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6화
검성은 최강의 전투 특화 클래스이다.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하였으며, 실제로 현재 크라우젤이 체감하고 있었다.
검성 크라우젤의 레벨은 259.
백의 검객 시절과 비교하면 무려 100레벨 가량이 낮았지만, 현재의 크라우젤이 백의 검객 시절의 크라우젤보다 몇 배는 더 강하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크라우젤에게는 더욱더 강해질 여지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리드와 유라가 그러하듯, 크라우젤 또한 아직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으니까.
특히 크라우젤의 전직 퀘스트 중 하나는 뮐러의 검술을 찾아 계승하는 것이었다. 역대 최강의 검성이었던 뮐러의 검술을 습득할 경우, 크라우젤의 전투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거부했다.
그는 뮐러와 아무런 접점 없이,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검성에 등극한 인물이다. 자존감 높은 그가 전대의 그늘에 자신의 명성이 묻히는 일을 원할 리 없다.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
대륙 제일 창, 키리누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대륙을 유랑하는 그가 3년에 한 번씩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
바로 사하란 제국 황후 아리아떼의 궁전이다.
하지만 아리아떼 황후는 햇수로 5년 전에 사망했다.
이제 키리누스가 찾는 곳은 아리아떼를 닮아 아름다웠던 궁전이 아닌, 쓸쓸한 묘지였다.
“이곳에서 기다리면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보았죠.”
흑발의 미청년 크라우젤이 키리누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를 보는 키리누스의 눈빛에는 이채가 실려 있었다.
“궁극의 검기를 둘렀다라.... 검의 극의를 엿본 자로군.”
“당신께서 창의 극의를 엿보았듯이 말이죠. 당신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습니다.”
“검의 극의를 엿본 자가 내게 가르침을 청한다라.... 이는 검술이 창술보다 못함을 시인하는 셈이로군.”
“아니요. 검술과 창술의 고하를 떠나서 저라는 인물이 당신보다 못할 뿐입니다. 지금은요.”
“‘지금은’이라.... 후에는 다를 거란 말인가.”
크라우젤의 전직 방법은 2개였다.
첫째는 앞서 언급했던 뮐러의 검술을 찾아 계승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각 분야 최고 경지에 오른 전사들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 300레벨도 안 된 크라우젤이 키리누스 등의 각 분야 강자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크라우젤은 3년 후를 기약하고 있었다.
“오늘 당신께 가르침을 받는 보답으로, 3년 후에는 제가 당신께 가르침을 드리도록 하지요.”
“핫...!”
키리누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궁극의 검기를 둘렀다고는 하나 아직 완숙하지 못한 풋내기 따위가 기고만장하게 지껄이자 황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개심을 품는 눈치는 아니었다. 도리어 호감을 느끼는 듯했다.
“내게 가르침을 준다라... 재미있군. 그럼 3년 후를 기대하며 가르침을 줘볼까?”
------!
소리조차 없다.
키리누스의 푸른 창은 점을 찍었을 뿐이다. 순백의 화선지 위에 점을 찍는 붓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크라우젤이 받는 충격은 강력했다. 키리누스의 창격을 방어한 크라우젤의 몸이 10미터나 날아갔다.
[충격이 너무 큽니다! 완벽한 방어에 실패하였습니다!]
[8,1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하지 못하다니?’
주르륵,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내며, 크라우젤은 확신했다.
‘역시, 각 분야 최강자들은 초감각 스킬을 보유한 게 분명하다.’
그들이 보유한 초감각 스킬이 검성처럼 패시브로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검호처럼 액티브로 발동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초감각을 보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이었다.
‘그리드, 지금 네가 마주하고 있는 적은 어떻지?’
이날.
크라우젤은 더 큰 세상을 보았고, 더 큰 열정을 품었다. 곁에서 관람하는 하오와 알렉산더 또한 마찬가지였다.
짧은 경험이 이들에게 선사한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
번헨 열도란 무엇인가?
월드 메시지가 떠오른 이후, 수많은 언론사들이 번헨 열도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정보를 입수하여 뉴스로 내보내야 특종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결과, 대중들은 비교적 빠르게 번헨 열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전설들을 위한 명예의 전당이자 계승의 장.
하지만 현재는 모종의 이유로 변질된 장소.
100위권 랭커들조차 고배를 마시게 만드는 극악 난이도의 인던이자, 몇 안 되는 서대륙 이동 수단.
소문에 의하면, 템빨단 최상위 랭커들과 교황 데미안조차도 번헨 열도의 공략에 실패하였다고 한다.
한데 그 누가?
도대체 그 누가 번헨 열도의 마지막 관문까지 도달했단 말인가!
이는 엄청난 화젯거리가 되었다.
전 세계 언론사들이 월드 메시지의 주인공을 추측하느라 소란을 피웠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후보로 크라우젤을 꼽았다.
벨토 왕국 전쟁에서 상식 바깥의 무위를 선보였던 그리드와 아그너스, 그리고 아레스 또한 후보군으로 거론됐지만 천외천 크라우젤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은 그들의 존재감을 압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크라우젤은 노말 클래스 전직자였을 당시에도 그리드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최강자인 바, 현재 검성으로 등극한 그보다 뛰어난 플레이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상상도 못하겠지.’
뉴스를 접한 템빨단원들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크라우젤은 이미 진즉에 번헨 열도 공략에 실패하였으며, 다름 아닌 그리드가 월드 메시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
머잖아 세상에 알려지면 또 얼마나 큰 소란이 발생할지 기대가 돼서 그들은 벌써부터 재밌었다.
템빨단원들 또한 모르는 것이다.
번헨 열도 공략의 파급력, 단지 재미로 끝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
[예순 여섯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당신의 활약에 찬사를 보냅니다.]
[마지막 남은 옛 영웅에게 안식을....]
“알림 창 한번 비장하네.”
마지막 남은 영웅이란 66번 섬의 수호자를 뜻한다. 그를 해치는 것을 안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건데, 데스나이트가 된 전대 전설들은 역시 고통받는 입장이라고 해석함이 옳다.
“으음...?”
66번 섬의 전경을 눈에 담은 그리드가 살짝 당황했다.
오로지 평평한 대지만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렇다.
66번 섬은 작은 돌멩이와 수풀조차 없는 무대였다. 적과 대면할 경우 숨을 곳도 없고, 지형지물에 의지할 수도 없는 완벽한 평지였다.
-얕은 수를 쓸 수 없는 장소로군.
브라함의 목소리를 들은 그리드가 확신을 품었다.
“순수한 전투력이 우선시 되는 무대.... 역시, 이곳의 주인은 마드라가 맞겠지?”
브라함이 긍정했다.
-그렇겠군. 놈은 천재적인 전략가이기에 앞서서 궁극의 무인이니까. 변수 없는 일대일 승부가 가능한 장소가 무인으로서의 놈에게는 최적일 테지. 애초에 놈의 지략이라면 어떤 지형에서든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만.
‘천재? 궁극? 완벽? 브라함이 이렇게까지 극찬하다니...?’
아무래도, 브라함의 마드라에 대한 평가는 뮐러, 무무드와 최소 동급 같다.
“...후우.”
그리드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두려워서?
그래.
도망치고 싶은가?
아니다.
그리드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선사할 정도의 상대와 싸울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도망치고 싶을 리 만무하다.
스틱세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 까무러칠 테지만, 최초의 왕 칭호를 획득하고 급격히 강해진 이후 지금까지 그리드는 전력으로 싸워 본 경험이 없다. 그럴만한 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번헨 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기사와는 싸워 보고 싶었지. 어차피 졌을 테지만.’
하지만 메르세데스와는 싸울 수 없었다. 만약 그녀와 싸웠다면 템빨국은 그 길로 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무패왕은 다르다.
그 어떤 외적인 요소도 개입되지 않는다. 오로지 보상만을 목표로 전력으로 싸워도 좋은 상대다.
‘여기서 내 실력을 제대로 파악해 놓으면 국가대항전에서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예년보다 일정이 늦게 잡힌 제3회 국가대항전.
앞으로 3달 후 개최될 그 축제에서 크라우젤과 싸워 이기는 것이 현재 그리드 최대의 목표 중 하나다.
그날을 완벽한 상태로 맞이할 수 있게끔, 그리드는 기꺼운 마음으로 강자를 대면했다.
저벅.
저벅저벅.
옥빛의 갑주를 무장한 데스나이트가 천천한 걸음으로 다가온다.
뼈밖에 없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걸음걸이에서 위풍이 느껴졌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검.... 궁극의 무인이라기에 다양한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더니 오직 검 한 자루만 무장했군.’
옥빛 갑주의 데스나이트 머리 위엔 <마드라>라는 이름이 금색으로 명확히 떠올라 있었다.
총장 1미터 정도의 평범한 롱 소드를 무장한 그, 일렁이는 보랏빛 안광으로 그리드를 위아래로 훑는다.
““100년 만에 나타난 손님은 인간인가. 어느 날 파그마가 죽고 짐의 힘이 약해졌다 싶더니, 대악마의 인계 침공은 진즉에 끝났나 보구나.””
“....!”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마드라가 이지를 갖췄을 가능성이 있다는 언질을 듣기는 했으나, 설마 인간처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수준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황하는 그에게 마드라가 질문했다.
““앞에 섬을 지키고 있던 반푼이들은 그대가 해치웠느냐?””
“...?”
앞에 섬을 지키고 있던 반푼이들?
반푼이가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대답했다.
“란스티어를 제외하면 제가 모두 안식을 주었습니다.”
““그런가...””
역시, 마드라가 말하는 반푼이란 전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를 뜻했다.
전대 전설들을 반푼이라고 칭하다니!
마드라는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이거 어쩌면 상상 이상인 거 아니야?’
긴장하며 히죽히죽 웃는 그리드였다.
여전히 그의 위아래를 훑고 있던 마드라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파그마의 잘못이지. 명색이 전설이라고는 하나 데스나이트로 전락한 놈들. 파그마가 죽고 힘의 공급이 끊어지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제법이로구나. 반푼이들이라고는 하나 인간의 몸으로 놈들을 해치고 올라오다니. 그대는 역시 당대의 전설.... 흐음?””
마드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드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검을 무장하였음에도 궁극의 검기를 두르지 못했고, 잡종 흡혈귀의 영혼을 품었음에도 시정잡배 수준의 마력밖에 보유하지 못하였는가?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위엄을 갖춘 자라...?””
이곳 66번째 섬까지 도달한 인간.
마드라는 그리드를 당대의 전설이라 보았다.
하지만 검성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었으며, 특별한 점이라고는 높은 위엄밖에 엿볼 수 없었으니 정확한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결국, 스스로는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던 마드라가 노골적으로 질문했다.
““세간에서는 그대를 뭐라 부르지?””
“세간에서라....”
세상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부를까?
신영우? 그리드? 파그마의 후예?
모두 맞지만, 그보다는 역시.
“템빨왕.... 템빨왕입니다.”
““템빨왕...? 호오, 왕이라!””
그리드의 대답을 들은 마드라가 커다란 흥미를 보였다.
자신 또한 왕으로서 활약하며 전설이 된 인물이었으니 그리드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이다.
““그래, 템빨이란 무엇을 상징하는 게지?””
나는 패배하지 않았기에 무패왕이라 불렸다.
눈앞의 인간은 무슨 연유로 템빨왕이라 불리었을까?
마치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호기심을 품은 채 대답을 기다리는 마드라.
템빨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하던 그리드가 갓 핸드를 소환했다.
하나같이 묠니르를 무장한 갓 핸드들이었다.
““호오...?””
스스로 움직이는 황금 손들을 보고 놀라는 무패왕 마드라에게 그리드가 설명했다.
“이와 같은 보구들의 힘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걸 바로 템빨이라고 하지요. 제가 템빨왕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적절히라고?
그리드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양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할 수준의 대사였다.
하지만 이곳엔 오로지 그리드와 브라함, 그리고 마드라밖에 없었다. 마드라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과연 그렇군. 보구의 힘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건가.... 음?””
끝까지 흥미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던 마드라 문득 눈살-정확히는 안광-을 찌푸렸다.
돌이켜 보면, 전설이라는 놈 치고 보구 없는 놈이 없었던 까닭이다. 즉, 전설은 모두 템빨이었고 그게 기본 소양이었다.
한데 눈앞의 인간은 그 기본 소양을 마치 자신만의 특출한 능력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짐이 조롱을 당했나 보구나. 뭐, 정체를 밝히기 싫다면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다. 싸움을 앞두고 자신의 능력이 발각되는 걸 꺼려하는 것은 합당하니까.””
아무래도 대화에 끝이 다가오는 듯했다.
““너의 목적은 이제 더 이상 쓸모없어진 번헨 열도의 정화이렸다. 정화하고 싶다면 짐을 쓰러뜨려 보거라. 데스나이트로서 내 존재 의의는 침입자의 격퇴. 싸움은 불가피하다. 또한.””
스파앗-!
““짐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패배한 경험이 없느니라. 단 한 번도.””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마드라의 음성이 바로 귓가에 들린다. 눈앞의 마드라는 홀연히 사라져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순간.
[11,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큭....!”
그리드는 옆구리를 크게 베였다.
양반 가람이 선보였던 최상위 보법, 순보를 데스나이트 마드라가 재현하고 있었다.
생전에 패배한 적 없어 무패왕이 되었고, 죽어서도 패배한 적 없기에 지금의 번헨 열도를 유지시키고 있는 존재.
데스나이트로 전락하여 쇠약해졌으며, 자신을 데스나이트로 만든 파그마가 사망한 이후 또 한 번 쇠약해졌다고 하나.
“십만대군 학살검.”
츠칵-!
츠카카카카카카카칵!!!
마드라의 위용은 여전했다.
파그마의 검무, 연(聯)보다 족히 2배 이상 빠른 검술이 그리드의 몸을 초당 40회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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