥 추상적인 대사였던 탓에, 당시의 그리드는 속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때 당시 피아로는 검기라는 새로운 자원을 획득했던 거야. 하지만 NPC인 그의 입장에서는 특수 자원의 개념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웠겠지.’

굳이 오러를 버린 이유까지는 확실히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유추할 수는 있었다.

‘검기를 자원으로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이, 오러를 방출하는 계열의 스킬의 위력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걸 수도.’

개인마다 스킬은 다르게 마련.

피아로의 경우엔 오러 관련 스킬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 맹점에 발목을 붙잡혀서 검성이 되지 못한 걸 수도 있고.

“후욱. 후욱.”

의심의 흐름 속에서도 영우는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캡슐에 갇혀있던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이어서 팔 굽혀 펴기와 풀업을 백 회 이상씩 반복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영우가 6시간마다 로그아웃하는 이유, 단지 식사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고 이렇듯 활력을 유지하려는 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에 운동조차 안 했으면.’

안 그래도 돌 같은 머리 더 굳었을 테고, 거울을 볼 때마다 더 좌절했을 터다. 운동을 할 때마다 정신이 맑아지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분출되었으므로 영우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내가 검기에 접근하는 방법은 현재로써 2개야.’

운동 후 샤워를 마친 영우.

점심으로 짜장면 곱빼기를 배달시킨 그가 맨 몸에 가디건만 걸치고 정원 연못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연못에 비치는 그의 단련 된 몸은 운동선수들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멋졌고,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은 배우를 연상시킬 정도로 요염했다.

‘첫째는 투기로 검기를 대체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

이 경우 스틱세이에게 의지해야한다.

그가 투기의 활용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현자가 아닌가. 단서를 찾는 방법 정도는 알려줄 수도 있다.

‘둘째는 피아로나 아스모펠에게 검술을 사사하는 것.’

아예 그냥 수련을 통해서 검호의 칭호를 쟁취해버리는 방법이다.

크리스는 검호가 검사 계열 직업군 고유의 칭호인 것으로 확신하는 눈치였으나,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왜?

파그마가 바로 검호였으니까.

‘대장장이이며 검호....’

파그마가 가능했던 일이라면 나 또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드는 믿음을 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검호가 되기보다는 투기를 활용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크리스의 말에 따르면, 검기란 검호가 되고나서도 일정 경지까지 성장해야 개방되는 자원인 듯 했으니까.

즉, 검호가 된다고 해서 무조건 검기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검호 되겠답시고 검술 배우고 관련 퀘스트 진행하다 보면 또 몇 년 걸릴라.’

브라함의 영혼과 함께한지도 어느덧 2년-Satisfy 시간 기준-이 다 돼가고 있다. 한데 아직도 사용 가능한 마법은 몇 개 없다.

자신의 직업군과 동떨어진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만큼 장시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애초에 나는 지금 당장 십만대적검을 사용하고 싶어.’

개고생해서 얻은 히든 스킬이다. 기껏 힘들게 얻어 놓고서 방관할 수밖에 없다는 건 고역이었다.

‘되도록이면 국가대항전 전까지는 스킬을 활성화시키고 싶다.’

그리드는 오래간만에 만난 크리스를 보고 상기했다.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 또한 성장하고 있음을.

국가대항전에서 보다 완벽하게 활약하고 싶었던 그리드는 기왕지사 더 강해지길 원했다.

그렇다.

그리드는 제3차 국가대항전에 참가하겠다는 결정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선전 효과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템빨왕의 위엄을 수시로 각인시켜야지만 템빨국에 인재가 더 빠르게 모여들 테니까.’

다음 국가대항전에서는.

‘활약은 기본이고, 근엄해 보이게끔 맨날 무게 잡고 다녀야지.’

다짐하는 신영우.

그는 아직 몰랐다.

인터넷에 <그리드 중2병 걸린 장면.avi>라는 동영상 파일이 떠돌고 있음을....

***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된 그리드!

그의 팬카페 회원수는 이제 백만 단위를 넘어가고 있다.

그만큼 그리드를 동경하고 아끼는 사람이 많았고, 개중에는 스토커 기질이 다분한 극성 팬도 일부 있었다.

그리드를 가까이서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템빨국 궁전에 시녀로 취직한 여성 플레이어가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녀가 범인이었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궁전에 나타난 그리드를 발견한 즉시 동영상 녹화 모드를 실행시켰고, 바로 그때 그리드가 십만대군 학살검을 외쳤다.

“하악, 하악. 그리드 전하 너무 귀여워.”

수영선수처럼 넓은 등과 어깨.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콧대.

저토록 사내다운 사내가, 어찌 하는 행동은 저리도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울까?

20대 초반 여성 ‘민’은 나무 앞에 서서 십만대군 학살검!을 외치는 그리드 동영상을 벌써 몇 회나 반복 재생 중이다.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동영상을 다른 팬들과 공유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귀여운 그리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였다.

하여, 그녀는 결국 그리드 팬카페에 동영상을 업로드 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리드가 십만대군 학살검을 외치는 동영상이 그리드 팬카페 회원들에 의해서 각종 SNS와 각국 커뮤니티로 퍼 날라지기 시작했다.

-십만대군 학살검ㅋㅋㅋㅋㅋ미친 거 아니냐ㅋㅋㅋㅋㅋ

-망상 속에서 십만대군 학살 중...

-아니, 아무리 망상이라도 정도가 있죠. 네이밍 센스 너무 수준 낮은 거 아닙니까? 무슨 초딩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저런 유치한 스킬 이름을 상상할 수 있는 거죠? 그리드 정신 연령 낮은 거 아님?

-어휴, 진지충. 거기서 또 무슨 정신 연령이 나와. 혼자 있을 땐 좀 저러고 놀 수도 있는 거지.

-방송에서 보던 모습이랑 괴리감이 너무 커서 그렇죠. 방송에선 폼 엄청 잡으면서 사실은 저런 중2병 환자였다는 게 웃김.

-중2병이면 어떰? 그리드가 너보다 백만 배는 잘났고 잘 살고 있는데.

-난 지금 저 동영상이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웃긴다. 그리드가 중2병인 걸 다들 이제야 알았단 말이야? 애초에 그리드가 정상인이었으면 템빨단, 템빨국, 템빨왕이라는 이름을 지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너희들 다 바보냐??

-......

십만대군 학살검이라는 스킬의 실존여부를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그리드의 네이밍 센스를 왈가왈부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리드 팬카페 회원들처럼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동영상을 즐기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그리드가 그간 보여준 업적이 워낙 다양한 바, 무조건적으로 그리드를 시기하고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지극히 드문 것이다.

***

다양한 기후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반도, 루반나.

이미 2백 년 전에 사하란 제국령이 되고 말았지만, 루반나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무패왕 마드라가 서거하기 전까지 약 반천 년 동안 독립국으로 존재해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여 루반나인들은 고통스러웠다.

제국 본토인들의 차별과 제국이 강요하는 왜곡 된 교육.

루반나인들은 지난 2백 년 동안 계속해서 억압을 받아왔고, 이로 인해 제국에 큰 불만이 쌓인 상태였다.

이때 무패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외쳤다.

내가 너희들을 해방시켜주겠노라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루반나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외침이었다.

루반나인들은 무패왕의 후예에게 호응하였고,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립운동이다.

루반나인들은 더 이상 차별을 받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제국은 그들의 자유의사를 용납하지 않았고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무패왕의 후예가 맞섰다.

“허억.... 허억....”

오아시스.

Satisfy가 오픈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플레이해온 초창기 유저다. 늘 1,000만등대 랭킹을 유지해왔다.

20억 명 중 1,000만등.

분명 높은 순위다.

하지만 어디 가서 자랑하기에는 애매한 수준인 것도 사실이었다.

평범함과 준수함의 딱 중간에 놓여있는 인물, 그것이 바로 오아시스였다.

물론 오아시스 본인도 그 사실을 자각했다. 그는 스스로가 비범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그에게 크라우젤이나 그리드 같은 유명 인사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에게도 크라우젤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면.

나에게도 그리드 같은 행운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망이 있었다면.

정말이지 몇 번이나 바라고 꿈꾸었는지 모른다.

소년만화의 주인공이 으레 그렇듯.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오아시스 또한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그의 일상은 늘 평범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워낙 소심한 성격 탓에 늘 신중했고, 그렇기에 승산 없는 싸움은 무조건 피해왔던 오아시스.

2차 전직 이후 단 한 번도 패배한적 없고 심지어 사망한적 없던 그가 루반나에 찾아왔을 때 발견한 것은 무패왕의 유물이었다.

낡은 칼집.

무패왕의 자아가 일부 깃들어있는 에고 아이템이었다.

-패자(霸者)의 기운도, 패자(敗者)의 기운도 없다라. 어찌됐든 너 또한 무패로구나. 제법 흥미롭고 궁금하도다. 종국에 너는 어떤 패자가 될까? 짐과 함께 확인해보지 않겠느냐.

무패왕 마드라.

평생을 루반나 안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다른 전설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인물.

그에게 선택 받은 순간, 오아시스는 웃고 말았다.

‘나도 참. 평범한 놈답게 전설 중에서도 제일 무난해 보이는 사람한테 선택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어쨌든 이는 오아시스에게 일대의 기회였다.

나 또한 전설이 된다면.

머나먼 곳에서 그저 숨죽인 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크라우젤, 그리드 같은 지존들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나 또한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오아시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무패왕의 낡은 칼집을 공손히 받들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를 패자(霸者)로 만들어주십시오.”

패자(霸者)가 되어 보이겠다.

크라우젤이나 그리드 같은 사내들이었다면, 이렇듯 당당히 외쳤을 터.

하지만 오아시스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가 그리 당당히 외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간절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약 1년이라는 장시간 퀘스트를 진행한 끝에 마주할 수 있었던 무패왕의 낡은 칼집.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한 기회이건만, 오아시스는 자각하지 못했다. 나처럼 평범한 놈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오다니, 순전히 행운이라 믿었고 이 행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결과, 그는 칼집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발생한 <무패왕의 후예>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게 됐다.

무려 사하란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늘 안전한 곳으로 숨어만 다녔던 그가. 위험한 모험과 퀘스트는 늘 포기해왔던 그가.

꿈과 희망을 품었다.

이 모험 끝에 자신 또한 주인공이 될 거라는 꿈과 희망을.

하지만 머잖아 깨달았다.

‘꿈은 꿈일 뿐...’

쿠당탕탕!!

시야가 붉게 점멸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오아시스는 적기사들과 더 이상 대적하지 못했다. <무패왕의 후예 후보>가 되고 얻은 열화판 초감각과 상태이상 저항 패시브 효과는 여전히 발휘되고 있었으나 체력과 정신력은 진즉에 한계였다. 퀘스트 진행 특혜로 받은 <스태미나 무한>효과와 <스탯 10배 상승>효과가 무색하다.

‘내가 2차 전직한 이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저 도망 다녔기 때문이다.

무패왕 마드라처럼 시련과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내게는...’

자격이 없다.

욱씬!

지독한 현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오아시스의 가슴이 옥죄인다. 가슴 속 깊이 품었던 꿈이 산산조각난다.

수천 명의 제국군에게 둘러싸인 채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가 다가왔다.

무표정하나 아름다운 청발의 여인.

본래의 오아시스였다면, 평생 대면할 기회조차 없었을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녀가 오아시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일말의 감흥조차 없었다.

“당신을 끝으로 반란군은 모두 제압하였어요. 데뷔와 동시에 패배한 당신은 무패왕의 후예를 자처할 자격을 상실한 셈이네요.”

“.....애초에 자격은 없었습니다.”

오아시스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실로 오래간만에 마주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무패왕의 후예가 될 기회를 놓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저 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순간.

“여어, 아가씨. 오래간만이야?”

오아시스의 귓가로 웬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깃든 힘이 어찌나 큰지, 수천 병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할 정도였다.

오아시스 또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군신...?”

아레스.

크라우젤, 그리드와 마찬지로 세상의 중심에서 활약 중인 또 다른 주인공.

그가 전장에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베이비 무패왕은 내가 데려가야겠어.”

“누구 마음대로...!”

메르세데스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들고 급기야 멋대로 나라까지 세운 아레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당장 검을 뽑아드는 그녀의 좌우로 스캇과 럭이 나타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각자가 자랑하는 궁극기를 쏘았다.

틈을 놓칠 아레스가 아니었다.

발할라의 5만대군 전부를 이끌어온 그.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 지금의 그는 위명대로 군신 그 자체였다. 군대의 선두에서 제국군을 돌파하고 오아시스에게 달려와 손을 뻗었다.

“무패왕도 튀어야할 땐 튀었을 걸? 그러니까 무패왕이었겠지! 안 그래? 껄껄!!”

“.....”

거대한 말에 탑승해있는 아레스의 풍체는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거인처럼 커보였다.

이것이 주인공의 존재감인가.

전율한 오아시스가 아레스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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