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21화 (516/1,794)

템빨 32권 - 19화

쩡-!

쩌저저정!!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리드의 공격은 결계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시스템의 비호란 절대적인 것이었다.

‘쳇, 아이템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무적이라 이거지?’

내가 아이템 합체 스킬을 사용할 때는 이딴 거 없더니?

사람 참 서운하게 만드는 차별이다.

심지어 아이템 합체는 히든 피스를 토대로 얻은 궁극기가 아니던가!

‘너무하네.’

치를 떤 그리드가 결계 속 크루제를 노려보았다.

슥슥슥.

서걱서걱!

맨바닥에 쭈그려 앉은 크루제는 가위와 자, 칼 등의 도구를 이용해서 천을 재단하고 있었다.

커다란 천이 온갖 규격과 형태로 나뉘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꿰매지기를 순식간에 반복한다.

쭈그려 앉아서 재단하는 해골이라니...

세상에 이토록 기가 막힌 희극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데스나이트 크루제를 광대처럼 보고 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는 웃지 못했다. 그의 표정은 도리어 점차 굳어갔다.

‘뼈밖에 없는 손으로 저토록 신속하고 정확하게 천을 재단하다니...’

그리드의 감탄은 컸다. 중급 재단 기술을 습득한 여파이다.

재단에 대해서 아예 문외한이었다면 또 모를까, 그리드도 재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크루제의 대단한 실력을 절감할 수 있었다.

‘저렇게 다양한 종류의 천을 이질감 없이 꿰맬 수도 있구나... 저게 바로 전설의 재단 기술....’

그리드의 재단 기술은 당연히 많이 부족하다.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 여러 종류의 천을 활용하지 못한다. 두 종류 이하의 천에만 집중해서 아이템을 제작해야지 그나마 천의 특성을 유지하며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것도 돈 받고 팔아먹기에 아슬아슬한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리드가 제작하는 천 계열 아이템은 성능이 뛰어나지 못했다. 흔한 마을 상점에서 시판되는 아이템들보다 살짝 더 나은 수준이었다. 이도 순전히 손재주의 힘이다. 기술 자체만 놓고 보면 재단사로서 그리드의 갈 길은 아직 멀고 멀었다.

‘애초에 재단사가 될 생각도 없다만.... 뭐, 어찌됐든.’

지금은 재단 기술이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상념을 털어낸 그리드가 눈을 번뜩였다.

‘싸움에 집중해야지. 그리고 이 싸움은 내가 이겼다.’

크루제가 전투 도중에 아이템을 제작하는 이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전설적 재단사의 눈>스킬을 토대로 그리드의 아이템을 분석한 크루제는 그리드의 아이템에 대항할만한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는 필시 굉장한 능력이다.

크루제는 자신의 아이템 제작 능력을 실시간으로 활용해서 상대방의 강점을 약화시키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만났어.’

씨익!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피어 올린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인벤토리에 회수했다. 그리고 새롭게 꺼내든 무기는 다름 아닌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검이었다.

‘네가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는 동안.’

철컥! 철컥철컥!!

마법 공학 총검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조악한 스코프가 달린 길이 1미터의 저격 총으로 변했다.

상아색으로 매끄럽게 빛나는 총신의 유려함은 뭇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것을 그리드가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고 아이템 제작에 열중하고 있는 크루제와의 거리를 80미터까지 벌렸다.

그렇다.

그리드는 마법 공학 총검의 스나이퍼 모드에 귀속된 <확정 즉사> 기능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80미터 거리에서 그리드가 조준에 소요하는 시간은 무려 2분이었으나, 지금은 그 시간이 장애로 적용되지 않았다.

크루제가 아이템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크루제, 그 결계가 걷히는 순간 너는 끝이다.’

엎드려서 크루제를 조준하는 그리드.

과연 군필자답게 호흡을 고르는 행위가 능숙하다. 크루제의 미간에 겨냥한 조준점에 흔들림이 없다.

‘한 방에 보내주마.’

꾸욱-

그리드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방아쇠에 고정된다.

반투명한 결계 속에 쭈그려 앉은 크루제는 여전히 아이템 제작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자신에게 그리드의 저격이 날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못 꾸는 눈치였다.

같은 시각, 62번째 섬.

“잘못 판단하셨습니다...!”

수정구를 통해서 그리드를 지켜보던 스틱세이가 낭패를 금치 못했다.

그리드가 즉사와 언데드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스나이트에게 즉사는 통하지 않아요...!”

즉사 계열 기술은 대상의 ‘목숨’을 일격에 갈취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즉, 살아 있는 존재에게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언데드는 죽은 존재다.

애초에 갈취할 생명이 없으므로 즉사가 무효화된다.

그리드가 이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됐다.

자신 본인조차도 ‘불사’ 스킬을 보유했다는 이유로 즉사로부터 목숨을 지키지 않았던가.

한데 언데드의 개념을 망각한다는 건 어리석었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그리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아쉬워하던 스틱세이가 이내 그리드의 입장을 헤아렸다.

그리드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전대 전설들의 활약과 희생 덕분에 수백 년 동안 평화를 유지해왔다.

인간들은 발전했고 몬스터는 성행하지 못했다. 특히 언데드는 ‘시신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출현이 철저하게 방지되어왔다.

쉽게 말해서 경험 부족이다.

그리드는 언데드를 잘 모른다. 또한 역사상 최강의 기술로 손꼽히는 즉사에 익숙할 리도 만무했다.

‘그렇다면 고배를 마실 차례...!’

타아아아아앙-!

수정구 속.

크루제를 비호하고 있던 결계막이 걷힘과 동시에 그리드가 저격 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스틱세이는 그리드가 큰 위기에 놓이리라 보았다.

즉사에 저항한 데스나이트 크루제가 그대로 그리드에게 치명적인 역습을 가하리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푸욱-!

크루제는 저격 총에 미간을 꿰뚫리고도 멀쩡하게 돌격하여 그리드에게 침을 날렸고, 그리드는 이를 허용하고 말았다.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스틱세이가 그리드를 응원했다.

“이겨내십시오...! 고배를 마시는 것 또한 기회,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배움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집중력을 유지하십시오...!”

***

[대상을 저격합니다!]

퍼어어어어엉-!

저격 총이 포효하며 총탄을 내뿜는 순간.

“크윽...!”

그리드가 이를 악물었다.

자리에 엎드리고 몸을 고정해놓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반동이 발생한 까닭이다.

그리드보다 근력이 한참 아래인 유라가 이 저격 총을 사용했다가는 상태이상 탈골에 걸릴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퍼어어엉-!!

아이템을 완성한 직후.

결계를 거두고 그리드에게 달려오던 크라제의 미간이 마나 총탄에 꿰뚫린다.

그리드의 마나를 무려 2천이나 소모시킨 총탄이었다.

그리드는 크루제가 당연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키야아아아아아!!

“뭐라고!”

크루제는 멀쩡했다.

두개골 정중앙이 박살나고도 생명력 게이지는 1도 소모되지 않은 채 그리드에게 그대로 돌진해왔다.

“염병!”

당황한 그리드가 황급히 무기를 스왑했다. 저격 총을 인벤토리에 회수하고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을 꺼냈다.

그사이 그리드에게 도달한 크루제는 수십 발의 바늘을 날려 오고 있었다.

챙!

채채채채채챙!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하여 모든 바늘을 회피하고 쳐내는 그리드였으나.

푹! 푸푸푸푸푸푹!!

그 틈에 크루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드의 품속 깊숙이 접근하더니 바늘로 직접 그리드를 찔렀다.

[1,57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혈맥을 찔렸습니다. 혈류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20초 동안 생명력 회복이 차단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1,3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관절에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앞으로 13초 동안 왼팔이 마비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1,642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나의 흐름이 역류합니다. 스킬 사용에 주의를 요합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미친!”

그리드가 손재주의 적절한 활용법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크루제는 족히 수천의 손재주를 이용해서 그리드의 삼겹갑 사이사이 틈새를 바늘로 정확히 찔렀고 이는 그리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로 다가왔다.

갑옷 위로 바늘을 찔렸을 때보다 더 큰 데미지를 입었을 뿐더러 각종 상태이상에 걸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침착했다.

“매직 미사일!”

[매직 미사일의 발동에 실패합니다.]

[매직 미사일에 소모하는 마나 수치의 3배에 해당하는 생명력 피해를 입습니다.]

그리드는 무척 영리한 판단을 내렸다.

스킬 사용을 억제시키는 크루제의 봉침술, 1회성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마나 소모가 가장 적은 스킬을 전개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그리고 신속한 몸놀림이 유지되는 동안 크루제가 찔러오는 바늘의 회피에 주력하면서 파그마의 검무를 펼쳤다.

연(聯)이었다.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크루제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의 안광이 한 번 번뜩이는 동안 20회가 넘는 검광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것은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안겨주는 광속의 검술.

수정구를 지켜보는 중인 스틱세이가 호흡 한 번 하는 동안 크루제의 몸 곳곳에 검흔을 새긴 연(聯)의 위력이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과 결합된다.

무아지경의 검이 토해내는 불꽃과 검은 불꽃이 크루제를 중심에 둔 채 총 9회나 폭발했다.

‘좋았어!’

그리드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공세를 가하여 크루제를 끝장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 각오는 찰나였다.

눈앞에 연달아 떠오르는 알림 창을 확인한 그리드가 경악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대상에게 30퍼센트의 화염 속성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대상이 화염을 무력화시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5천의 화염 데미지를 추가로 입힙니다!]

[대상이 화염을 무력화시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대상에게 30퍼센트의 암흑 속성 추가 데미지를 입힙니다!]

[대상이 암흑을 극대화시킵니다. 암흑 속성 추가 데미지가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암흑은 때때로 언데드의 힘이 됩니다.]

[대상이 98,500의 생명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대상이 검은 불꽃의 무력화에 실패합니다.]

[대상에게 667,94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자식...!”

연(聯)에 고스란히 적중당한 크루제의 생명력이 그리드의 예상보다 훨씬 적게 소모됐다.

크루제가 10분 동안 만든 천 옷의 위력이었다.

크루제는 암흑 속성을 극대화시키는 천과 화염을 차단하는 천을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옷을 입음으로써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위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화염을 차단한 건 둘째 치고, 자신에게 확률적으로 이롭게 작용하는 암흑 속성을 극대화시킨 것은 감탄밖에 안 나왔다.

데스나이트로 전락하기는 했어도 과연 초네임드급 NPC 출신답게 지적 수준이 무척 높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검은 불꽃>이 화염과 암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속성이라는 점이었다.

크루제는 검은 불꽃까지는 차단하지 못했고 이에 큰 피해를 입었다.

끽.

끼기기기긱.

폭발에 휩쓸린 오른쪽 다리의 관절이 부러지자 엉거주춤 선 크루제.

그리드에게 몇 발의 바늘을 날린 후 그대로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결계를 펼쳤다.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려는 낌새였다!

“또냐!”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집중력을 극도로 유지해야하는 레이드에서 자꾸만 흐름이 끊기니 짜증이 치밀었다.

Satisfy 제작진들의 성격은 대체적으로 얄미울 거라는 확신이 재차 들었다.

[앞으로 20분 동안 전설의 재단사 크루제가 아이템을 제작합니다!]

“심지어 10분이 추가됐어?”

안 그래도 크루제의 아이템 제작 능력과 즉사의 무력화에 큰 충격을 받았던 그리드이다.

여기서 또 20분 동안 멍 때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자 정신적인 충격이 배가됐다.

한편, 수정구를 지켜보는 중인 스틱세이는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드 님, 63번째 섬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크루제가 펼치는 결계를 파훼하셔야만 합니다. 이대로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크루제는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질 테고 당신에게 승산은 사라져요.”

제발, 부디.

이 사실을 눈치채고 결계의 파훼법부터 찾아주길 바란다.

그리드에게 자신의 이 마음이 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스틱세이였으나 닿지 않았다.

그리드는 결계의 파훼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다만.

“쒸펄... 그래, 나도 똑같이 해주마.”

“....!!”

스틱세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정구 속 그리드, 휴대용 용광로와 대장장이용 망치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런 방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이템 제작에는 아이템 제작으로 맞서겠다는 것인가!

오직 그리드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과 결단이 스틱세이를 감탄시켰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