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13화
“독서의 기쁨을 아는 자는 재난에 맞설 방편을 얻은 것이다.”
이와 같은 구절이 있듯이, Satisfy에서 또한 독서는 가치 높은 취미로 분류된다.
플레이어는 독서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각종 스탯의 상승효과를 누릴 수 있었으며, 때때로 서적 속 단서를 쫓아 퀘스트나 스킬을 얻을 수도 있었다.
설령 아무 것도 얻지 못할지언정 순간의 즐거움에 심취할 수 있었으니, 독서는 무조건 득이다.
특히 Satisfy는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만큼 서적의 보유량도 어마어마했다.
‘Satisfy에 접속해 있는 내내 책만 읽는 미친놈이 있다’라는 소문의 주인공조차도 아직 Satisfy의 서적 중 극히 일부밖에 접하지 못한 것이 현실일 정도였다.
물론, 그리드와는 거리가 먼 세상의 이야기다.
이해력이 보통 사람보다 다소 부족한 그리드의 입장에서 도서란 너무 과분한 취미였고 자연히 서적을 멀리해 왔다.
하지만 지금.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
“.....”
템빨궁 내에 위치한 왕족 전용 서재.
평소 아이린과 로드가 애용하는 그곳에 자리 잡고 앉은 그리드가 한 권의 서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읽는 책이지?’
작년, 혜성 그룹으로부터 선물 받은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설명서를 읽어본 이후 처음 같다.
“으음... 일기장 내용이 난해할 리는 없겠지.”
전자 기기 사용 설명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세세하게 읽는 사람, 세상에 무척 드물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모른다.
부족한 재능에 대한 강박 탓에, 독서조차도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그였다. 그가 독서를 ‘노동’으로 인식하는 이유이며, 교육 서적도 아닌 고작 남의 일기장 펼치기를 긴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후, 좋아.”
그리드가 심호흡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마드라의 일기장을 완독할 때까지 집중력을 놓치지 않기 위한 물밑 작업이었다.
‘뭐, 고작 일기장 훔쳐보는 거로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은 적겠지만. 기왕 하는 거 열심히 해야지.’
무려 100만 도전자 포인트를 지불하고 구매한 일기장에 대한 그리드의 기대감은 의외로 한없이 적었다.
근거야 있다.
우리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리드가 번헨 열도에서 얻은 마드라의 일기장, 정확히 말하면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이다.
무패왕 시절의 마드라. 즉, 생전의 마드라가 작성한 일기장이 아니라,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이후의 마드라가 작성한 일기장이라는 뜻이다.
데스나이트가 된 후 100년 넘도록 섬에 갇혀있던 마드라가 작성한 일기장에 딱히 특별한 내용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그리드는 할 수 없었고 이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펄럭-
드디어.
그리드가 마드라의 일기장 첫 장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리드가 마주한 것은 일기장에 나열되어 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자연히 눈이 닫히면서 찾아오는 어둠, 거기에 이어지는 것은 타인의 시선과 감각, 감정이다.
“큭....!”
간접 체험 아이템.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의 정체였다.
일기장을 펼침과 동시에 그리드는 마드라가 되었다.
***
첫째 장.
다시 눈을 떴을 때, 가장 기이했던 것은 스스로의 호흡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래, 짐은 죽었다.
한데 어찌 다시 눈을 뜬 게지?
혼란하다.
.....혼란?
짐이 혼란을 느낀다고?
이 무패왕 마드라의 인지능력이 범인의 수준으로 추락했단 말인가?
기이하도다.
설마, 지금 짐은 꿈속을 헤매는 것인가. 처음부터 나는 죽지 않았던 것이고, 그저 기나긴 악몽에 잠겨 있었을 뿐인가.
아니.
절그럭.
....지독한 현실이로다.
이마 위로 손을 얹으려다가 목격하고 말았다.
짐의 육신, 그저 뼈다.
늘 뜨겁게 끓어오르던 붉은 피, 결코 끊어지지 않았던 근육, 창칼에도 베이지 않던 살과 피부.
모든 게 벗겨 나가 사라진 상태이다.
아아, 기억난다.
짐은 죽었다.
혈육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잘린 수급은 사하란의 짐승들에게 욕보였다.
허면, 이 머리는 당최 누구의 것이지?
모든 게 낯설다.
텅 빈 골로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억의 총량을 담을 수 없다. 생각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혼란이라는 낯선 감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때.
저벅.
현 사태의 원흉이 나타났다.
여인처럼 곱상한 얼굴을 지닌 사내.
짐은 이자를 알고 있다.
화공(火公)이라는 이명에 어울리지 않게도 차가운 눈빛을 지닌 사내인지라 기억에 남았다.
““파...그마....””
간신히 입을 열자 들려오는 짐의 음성, 깊은 굴속에 울리는 날짐승의 포효처럼 메아리친다. 스스로 듣기에도 거북한 음성이다.
불쾌해하고 있노라니, 화공이 깊이 허리를 숙여 왔다.
“무패왕이여, 세계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소서.”
***
“....으으윽!!”
일기장 첫 장의 내용이 끝난 순간.
번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현실로 돌아왔다.
데스나이트로 부활한 직후의 마드라가 느꼈던 혼란, 분노, 원망, 슬픔.
그 모든 암울한 감정을 마드라의 입장에서 고스란히 체험한 그리드이다.
그가 정신적으로 받은 충격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떨리는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는 그의 전신이 온통 땀에 절어 있었다.
“끄으...! 크흣!!”
털썩!
의자로부터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은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지켜 온 백성들에게 저주 받고, 친아들에게 심장을 찔려 죽고, 죽어서는 목이 베여 제국민들에게 욕보이고, 썩어 문드러진 시신은 관 속에 들어가지 못한 채 황량한 사막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목격한 자신의 몸은 해골이었으니, 절망에 이어지는 것은 오로지 절망이다.
“허억.... 허억....”
나는 그리드인가, 마드라인가?
짧으면서도 영원 같았던 마드라의 기억을 체험한 후유증으로 그리드는 끔찍한 혼란에 휩싸였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닦아 내며 연신 거친 호흡을 뱉는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시야는 연신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주의★ 일기장 속 마드라와 동화되어 그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한 상태입니다. 심리적으로 큰 불안과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시스템이 당신의 뇌파와 맥박을 체크합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할 경우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을 봉인합니다.]
“질...까보냐!”
몰입도 높은 가상현실은 종종 플레이어를 위험에 빠뜨리곤 한다.
어느덧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후로이와의 첫 만남.
당시의 일을 강렬히 기억하고 있는 그리드였기에 시스템이 보내는 경고 메시지가 생소하지 않았다. 과장되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
힘들게 꺾은 마드라가 남겨 준 유품을 이대로 사장시킬 생각 따위, 그리드는 추호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그친 그가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마드라가 아니라 그리드임을, 그리드이기에 앞서서 신영우임을 자각한다.
두근! 두근! 두근....
미친 듯이 날뛰던 심장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혼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당신의 바이탈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였음을 확인합니다.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의 둘째 장이 펼쳐집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당연...!”
그리드의 두려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마드라의 입장을 체험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는 벌써부터 끔찍하여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시련과 마주하였을 때, 단지 두렵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포기하는 것은 평생의 후회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마드라의 일기장 2번째 장을 펼쳤다.
***
둘째 장.
“무패왕이여, 세계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소서.”
길게 늘어진 흑발과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
길게 찢어진 눈매에 담긴 눈동자가 무감정하리마치 차갑다.
전설의 대장장이, 화공 파그마는 마드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드는 마드라다.
““짐에게 희생하라고?””
심히 불쾌하도다.
의지와 상관없이 언데드로 부활한 직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올라오는 불안과 두려움을 표출할 틈도 없이 희생을 강요받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설명을 듣기도 전에 말이다.
““이토록 큰 분노를 느끼는 건 실로 오래간만이로구나.””
지금의 화공은 증오해야 할 대상임을, 짐은 직감했다.
절컥.
오로지 뼈만으로 이루어진 육신을 간신히 일으켜 본다.
낯설다.
하지만 확실히 깨닫는다.
이것이 지금의 짐이다.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더냐.””
정황상, 짐을 부활시킨 장본인은 화공임이 틀림없다.
당장에 때려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
왜.
놈이 무엇 때문에 짐을 부활시킨 것이며, 놈이 말하는 희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은 알아야만 한다.
들려오는 대답은 허망했다.
“대악마들이 이곳 번헨 열도로 침공해 오고 있습니다.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번헨 열도는 계승의 장이며 명예의 전당입니다. 이곳이 혹 악마들의 손아귀에 떨어질 경우 인류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하니 지켜야합니다.”
““인류의 미래....””
짐이 논할 문제가 아니다.
짐이 책임져야할 미래는 오로지 내 백성들의 미래였다. 그 외의 것에는 관심 없다.
그렇기에 더욱더 화가 치민다.
““...그런가. 그대는 짐에게 이곳을 지키랍시고 짐을 언데드로 부활시킨 것이더냐? 시시하도다...! 괘씸하도다! 감히 그딴 이유로 짐을 능멸하다니!! 네놈은 백번 죽어 마땅하다!!””
***
“커윽....!!”
분노에 휩싸인 마드라가 포효하며 검을 뽑음과 동시였다.
그리드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간접 체험의 끝이었다.
그리드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웠다.
뼈밖에 없는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쥘 때 느껴졌던 그 무딘 감각, 현실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져서 섬뜩하다.
‘너무 생생하잖아.’
언데드가 되는 일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다.
생각하며 꿀꺽, 마른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현재 당신의 능력으로는 마드라의 검술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하여 일기장의 둘째 장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
의미심장한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일기장의 둘째 장을 마저 읽기 위해서는 마드라의 검술을 습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검술 교본:십만대적검>을 획득하였습니다.]
[십만대적검을 습득할 때까지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일기장이 봉인됩니다.]
“뭐....!”
마드라의 검술 교본이라고?
상상도 못했던 보상이 아닌가!
‘심지어 일기는 이제 막 둘째 장을 읽었을 뿐인데!’
경악한 그리드가 검술 교본을 확인했다.
<검술 교본:십만대적>
등급:레전드리
마드라의 기초 검술이 기록된 교본입니다. 단, 마드라가 데스나이트가 된 이후에 사용한 검술을 기록한 교본이므로 원본에 비하면 내용이 미약합니다.
<십만대군 봉쇄검(열화판)>과 <십만대군 학살검(열화판)> 단 2개의 검술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습득 조건:마드라의 인정을 받은 자.
“마드라....!”
그리드의 피가 끓어오른다.
일기 안에서 만큼은 파그마와 적대하게 되었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존경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강자가 자신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감격할 따름이다.
“당신이 남긴 유산... 내가 앞으로 평생 소중하게 사용하겠어.”
대악마 벨리알 레이드 당시, 검성이 된 크라우젤의 저력을 목격했을 때부터 그리드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었다.
크라우젤은 레벨이 아직 한참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갈랐으니까.
그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계속, 쉬지 않고 성장해야함을 그리드는 여실히 깨달았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다.
조용히 덮인 마드라의 낡은 일기장을 품에 안은 그리드가 결심해 보였다.
“무패왕의 위대함, 내가 세상에 알린다.”
진정한 무패왕의 검술은 무패왕의 후예가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테지만, 최소한 무패왕의 ‘의지’만큼은 자신이 잇게 될 거라는 예감이 그리드를 엄습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사하란 제국령 루반나.
“저게 무패왕의 후예? 시시하군요.”
반란군 진압 현장에 원군으로 도착한 메르세데스가 콧방귀 뀌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투영되는 옥빛 갑주의 사내,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허덕이고 있었다.
제국의 정규군을 상대로 몇 주나 분투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으나 딱 거기까지다. 결국 역사를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무패왕이라는 존재가 별거 아니었겠죠. 역사는 과장되게 마련이니까.”
메르세데스의 조소가 땅에 스며든다.
지하의 마드라를 조롱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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