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3권 - 5화
“친아들에게 살해당하다니...”
말도 안 된다. 세상에 그런 참사가 존재할 리 없다.
공교롭게도, 이와 같이 부정하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참혹하다. 혈육끼리 서로를 해치는 사건은 역사에서도, 현대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한 것이었다.
‘하물며 고대의 권력가라면....’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리드는 오래전부터 노력가였다.
학창 시절의 그가 그나마 평균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해력보다는 암기력이 요구되는 과목에 집중했던 그는 의외로 역사에 해박했다.
친아들에게, 혹은 친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역사 속 권력가들과 마드라 부자를 겹쳐 본 그가 다짐했다.
“적어도 우리 템빨 왕조에서만큼은 그런 슬픈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내가 잘해야지....”
구체적으로 뭘 잘해야 한다는 건지는 그리드 본인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에 대해서 불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족을 아끼고 존중한다면 불화 따위 없으리라 믿었다.
‘우리 부모님과 세희가 나를 아껴주는 것처럼...’
생각하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그리드.
그에게 스틱세이가 초를 쳤다.
“라잔트라 왕자가 마드라를 해친 이유는 특별한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라잔트라 왕자의 회고록을 보면 그가 마드라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죠.”
“....?”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악감정 따위 없었다고?
한데 친아버지를 살해해?
그리드는 황당할 뿐이었다. 라산트라라는 놈이 무패왕 마드라를 어째서 살해했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스틱세이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드라는 자신이 영원토록 루반나를 수호할 수 있다고 믿었고, 라산트라 왕자는 마드라 역시 인간인지라 언젠가는 쇠약해 죽을 거란 사실을 알았죠.”
“근데?”
“라산트라 왕자는 마드라 사후의 일을 걱정했던 겁니다. 당시 마드라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제국을 자극하여 제국의 침공을 끊임없이 유발시켰고, 그 탓에 루반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에 휩쓸렸죠. 전쟁을 거듭할수록 마드라의 명성은 높아지는 반면 루반나의 백성들은 피폐해져갔습니다.”
“.....”
“라잔트라 왕자는 마드라에게 몇 번이나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루반나의 백성들을 위해서, 루반나의 미래를 위해서 제국과 화평을 맺자고요. 하지만 요청은 매번 묵살당했습니다. 마드라는 라잔트라 왕자를 겁쟁이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혐오하였죠.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마드라는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마드라가 말년이 되자 라잔트라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겠군...”
“맞습니다. 비단 라잔트라 왕자뿐만 아니라 사하란의 모든 귀족이, 기사가, 병사가, 백성이 초조함과 두려움에 떨었죠. 머잖아 마드라가 늙어 죽으면 루반나 또한 자연히 멸망할 거라고 생각한 그들은 라잔트라 왕자에게 애원하고 강요했습니다. 마드라의 목을 제국에 바치라고.”
“.....”
루반나 왕국이 사하란 제국 속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라잔트라 왕자는 아버지 마드라의 목을 제국에 바치는 대가로 루반나 왕가와 백성들의 목숨을 지켰다. 나라를 잃었을지언정 삶은 연명한 것이다.
이후 마드라의 수급은 제국 황도 타이탄의 성문에 1년이나 걸려 있었다고 한다.
“...불쌍하군.”
제국민들이 성문을 드나들 때마다 마드라의 수급에 침을 뱉었다고 하니, 그리드의 마음은 영 불편했다.
일생토록 조국을 수호하여 무패왕이라고 칭송받던 존재의 최후가 너무 허망하고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라잔트라 왕자와 루반나 백성들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물론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드라가 약자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인의 힘만 과신한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드라의 성격이 꽉 막히지만 않았어도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흐음.’
역사에 만약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나간 일이며 그 결과가 현재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나도 너무 힘에 심취하지 말자. 마드라를 반면교사로 삼자.’
찝찝한 마음을 털어 낸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66번 섬으로 이동하는 게이트에 꽂혀있었다.
“....가여운 망령에게 사상 첫 패배를 안겨주러 가보실까.”
‘뮐러는 역대 검성 중 최강’이었다는 소절, 플레이어들은 이미 수차례 접한 바 있다. 물론 그리드도 마찬가지다.
또한, 스틱세이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 번헨 열도는 전대 전설과 당대 전설을 잇는 계승의 장이었다고 한다.
말인 즉, 현재 플레이어가 알고 있는 전대 전설들 이전 세대에도 전설들은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그중에서도 검성, 마법사, 궁수, 어쌔신, 대장장이, 재단사, 광부 등 직업군으로 분류되는 전설들은 꽤 오랜 세월 동안 계승돼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데빌 슬레이어와 무패왕은 어떨까?
악마에게 원한을 품고 지옥 멸절을 외쳤던 알렉스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기에 전설로 추대된 마드라.
이들은 당대의 피아로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다른 전설들과 비교해서 더 걸출한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지옥 한정’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는 이곳 번헨 열도에서 다소 나약한 모습을 보였을지 몰라도, 마드라는 절대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나 라스트 보스가 최강인 법이니까.’
두근! 두근!
66번 섬으로 이동하는 그리드의 심장이 거칠게 뛴다.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인물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기는 기분은 과연 어떨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그리드였다.
***
포식이불족발 전라남도 해남점.
“어서 옵쇼!”
한때 블러드 카니발의 수장이었던 던전제작자 <포식이불족발>이 오늘도 열심히 장사 중이었다.
족발을 사랑하는 그는 하루 1시간은 꼭 자신이 직접 가게를 봤다. 따끈따끈하고 부들부들한 족발을 썰면서 한 점씩 뜯어먹는 재미가 그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사했다.
“흠, 오늘도 손님이 적군.”
“...우리 가게는 배달 손님이 많아서 말이지.”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포식이불족발의 표정이 굳었다.
밤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 다름 아닌 극검이었던 까닭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atisfy랭커이자 대한애국협회 회장이며, 템빨국의 후작인 거물 중의 거물.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포식이불족발 해남점을 방문하고 있었다.
목적은 당연히 포식이불족발의 섭외였다.
던전을 제작하는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포식이불족발을 템빨단에 가입시킬 경우, 템빨국 국력이 크게 상승하리라는 것이 템빨국 상층부의 분석이었다. 포식이불족발을 탐내는 건 당연했다.
“막국수 하나.”
주문하는 극검에게 포식이불족발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족발 집에 와서 매번 막국수만 주문하는 심보가 대체 뭐요?”
오로지 족발을 사랑하기 때문에 족발집을 창업하고 게임 아이디까지 족발로 지은 포식이불족발이다.
그는 먼 서울에서 온 극검이 매번 막국수만 시켜먹자 썩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족발을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극검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족발을 싫어하거든.”
“족발을.... 싫어해?”
포식이불족발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극검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이다.
“흠.... 내가 자네의 환심을 사려면 족발을 좋아한다고 거짓말하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 따위 지껄일 생각이 없어. 나는 자네와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 싶으니까. 그렇기에 솔직하게 맞부딪치는 것이다.”
“.....”
이 사람, 어리석을 정도로 솔직하구나. 또한 나를 진정으로 원하는구나.
깨닫고 약간 감격하는 포식이불족발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거물이 자신의 사악한 과거를 알고도 이토록 자신을 탐내었으니 감동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는다.
포식이불족발은 여전히 극검을 노려보고 있었다.
“족발을 싫어하는 이유는 뭐지?”
그렇다.
족발을 사랑하는 포식이불족발의 입장에서 극검의 발언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질문하는 포식이불족발에게 극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너무 비싸다.”
“뭐....?”
“족발 소자의 가격은 보통 3만 원이지. 하지만 양은 어떻지? 성인 남성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지 않은가?”
“....보통 혼자 다 먹을 수 있나?”
“나처럼 기초대사량이 높은 사람은 중자도 혼자 다 먹는다. 하지만 여기서 알아야할 게 중자의 가격은 또 3만 5천 원을 훌쩍 넘지. 나는 그 가격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족발의 원가를 생각해 봐라. 정육점 가서 족발 2개 사는데 만 원이면 충분하지 않던가? 내가 볼 때 족발 가격은 너무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되어 있어.”
물론 극검은 부자다. 하지만 태어나서부터 부자는 아니었다. 힘든 시절, 족발이 먹고 싶어도 비싸서 못 먹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극검은 여전히 치가 떨렸다.
그에게 포식이불족발이 질문했다.
“만약.... 족발의 재료가 한돈이라면?”
“뭐....? 한... 돈?”
극검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돈!
국내산 돼지고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던가!
동요하는 극검.
포식이불족발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우리 포식이불족발의 족발은 오로지 한돈만 쓴다. 심지어 최고급 한돈이지. 이 말을 듣고도 3만 원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건가?”
“큭....! 원산지를 속이지 않는다고?”
22세기 대한민국.
대부분의 육류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돈의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대한애국협회 회장 극검이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좋아...! 여기 막국수 하나에 족발 소자 추가다!”
“음....!”
극검과 포식이불족발.
반복되는 만남 끝에 서로를 알고 친숙해지는 중이다.
그리드 없이도 잘 돌아가는 템빨국의 단면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식당 벽면에 설치 된 TV에서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재 Satisfy에 접속 중인 모든 플레이어에게 공통된 알림 창이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알림 창의 내용은....』
<새로운 영웅이 전대 영웅들의 망령에 안식을 주고 번헨 열도 최후의 관문을 열었다>
Satisfy에 접속 중인 모든 플레이어에게 떠오른 월드 메시지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영웅은 누구이며, 전대 영웅들의 망령은 또 무엇일까?
애초에 번헨 열도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장소가 아니다.
일부 상위 랭커들만 정보를 독점하고 도전해온 극악 난이도의 인던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번헨 열도의 정체부터가 궁금했다.
***
제국 3대 기둥에 맞설 힘을 길러라.
아그너스가 황비 마리에게 받은 연계 퀘스트이다.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는 마리에게 있어서 아그너스는 든든한 힘이었다. 아그너스에게 많은 투자를 약조했다.
그녀의 지원을 받아 거침없이 정진하고 있던 아그너스가 멈칫했다.
“...번헨 열도 최후의 관문이 열렸다고?”
이 나조차도 62번째 섬에서 공략을 실패하였던 번헨 열도가 아니던가.
한데 그 누가 최후의 관문까지 도달했다는 말이지?
아그너스의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킥... 킥킥, 당연히 네놈이겠지? 크라우젤...!”
아그너스가 번헨 열도 공략을 포기해야했던 이유는 순전히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 때문이었다.
신속성을 갖춘 알렉스의 공격은 악마의 힘을 사용하는 아그너스에게 너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완벽한 카운터였기 때문에 당장 62번째 섬을 돌파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이라면 다를 터였다.
최강의 전투 특화 클래스 검성을 획득한 그에게 카운터가 존재할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없었다.
“킥킥킥, 그래! 네놈에게라면 기꺼이 양보하마!”
전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를 모조리 취할 수만 있었어도.
솔직히 아그너스는 아쉬웠지만 굳이 집착하진 않았다. 그가 황비 마리에게 새롭게 얻은 퀘스트의 가치는 번헨 열도와 비견해도 크게 손색이 없었으니까.
***
“도대체 누가 66번째 섬까지 도달한 거지?”
“...상상이 안 되는군.”
전투의 귀재 하오와 러시아 최강자 알렉산더.
크라우젤의 최측근을 자처하는 그들이 월드 메시지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크라우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번헨 열도를 공략한다는 것, 그들은 상상조차 못해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오로지 크라우젤을 위해서 존재하는 줄 알았던 번헨 열도를 과연 누가 공략 직전까지 몰아붙였단 말인가!
동요하며 쉽게 추측하지 못하는 하오와 알렉산더에게 크라우젤이 웃어 주었다.
“당연히 그리드겠지.”
“그리드....”
하오도, 알렉산더도 부정하지 못했다.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 크라우젤과 호각을 겨루고 대악마 벨리알 레이드에서 활약했던 그리드의 강함은 그들의 뇌리에 너무나도 강렬히 박혀 있었다.
“자, 서두르지. 키리누스는 3년에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NPC니까 오늘을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할지 모른다.”
“음...!”
노력하지 않는 자 없고, 기회를 놓치는 자 없다.
여기서부터는 재능과 끈기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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