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17화
철컥!
파그마가 제작한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검을 저격 총 모드로 변환시킨 그리드가 저격 최대 거리를 재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저격 거리란 아이템의 능력치가 아니다. 그리드가 표적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를 뜻한다.
‘87미터.....’
물론, 국가 방위의 숭고한 뜻을 품고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들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다.
200미터, 300미터 거리의 표적까지도 소총으로 명중시킬 수 있단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표적이 작게 보이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드에게 저격 총 모드의 ‘반드시 명중’ 옵션이 적용되는 것은 87미터 거리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으로 거리가 벌어지면 표적을 명확히 볼 수 없었고 명중률이 기하급수적으로 하락하며 경고 창이 떴다.
‘뭔 스코프 성능이 이렇게 쓰레기냐...’
저격 총에 달린 스코프에는 줌 기능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드는 이걸 과연 저격 총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Satisfy의 과학력은 대체적으로 중세 시대 수준에 머물러있단 사실 말이다.
Satisfy에서 총이라는 화기는 과학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마법 공학의 산물이며, 드워프들이 개발한 것이다.
파그마 또한 밀뤠프라는 드워프 장인에게 배움을 얻기 전까지는 마법 공학 총검을 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격 총은 드워프들조차 만들지 못했던 영역.’
애초에, Satisfy에는 <매의 눈> 계열의 스킬들이 존재한다. 시야를 보다 넓게 해주며 멀리 있는 표적을 명확하게 식별하게끔 도와준다. Satisfy에서 칭하는 저격수란 모두 이 매의 눈 계열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져서 스코프라는 개념이 탄생할 계기조차 없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파그마가 스코프의 개념을 창조한 것만으로도 굉장한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성능이 좋지 못한 것쯤은 이해해줘야 한다.
“뭐, 어찌됐든.”
총사답게 매의 눈 계열 스킬을 보유한 유라라면 이 저격 총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수백 미터 거리 바깥의 표적조차 저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드가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검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진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주작궁과 같은 경우였다.
매의 눈 계열 스킬이 없는 그리드의 입장에서 알렉스의 마법 공학 총검의 위력을 100퍼센트 끌어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가 마법 공학 총검에 집착하는 건 조금도 효율적이지 않았다.
‘확정 즉사에 현혹될 필요가 없어. 조준 시간이 너무 길기도 하고, 즉사에 의지해서 쓰러뜨려야할 정도의 상대라면 100미터 이내에서 조준해봤자 기척이 들키고 말 거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데빌 슬레이어 전용 무기이다.
유라에게 양도하는 편이 템빨국 전체를 위한 길이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드.
가녀린 미녀가 자신의 키만한 저격 총을 들고 적을 조준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슬며시 웃는다. 상상 속 유라의 모습이 묘하게 귀엽고 매력적이었던 까닭이다.
“....어휴.”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던 그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못 오를 나무에게 가끔씩이나마 마음이 동하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꼈다.
‘누구를 좋아해봤자 나만 손해야.’
첫사랑 아영이 사건은 그리드 인생 최대의 트라우마였다. 그리드는 현실 세계의 이성 관계에 대해서 자신감이 전무했다.
가끔씩 중국집을 방문하려고 외출할 때 마주치는 여성들이 자신을 보고 꺅꺅거리는 모습을 보고도?
그렇다.
그리드는 여성들이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이유가 단지 순수한 팬심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이성적으로 멋지게 느끼는 여성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계 최고의 명사임과 동시에 세계 최고 갑부 대열에 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남성이 이토록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사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진실인 걸 어쩌겠는가.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심리적 고자였다.
물론 현실에서만 말이다.
‘괜찮아, 나한테는 아이린이 있으니까.’
그녀가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했을까.
내게 사랑을 알려준 유일한 존재에게 늘 감사할 따름이다.
“.....”
더없이 따스하고 인자한 눈빛으로 아이린을 그리는 그리드.
슥슥. 슥슥슥.
그는 생각에 잠긴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리고 있었다. 가위로 자른 천을 실과 바늘로 꿰고 모양을 잡아 팬티를 만들었다.
스틱세이는 무척 난처했다.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일국의 왕인 그리드가 길바닥에 앉아서 속옷이나 만들고 있었으니 -그것도 진지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의 일을 할 때만큼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어차피 스킬 레벨 올릴 겸 속옷은 계속 만들어야하니까 병사들 전부에게 속옷을 지급해야겠어.’
중급 속옷 제작법을 습득한 그리드가 만든 팬티는 노멀 등급으로 떠도 방어력이 부여됐다.
그 방어력 수치라는 것이 한자리수로 무척 미미하였으나, 없는 것 보단 나았다.
한 자리수 방어력 덕분에 생명력 1, 2만 남겨놓고 목숨을 건질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만드는데 큰돈이 필요하지도 않고... 좋아. 이렇게 짬날 때마다 계속 만들자. 팬티 공장장이 되는 거야.’
현재 그리드는 속옷을 하나라도 더 빨리 만들어서 스킬 레벨을 상승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아직 중급 수준에 불과한 제작 기술은 굳이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지 않더라도 경험치가 꾸준히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옷의 재료도 특별한 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 값싼 천만 사용했다. 팬티 한 장 만드는데 드는 비용이 채 2실버가 안 될 정도였다.
물론, 적은 금액이라도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커지는 법이다.
개당 2실버짜리 팬티라도 1만 명대 병사에게 입히려면 꽤 많은 단위의 골드가 필요했다.
대현자 스틱세이가 그 부분을 염려하였다.
“병사들을 위하는 당신의 마음은 필시 훌륭하다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국가적으로는 손실이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스틱세이는 현재 템빨국을 위해서 일하는 중이다. 라우엘과 라빗이 하도 부탁하여 아카데미 교장직과 재정 관리 일부를 맡았다.
하여 그리드의 지출을 놓고 왈가왈부하게 되는 것이다.
염려해주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낀 그리드가 웃으며 안심시켰다.
“괜찮아. 내 사비를 쓸 거니까.”
“허....”
왕이 병사들을 위해서 사비를 털다니?
스틱세이는 그리드의 결단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인간이란 대게 욕심이 많기 마련인데 그리드로부터는 전혀 탐욕을 느낄 수가 없었으니 드물게 나타난다는 성인(聖人) 같았다.
그리드가 설명했다.
“내가 팬티를 만들어주면 병사들이 나를 더욱더 좋아하게 될 거고, 그럼 나중에 세금을 좀 올려도 군소리 없이 따를 거 아니야. 그치?”
“....그런 겁니까.”
역시, 인간은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대현자 스틱세이가 새삼 깨달음을 느꼈다.
[템빨 아카데미 교장, 대현자 스틱세이의 지력 스탯이 10 상승하였습니다.]
[템빨 아카데미 교장, 대현자 스틱세이가 스킬 <인간 경계>와 <신중>을 습득하였습니다.]
“????”
갑자기 왜 성장하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꾸벅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
왠지 살짝 기분이 나빠지는 그리드였다.
***
“매번 느끼는 거지만 혜성 그룹의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쾌적함은 실로 대단하구나.”
작은 모니터 속 화면을 보면서 플레이하는 PC게임조차도 인간의 말초신경을 극도로 자극한다. 마우스를 쥔 손에 식은땀이 흥건히 젖는 경험, PC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하물며 PC게임과 비할 수 없이 몰입도가 높은 가상현실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흥분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캡슐에서 나온 신영우의 몸 곳곳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탑승자의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순기능이 없었다면, 지금쯤 영우는 물에 빠진 생쥐처럼 보였을 정도로 땀을 더 흘렸을 것이다.
데스나이트 알렉스와의 일전, 그리고 득템이 그만큼 영우를 흥분시켰다.
63번째 섬에서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데스나이트와의 대결과 그로 인해 얻을 보상이 영우는 벌써부터 기대됐다.
두려움은 일체 없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불사 없이도 승리를 거두겠다는 일념만으로 의욕을 불태웠다.
“일단 씻을까.”
룰루랄라.
소음 같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욕실로 향한 영우가 대리석으로 도배 된 욕실의 넓은 벽면에 부착된 TV를 켰다.
채널은 당연히 Satisfy전문 뉴스 채널로 고정되어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사하란 제국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내드린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놀랍게도, 전문가들의 예상과 다르게 제국은 여전히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뉴스 화면에 떠오르는 반란 지점은 ‘루반나’였다.
라우엘이 말했던 장소와 일치했다.
‘바로 그곳에...’
오이 향이 맴도는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 곳곳을 벅벅 문지르고 있던 영우가 문득 손을 멈췄다.
앵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패왕 마드라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인물의 존재감이 그만큼 큰 것으로 해석됩니다.』
“.....”
무패왕 마드라.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했던 전성기의 제국으로부터 루반나를 몇 번이고 수호했던 불세출의 영웅.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서 무패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전설급 강자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계해야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이 무패왕의 후예라는 인물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 이겠지요. 플레이어일까요, NPC일까요? 그는 Satisfy에 어떤 새로운 바람을 불고 올까요?』
네임드 NPC의 인공지능은 무척 우수하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낫다.
무패왕 마드라가 플레이어이든, NPC이든 앞으로 서대륙 판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지금 당장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의 등장으로 인해서 템빨국과 발할라가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고 제국은 영향력이 약해졌다.
‘무패왕의 기술만을 계승한 후예라면 나처럼 플레이어일 테고.’
무패왕의 혈통마저 계승한 후예라면 당연히 NPC일 것이다.
그 정체를 확실히 추측한다는 것은 아직 무리다.
‘어찌됐든 대단하긴 한가보네.’
아레스의 말에 따르면, 제국의 솔로 넘버 나이트 간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한다.
5번째 기사가 현존하는 플레이어 최강자 수준. 그러니까 크라우젤과 그리드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라면, 4번째 기사는 그보다 몇 배나 강하며 3번째 기사 또한 4번째 기사보다 몇 배 더 강하다 한다.
그중에서도 최강은 단연.
‘첫 번째 기사.’
메르세데스.
어딘지 고급 외제차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지닌 그 청발의 여성, 영우는 실제로 만나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때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직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레스 군단조차도 박살냈던 그녀가 이끄는 군대를 지금, 무패왕의 후예라는 자가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NPC인가?’
무패왕의 후예가 플레이어라면 제국군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플레이어라면 레벨이 엄청 낮을 테니까. 전설이 된지도 얼마 안 됐을 거 아니야.... 아니, 가만.’
전설이 된지 얼마 안 됐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영우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과 크라우젤 또한 전설이 되고 수개월이 지나서야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가?
그 또한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영우는 야탄의 종을, 크라우젤은 대악마를 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드러냈던 것이지 본인이 원해서 세상에 ‘나, 전설이요’라고 알린 게 아니었다.
‘레벨도 낮은데 제국군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만약, 무패왕의 후예가 플레이어라면 이미 오래 전에 레전드리 등급으로 전직을 마친 인물일 수도 있어.’
쏴아아아아아아아.
샤워기 앞에 선 영우.
자신의 탄탄한 몸에 부딪쳐 튕겨나가 흩어지는 물줄기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 짓는다.
‘NPC든 플레이어든 환영한다.’
정말이지, 안주할 틈이 없다.
Satisfy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주었고 삶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불안해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경각심을 품는 영우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이제 곧 63번째 섬에 진입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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