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12화
『번헨 열도를 공략한 그리드가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S.A그룹 측에서 제3회 국가대항전의 새로운 규칙을 공표하였습니다.』
『충격적인 발표였죠. 덕분에 그리드에게 집중돼 있던 사람들의 관심이 분산되었네요.』
『이건 음모입니다, 음모! 새로운 규칙이랍시고 내놓은 것이 우리 대한민국에게 너무 불리하지 않습니까! 이건 대놓고 한국을 저격한 셈이나 다름이 없어요! S.A그룹의 이번 처사는 국가 차원에서 비판해야 마땅합니다!!』
포식이불족발 해남점.
우적우적, 한돈으로 만든 족발을 씹어 먹는 극검의 미간에 내 천 자가 그려진다. 뉴스를 보고 있노라니 화가 뻗쳐 미칠 노릇이었다.
“S.A 매국노 새뀌덜... 올해 국가대항전을 석 달이나 미룬다 싶더니만 뭣 같은 규칙을 만드느라 그랬다 이거지?”
이미 오래전에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매김한 올림픽 또한, 수백 년 전 처음 개최되었을 당시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엽기적인 종목과 규칙들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회가 거듭되고 세월이 흐르면서 축적된 노하우를 토대로, 현재 올림픽은 공정한 규칙을 완벽에 가깝게 적용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막 3회차를 앞둔 Satisfy 국가대항전 또한 언젠가는 올림픽처럼 완벽한 시스템을 갖출 여지가 있다는 뜻이며, 현재 시스템은 불완전하다는 말이 된다.
가장 기본적인 규칙조차도 매해 변경돼서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의 혼란을 야기할 정도였다.
우선 제1회 국가대항전은 참가국이 17개로 한정되었으며, 각국의 선수들은 각 3개의 종목에 참여해야 할 의무를 가졌었다.
반면 제2회 국가대항전은 참가국이 32개로 확장되었으며 각국의 선수들이 개인전 3개 종목과 단체전 3개 종목, 총 6개 종목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가졌다.
한데 앞으로 3달 뒤로 예정된 제3회 국가대항전은 참가국이 50개로 대폭 확장되었고 각국 선수들이 개인전과 단체전을 포함해서 총 2개 종목밖에 참가할 수 없게 된단다.
여기서 문제는 참가국이 늘어난 부분이 아니다.
참가국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대항전의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뜻이며, 각국 플레이어 간의 격차가 좁혀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문제는 개인당 참여 종목이 2개로 한정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앞으로 국가대항전 1위국은 유저 풀이 넓은 미국으로 결정된 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이고.
왜?
제1회 국가대항전과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한국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상위권 성적을 거둘 수 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쉽다.
오로지 그리드 한 명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리드가 다량으로 확보한 금메달이 한국의 순위를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됐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날아다녀 봤자 혼자서는 결국 2개 금메달밖에 확보하지 못하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리드 1인에게 의지해 온 한국 입장에선 앞으로 국가대항전 상위권을 꿈도 꿀 수 없게 됐다.
“심지어 종목이 20개로 대폭 늘어난다던데... 어휴.”
극검의 한숨이 깊어진다.
그는 대다수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음모론을 재기하고 있었다.
“S.A그룹에 미국 자금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아. Satisfy 최강국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도 매번 우리 대한민국에게 위협받는 게 두려워서 규칙을 개정한 걸 거야.”
“애초에 그리드 한 명에게만 의존해 온 한국이 무능한 거 아닌가? 그리드 없이는 금메달을 딸 수 없다? 결국 금메달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말과 뭐가 다르지? 앞으로 국가대항전에서 한국이 하위권에 머물게 되더라도 그건 자업자득. 남 탓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막국수를 내온 포식이불족발의 태클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포식이불족발의 말이 옳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리드 한 명 덕분에 국가대항전 상위권에 올랐던 한국이 비정상적이었던 거다. 실제로도 비난이 빗발쳤고, 그 탓에 제3회 국가대항전의 규칙이 변경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극검에게도 반박할 여지는 있었다.
“분명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는 건 슬픈 일이지. 하지만 주최 측에서 그 한 사람을 견제한답시고 룰을 바꾸는 것도 웃긴 일 아닌가? 생각해 보게. 브라질과 독일,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등이 축구를 잘하고 그들이 월드컵 우승컵을 독차지해 왔다고 해서 그들에게 불리한 축구 룰이 만들어진 경우가 있던가?”
“....아니, 축구는 경우가 다르지.”
극검이 황당한 예시를 들자 포식이불족발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극검은 개의치 않고 주장을 계속해나갔다.
“반면 태권도와 E-스포츠는 어땠지? 한국이 각종 대회에서 메달과 우승을 독점한단 이유로 한국인들에게 불리한 룰을 채택하고 한국을 견제해 왔어! 이게 과연 합당한가!! 전 세계가 우리 대한민국을 왕따시키고 있다고!!”
“......”
포식이불족발 또한 결국 한국인이다. 극검의 주장이 100퍼센트 공감되지는 않았으나 그 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전 2회의 국가대항전에서 세상 사람 모두가 한국을 원망하고 비난했다. 자격도 없는 주제에, 오로지 그리드 한 명 덕분에 대량의 금메달을 확보했던 한국을 곱게 볼 나라가 있을 리 만무하다.
만약, 앞으로도 국가대항전이 그리드 한 사람에게 좌지우지된다면, Satisfy 국가대항전은 공신력을 상실하고 마이너 대회로 전락할 가능성이 컸다.
“이 부분은 극검 당신이 이해해야지. 당신이 한국인이 아니었어도 과연 지금처럼 말할 수 있었을까?”
“.....”
“Satisfy 국가대항전은 규모가 크지만 아직 신생 대회에 불과해. 지금 당장은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것들도 결국 나중을 위한 발판이 될 거야. 해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대회로 발전하겠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블러드 카니발을 조직하고 운영했던 포식이불족발이다.
그의 기본 성향을 고려해 봤을 때 이런 대사는 어울리지 않다.
하지만 포식이불족발은 변해 가고 있었다.
최근 매주 찾아오고 있는 극검과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오로지 족발과 게임 내 자신의 성장밖에 관심이 없던 포식이불족발이 이제는 남을 위로할 줄도 알게 됐다. 극검의 정감 넘치는 성격이 그는 은연중에 마음에 들었다.
“그만 속상해 하고 소주나 더 들어.”
쪼르르.
포식이불족발이 극검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줬다.
이를 받아 입속에 털어 넘긴 극검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포식이불족발, 나는 자네 같은 사람이 원망스러워. 사람들은 한국이 Satisfy 약소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떨까? 비공식 랭커 중에 유난히 한국인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중에 한 명이 바로 포식이불족발 자네고.”
“.....”
“오로지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 음지에 숨어 지내 왔던 자네들 다크 게이머가, 최소한 국가대항전에서만큼은 양지로 나와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 줬다면. 만약 그랬다면 우리 대한민국 또한 지금쯤 저 미국이나 캐나다처럼 Satisfy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게야. 대한민국인 모두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어떻지? 플레이어 중에서 순수한 의도로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 준 사람은 오로지 그리드와 유라밖에 없네.”
극검은 제1회 국가대항전에 참가하지 않은 자기 자신 또한 원망하고 있었다.
제1회 국가대항전 당시 자신은 어떠했던가?
자신의 전력을 만천하에 공개해야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어차피 내가 대회에 출전해 봤자 변하는 건 없다고 자위하며 국가대항전을 외면했었다.
반면 그리드와 유라는 페널티를 감수하면서까지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어디까지나 극검의 주관적인 해석- 특히 파그마의 후예라는 점을 제외하면 무명에 가까웠던 그리드가 제1회 국가대항전에 등장해서 실력을 온전히 드러냈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충격적이었다.
“자네 또한 나처럼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 부디 제3회 국가대항전에는 출전하여 대한민국의 인재는 그리드와 유라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 줬으면 좋겠어. 제아무리 국가대항전의 룰을 바꿔 봤자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을 잠재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각인시켜 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어느새 족발 중(中)자를 절반 이상 먹은 극검이었다. 서비스로 나온 막국수를 비비기 시작하는 그에게 포식이불족발이 질문했다.
“당신은 나를 템빨단에 섭외하기 위해서 접근해 온 게 아니었나? 한데 이제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싸우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어울려 줘야 할지 모르겠군.”
본래 의도를 망각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다.
포식이불족발은 매주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오는 극검이 이제는 자신을 템빨단에 섭외하기보다 술친구쯤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오산이다.
극검은 본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단지 욕심쟁이일 뿐이었다.
“자네가 템빨단에 가입한다면 템빨단이 풍족해질 테고, 자네가 국가대항전에 참가한다면 대한민국이 풍족해질 테지. 내가 원하는 건 둘 다고.”
“결국 모든 장단에 맞추라고? 욕심 참 많구만?”
“물론 강요는 하지 않아. 내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선택은 자네 몫이겠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리든지 간에 나와 계속 술친구가 되어 줬으면 좋겠어. 자네가 썰어 주는 족발, 맛있거든.”
“흐음....”
극검이 따라주는 술잔을 받는 포식이불족발.
다방면으로 응용할 수 있는 던전 제작 능력을 지녔으며, 유라, 카츠, 수에론 등과 나란히 조건부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지녀도 손색없는 최고의 인재.
그가 깊은 사색에 잠겼다.
***
“영웅왕~ 영웅왕~~ 룰루랄라~~ 에고 소드 제작자~~~ 룰루랄라~~~”
“.....”
정말이지,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내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좌절하던 사내가 이제는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 비슷한 것을 부르고 있다니.
그리드를 지켜보는 스틱세이의 머리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저런 성격으로 대장일과 전투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군.’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할 줄 안다. 하지만 평상시의 그리드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당최 어찌 스스로를 제어하여 때때로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할 텐데....’
부족한 재능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라더니, 노력하는 능력이 특출한가 싶다.
너털웃음을 흘린 스틱세이가 매스 텔레포트를 전개했다.
***
“루반나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템빨국 수도 라인하르트.
서류 더미에 묻혀 있던 라우엘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병사가 건네 온 서신의 발신인은 <무패왕의 후예>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라우엘은 서신의 내용을 쉽게 유추했다.
‘전쟁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겠지.’
정답이었다.
스스로를 무패왕의 후예라고 자처하며 루반나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 그는 제국이 병력을 루반나에 집중시킨 이때 템빨국이 움직여 주길 바랐다.
템빨국과 제국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황인지라, 템빨국에도 좋은 제안일 거라는 믿음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걸 어쩌지.”
제국의 후방을 습격하여 시선을 분산시켜 달라는 무패왕의 후예의 요청.
라우엘은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무패왕의 후예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 파악도 안 된 상황이었고, 루반나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편에 서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서신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조금쯤은 흘릴 줄 알았는데 끝까지 철저히 숨기는군.”
실망스러운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라우엘이 그것을 인벤토리 구석에 구겨 넣는 순간이었다.
파앗-!
집무실 중앙에 빛이 번쩍이더니 그리드와 스틱세이가 나타났다.
“우앗! 놀라라!!”
조용한 방 안에 갑자기 사람이 둘씩이나 나타난 것이다. 놀라지 않으면 무딘 거다.
깜짝 놀라서 뒤로 나자빠지는 라우엘.
그에게 성큼 다가온 그리드가 커다란 손을 건넸다.
“엉덩방아 찧는 건 오버 아니야? 템빨국 재상이기에 앞서 명색이 하이 랭커인 양반께서 하체가 그리 부실하면 어떡해?”
“....통합 랭킹 3위에 등극하신 분 앞에서 감히 하이 랭커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굳은살 가득 배긴 그리드의 손을 맞잡고 일어나는 라우엘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드가 번헨 열도로 떠나 있었던 기간, 고작 열흘밖에 되지 않았으나 라우엘은 어찌 된 것이 그를 무척 오래간만에 보는 느낌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열흘 사이 그리드는 완전히 변해 있었으니까.
당장 레벨만 해도 10개 가까이 올랐고, 표정은 한층 더 성숙해졌으며, 몸에 두른 붉은 투기는 강렬함을 넘어서 초월적인 기운을 발산한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온 것 같다.
“이 무슨 경이적인 기운.... 전생에 봉인 당했던 힘의 일부를 드디어 되찾으신 겁니까?”
“하하하, 중2병 대사도 오래간만에 들으니까 반갑네.”
그리드 본인 또한 라우엘과의 재회를 오래간만이라 느끼고 있었다. 번헨 열도에서 하도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번헨 열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 열흘이 아니라 몇 달 동안 겪은 일 같았다.
“아이린 왕비님부터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짧은 인사 후, 곧바로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질문하자.
“아니, 서재에 갈 거다.”
웬 허름한 책자를 꺼내 흔들며 답하는 그리드였다.
“엥? 네? 서재요??”
라우엘이 두 귀를 의심했다.
그리드에게는 서재라는 공간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평상시에 그리드가 서재를 이용하는 모습, 라우엘은 단 한 번도 보고 들은 바 없다.
“.....”
후다닥! 뭐가 그리도 급한지 곧바로 떠나 버리는 그리드.
저럴 거면 왜 굳이 남의 집무실에 텔레포트 타고 온 건지, 황당해 하던 라우엘이 잠자코 서있는 스틱세이에게 질문했다.
“우리 전하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혹시 머리라도 다치신 건 아니죠?”
“.....”
그러게 평소에 책 좀 읽지.
서재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머리 다친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사는 그리드가 스틱세이는 측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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