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15화
“제 예상대로 알렉스를 꺾으셨군요. 과연 대단하십니다.”
다가와 말하는 스틱세이의 얼굴이 밝았다.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하나의 큰 산을 넘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특히 스틱세이가 느끼는 감격이 무척 컸다.
대체 언제쯤에야 구원자가 나타나서 번헨 열도를 정화해줄까?
수십 년을 하염없이 기다려왔던 스틱세이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정말이지 광명과도 같은 존재였다.
반면, 그리드의 들뜬 마음은 금세 가라앉고 있었다.
“스틱세이, 당신이 나보고 번헨 열도를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단언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알렉스 말인데, 데빌 슬레이어 고유의 기술을 기본 수준조차 구사하지 못하더군.”
“.....”
대악마 레이드 당시 유라가 선보였던 데빌 슬레이어의 스킬은 꽤 다양한 편이었고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마(魔)를 제압하는데 특화된 직업 특성상, 흑화 상태의 그리드를 마법적인 힘으로 구속시키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한데 오늘 알렉스가 사용한 스킬은 마력 폭발과 속사가 전부였다. 마법 공학 총검의 고유 특성을 이용한 아이템 변환과 평타만으로 그리드에 맞섰다.
돌이켜보면 란스티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워낙 순식간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란스티어 또한 은신을 활용했을 뿐 그 외 특별한 스킬을 선보이진 않았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데스나이트들은 생전의 능력을 대부분 소실한 상태라는 뜻이겠지?”
생전과 비교하면 기본 능력치와 레벨부터가 현저히 떨어진 상태일 것이다. 근데 스킬마저 사용하지 못한다.
조금 전, 그리드를 그토록 애먹였던 알렉스조차 생전과 비교하면 10배, 100배 더 약한 상태였단 뜻이다.
‘바로 그 부분이 스틱세이가 내게 번헨 열도를 공략할 수 있으리라고 단언했던 근거일 테고.’
꾸욱!
말아 쥐어진 그리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내가 전대 전설들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전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가 약했기 때문에....’
그리드의 떨리는 몸을 보면서도 스틱세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전설들의 데스나이트는 무척 약하지요. 애초에 살아생전과 비교해서도 약했는데, 주인인 파그마가 사라진 이후로는 더욱더 약화됐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전설이라는 칭호를 주기가 아까울 정도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의 당신이라도 충분히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았던 거고요.”
“....하.”
그리드는 한숨만 나왔다. 이제 들뜬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당연하다.
전설이라고 부르기도 아깝다는 데스나이트와 싸워서 불사 스킬까지 소모한 것이다.
무조건 불사에 의지해야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불사 없이도 이길 수 있는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사를 잃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리드는 자신이 불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크다고 자평했다.
‘지금 상태로는 템빨이 아니라 불사빨이잖아? 쒸펄, 이러다가는 템빨왕이 아니라 불사왕이라고 불리겠네.’
템빨왕보다는 불사왕이 그나마 더 멋스럽다는 사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감각 없는 그리드는 몰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드는 아그너스와의 전투를 회상하고 있었다.
‘녀석과 싸웠을 때도 불사가 없었으면 필패였을 테지...’
이 순간 그리드는 깨달았다.
‘비단 아그너스뿐만이 아니야. 내가 대부분의 1대1 대결에서 승리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상대보다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불사 덕분이었다고.’
불사는 전설 직업군 고유의 능력.
불사를 토대로 승리를 쟁취하는 그리드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스스로를 비판했다.
‘이 해이한 마음은 독이다.’
‘어차피 불사가 있으니까 한 번쯤은 죽어도 돼.’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뿌리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 문제다. ‘불사가 있으니까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은 즉, ‘불사가 없으면 이길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 썩어 빠진 근성을 고치지 못하면 언젠가 큰 화가 될 거라고 그리드는 추측했다.
정확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리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평범한 사람은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변혁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의 그릇된 무의식을 자각하고, 이를 썩어 빠진 근성이라고 자평하며 곧바로 고치려하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담배 없이는 글 못 써.’라는 되도 않는 핑계로 썩어 빠진 근성을 합리화시키고 10년 이상 금연에 실패하는 작가들도 수두룩한 세상이다. 그리드 스스로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그는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그리드의 귓가로 스틱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한 태도로 그리드에게 현실을 주지시켜주었던 그가 이제는 더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의 데스나이트들이 살아생전과 비할 바 없이 약한 것은 사실이나, 전대 전설들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망령일 뿐입니다. 당대의 사람 중에서 이곳의 데스나이트들을 격퇴할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겠지요.”
요지는 이거다.
“자학하지 마십시오. 제가 당신께 의지한 이유는 당신의 실력을 믿어서였지, 데스나이트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니까요. 제가 누차 말했지만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
무려 대현자의 극찬이다.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입이 귀까지 걸렸을 것이다. 원숭이 같은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머리나 긁적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안주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상이 너무 높았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면 그 누가 칭찬하더라도 기뻐할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하면 대단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상대해야하는 건 죄다 괴물뿐이라고.”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힘을 지닌 대악마들, 그들의 정점과 계약한 아그너스, 서대륙의 지배자 사하란 제국, 제국조차 경계하는 아레스, 그들 중 누구와 비교해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검성 크라우젤, 그리고 동대륙의 양반들과 신선들...
거기에 템빨단원들도 있다.
하나같이 특별한 동반자들이며 경쟁자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금방 도태될 수 있다.
‘안 돼.’
그리드는 이미 진즉부터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품어본 높은 이상이며, 스스로에 대한 신뢰였다.
그는 결코 중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후...”
심호흡한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눈빛은 결의에 차있었다.
“다음 섬에서는 불사에 의존하지 않고 이겨 보이겠어.”
“....!”
스틱세이가 깜짝 놀랐다.
그가 알기로 전설들의 불사 능력은 최소 하루가 지나야 제기능하는 것이었다.
“설마, 지금 곧바로 63번째 섬에 도전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불사 없이 말이다!
그리드의 결의에 압도당한 스틱세이가 부르르, 전율하였고.
“내가 미쳤어?”
그리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스틱세이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내일 도전해야지.”
불사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말했지, 불사 없이 싸우겠다고는 말 안 한 그리드였다.
“불사 없이 도전했다가 뒤지면 어쩌라고?”
“......”
과연 그리드.
이상만 쫓다가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자존심이 높은 것치고는 쉽게 굽힐 줄 안다. 괜히 멋 부리려고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면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적다. 보기에 멋지진 않지만 지극히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과연.... 일국의 왕이 될 만하군....’
주섬주섬.
갑자기 천을 꺼내더니 팬티를 만들기 시작하는 그리드를 보면서 새삼 감탄하는 스틱세이였다.
***
“으음.....”
게임 최대의 묘미는 득템에 있다.
그리드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의 결과물을 확인할 때만큼 득템한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는 것도 즐겁고 기대됐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는 알렉스를 레이드하고 획득한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두려워서였다.
‘데스나이트 알렉스의 실체가 약골이었다는 점이 문제야.’
과거의 알렉스였다면 모를까.
데스나이트화 되고 심지어 파그마라는 주인까지 잃은 데스나이트 알렉스는 전설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약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대 전설들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현재 플레이어 중에서 데스나이트 알렉스를 레이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드와 크라우젤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강력한 보스인 것이다.
하지만 스틱세이 때문에 그리드는 이미 알렉스가 약골이라는 인식을 품게 되었다.
약골 알렉스가 드롭한 아이템도 쓰레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결국.
“으으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