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20화
“저, 저런 방법이...!”
아이템 제작에 아이템 제작으로 응수하려는 낌새의 그리드!
생각지도 못했던 스틱세이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대현자인 자신의 상식을 매번 뒤엎는 그리드가 신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상식에 반한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현명한 방법 같지는 않구나!’
스틱세이는 확신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실한 크루제 공략법은 결계의 파훼였다.
결계만 없애면 크루제의 아이템 제작 능력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강해지지 못하는 크루제는 단지 침술만으로 그리드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고, 결국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리드가 승기를 잡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결계만 부수면 된다.
하지만 그리드는 결계의 파훼는 생각조차 못하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그리드는 크루제가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 존재라고 인식한 시점부터 결계를 자신이 건들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절대적인 법칙인 바, 그리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크루제의 결계를 파훼하겠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템 제작을 반복할수록 더 강해지는 크루제를 종국에는 감당하지 못하고 63번째 섬 공략에 실패할 터였다.
그렇다.
결론적으로 63번째 섬의 난이도가 무척 높다는 뜻이다.
단지 피지컬로 밀어붙였던 란스티어나 알렉스와 비교해서 크루제가 훨씬 더 까다로운 보스 몬스터였다.
헬가오 레이드 당시 화석을 채취함으로써 공략에 성공했듯이, 크루제 레이드 또한 머리를 써서 힌트를 찾아내고 공략해야하는 형태의 레이드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다.
‘쉬운 상대야.’
자만도 아니고, 오판도 아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 크루제는 정말로 쉬운 상대였다.
왜?
그리드에게는 궁극의 마법, 강화 버전의 <알람>과 <매직 미사일>이 있었으니까.
크루제가 아이템 제작에 10분, 20분씩 소요하는 것은 그리드의 입장에서 완전히 행운이었다.
벨리알 레이드 이후.
전직 퀘스트를 연달아 클리어하고 벨토 왕국에서 철갑귀마대를 몰살하는 과정에서 레벨을 대폭 올린 그리드.
이번에 62번째 섬을 돌파하면서 또 하나의 레벨이 오른 현재 그의 레벨은 348이다.
이에 따른 지력 수치는 총 2,260.
순수 마나량만 13,560이다.
여기에 지력 관련 아이템으로 도배하면 마나는 2만대에 육박해졌다. 대량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원천을 지닌 셈이다.
‘그리고 레벨3 알람 마법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15초 내외.’
물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줄여주는 아이템들의 효력까지 합산했을 경우의 이야기다.
이론적으로 그리드는 20분 동안 80발 이상의 알람 + 매직 미사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레이단에서 보급 받은 극상의 마나물약을 아낌없이 복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템 제작을 끝낸 크루제?
결계를 거둠과 동시에 매직 미사일의 폭격을 얻어맞고 치명상을 입으리라.
그래, 그리드는 자신이 언제든지 크루제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한다.
‘아이템 제작으로 승부를 보자!’
그리드도 전설이다.
크루제가 10분, 20분 동안 아이템을 제작한다면 그리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됐다.
그리드는 실험해 보고 싶었다.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 알게 됐지. 나는 몇날 며칠을 소요해서 제작해온 아이템을 다른 대장장이들은 몇십 분, 몇 시간 만에 제작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처음에는 무척 놀랐고, 이후에는 부정했다.
그토록 짧은 시간 만에 제작하는 아이템이 과연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생각하며 다른 대장장이들을 우습게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하던가?
대장장이 랭킹 상위권에 속한 인물 대부분이 뛰어난 위력의 아이템을 제작하는데 성공했었다.
그때부터 그리드는 깨달았다.
무조건 오랜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좋은 아이템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확률 X망겜이다.’
시간을 적게 쓰던, 많이 쓰던 아이템 제작 결과는 확률적으로 정해진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해서 아이템을 제작할 경우에 더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탄생할 확률이 높기는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개의 아이템을 제작하게 되면 확률도 결국 비슷해지지.’
실제로 그리드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만큼은 짧은 시간 만에 생산했고 다량의 레어, 에픽 등급 아이템을 띄웠었다.
‘제작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게 아니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궁극의 아이템을 제작하려면 많은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음을 그리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템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행위도 이제는 부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 아이템을 빠르게 제작하는 능력은 필요하다.’
그리고 빠르게 만든 아이템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크루제조차도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니까 그리드는 도전한다.
“나도....”
꾸욱-!
휴대용 용광로에 백린목을 넣어 불을 붙인 그리드.
용광로의 온도가 오르는 것을 기다리며 대장장이 망치를 거머쥔다.
“나도 공장장이 되겠다...!”
장인 정신이 때로는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고, 이는 약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니 미리 극복하겠다.
뿌리 깊숙이 자리 잡은 장인 정신을 의도적으로라도 뿌리쳐 보이겠다고 그리드는 다짐했다.
[크루제의 결계 유지시간이 18분 남았습니다.]
그리드가 휴대용 용광로의 온도를 달구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크루제가 2개의 천을 재단하는 사이 이미 용광로 속 불길은 원하는 온도에 도달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은 과연 만능인지라, 풀무질조차도 대단한 그리드였다.
“내가 만들 아이템은!”
18분 안에 제작할 수 있는 아이템.
그것도 지금 당장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
과연 무엇일까?
그리드는 이미 생각해두었다.
무수히 많은 아이템을 제작해온 경험을 토대로, 최소한 대장일에 관해서만큼은 뛰어난 순발력을 자랑하는 그리드였다.
“크루제 네 뼈마디를 모조리 분쇄시켜줄 무기다!”
전설의 재단사와 실력을 겨루게 되었음에 흥분한 그리드.
힘껏 소리치며, 인벤토리에서 그가 꺼낸 물건은 다름 아닌 붉은 구슬이었다.
이제는 아주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초보자 시절.
서릿빛 오크 족장을 레이드하고 얻은 <붉은 벼락 소환구>이다.
<붉은 벼락 소환구>
서릿빛 오크 주술사들의 신통력이 깃든 구슬입니다.
하늘에서 붉은 벼락을 소환합니다. 이 벼락으로 착용 중인 무기의 공격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며 무기에 전기 속성을 부여합니다.
*벼락을 소환하기까지 1분의 시간이 소요되며 소환 후 소환자의 생명력이 10퍼센트 하락합니다.
무게:50
“이거 참 오랜만이네.”
그리드는 이 소환구를 잊고 있던 게 아니다.
적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소환구를 꺼내서 무기에 귀속시키는 과정에 발생하는 시간의 간극이 부담됐었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해왔다.
성능에 비해서 페널티가 높은 아이템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붉은 벼락 소환구는 총 공격력이 아니라 ‘무기 공격력’만 10퍼센트. 그것도 고작 1분 상승시켜주는 주제에 생명력을 10퍼센트나 손실시키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언젠가부터 생각해봤다.
만약, 이 소환구를 무기에 영구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면 아이템 제작 재료로 활용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가정이었다.
붉은 벼락 소환구는 ‘제작 재료’로 분류되는 아이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리드는 붉은 벼락 소환구를 토대로 아이템을 제작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아이템 개조>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개조 스킬을 얻은 시점부터 그리드는 언제든지 붉은 벼락 소환구를 활용하겠노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붉은 벼락 소환구를 사용할 때라고 그리드는 판단했다.
‘언데드는 폭발에 약하고.’
붉은 벼락이 내리꽂히는 지점에는 폭발이 발생한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붉은 벼락 소환구의 기능을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할 경우,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은 확률적으로 붉은 벼락을 소환함으로써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히는 무기로 승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현재 크루제가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대해서 경계하는 부분은 화염밖에 없었다. 실제로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는 전격 속성이 아예 없기 때문에 크루제는 전격 속성에 대한 방비가 전무했다.
이때 붉은 벼락 소환구가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전격의 힘을 부여한다면?
‘뒤통수 거하게 후려칠 수 있는 거지.’
씨익!
음흉한 미소를 피어 올린 그리드가 오래간만에 개조 스킬 정보 창을 띄웠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개조>Lv.1
현재 경험치 63.2%
이해도가 100퍼센트인 아이템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형태로 구성합니다.
개조된 아이템의 성능은 당신의 해석과 기술, 의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아이템 하나당 1회의 개조만 가능합니다.
*스킬 레벨이 오를 때마다 개조 가능 횟수가 1씩 추가됩니다.
일단 요구 조건은 충족된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은 그리드 본인이 제작한 아이템이므로 이해도가 기본 100퍼센트였다.
한 가지 경계해야 하는 점은, 아이템 하나당 1회의 개조만이 가능하다는 부분이었다.
‘신중해야 한다는 뜻.’
그리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붉은 벼락 소환구를 귀속시킬 가치, 충분한가?
당연히 충분하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은 지존 무기다.
붉은 벼락 소환구는커녕 그보다 더한 아이템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개조 스킬 레벨도 조만간 2가 되니까.’
개조 가능 횟수도 늘어나게 된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판단한 그리드가 검은 귀신으로부터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을 분리, 그것을 망설임 없이 용광로 속에 집어 던졌다.
붉은 벼락 소환구도 함께.
퍼어어어어어어엉!!
용광로 속에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과 붉은 벼락 소환구가 균열하면서 발생시키는 불꽃과 전격의 폭발이 지축을 흔들었다.
딱.
따닥.
천 재단에 열중하고 있던 크루제가 턱을 부딪치면서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린다.
만약 크루제가 살아 있었고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면 아이템 제작을 시작한 그리드를 무척 경계하였을 터이고 이는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크루제는 데스나이트다.
이지가 없다.
그리드에게 곧 무관심해져서 시선을 떼고 다시 천 재단에 열중했다.
그리고.
따앙! 따앙! 따앙!!
63번째 섬.
마치 조선 시대 빨래터처럼 곳곳에 천이 매달려있는 배경의 그 고요한 섬에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형태를 잃기 직전까지 녹은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과 붉은 벼락 소환구를 모루 위에 얹어놓고 그것을 정신없이 쥐어 패고 있었다.
‘리파엘의 창을 개조했을 때 내가 소요했던 시간은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크루제를 보고 깨달은 지금은 굳이 그런 많은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애초에 아이템 개조는 굉장히 능동적인 스킬이었다. 전투 도중에 실시간으로 사용할수록 그 가치가 빛났다.
‘공장장을 목표로 삼은 이상 개조쯤은 순식간에 끝내야지!’
그리고 18분이라는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스파아아아앗--
크루제를 비호하던 반투명한 결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크루제가 아이템 제작을 완료하였습니다!]
알림 창이 떠올랐다.
타앗-!
크루제는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망치질을 하는 동안 그리드의 생명력과 마나가 일정량 회복되고 스킬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왔듯, 녀석 또한 생명력 게이지가 대부분 충전되어 있었다.
“이번엔 또 뭘 만드셨을까?”
따앙-!
모루 위에서 붉게 점멸하고 있는 칼날을 마지막으로 한 번 힘껏 때린 그리드.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크루제의 공격을 갓 핸드로 차단한 후, 파그마의 검무를 펼친다.
“연(聯).”
파직-!
붉게 점멸하는 묵색의 칼날.
그것이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종전과 달랐다.
붉게 점멸할 때마다 주변에 시뻘건 스파크까지 튀어 올랐다.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
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붉은 검광의 폭풍에 휩싸이는 크루제.
자신을 집어삼키는 업화를 천으로 막아내고, 마기는 흡수하며, 검은 불꽃만큼은 또 부질없이 허용하고 마는 그의 두개골 위로.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붉은 벼락이 내리쳤다.
툭!
투투투툭!
감전되어 몸서리치는 크루제의 뼈마디 곳곳이 떨어져나간다.
전대의 전설이 당대의 전설에게 힘으로 압도당하는 순간이었다.
전대의 전설은 현재 온전한 상태가 아니니까 아무 의미 없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당대의 전설 그리드 또한 온전한 상태가 아니니까. 아직 당대의 전설들은 완숙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저, 새로운 세대가 더 뛰어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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