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13화
[예순 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이미 정화된 섬입니다.]
스틱세이를 뒤로하고 게이트에 발을 들인 직후.
61번째 섬으로 워프 된 그리드는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과 직면했다.
‘역시, 60번대 섬들의 보스는 리젠 되지 않는군.’
꼬마 요정 빈이 ‘61번 섬은 이미 공략되었다’고 표현했던 시점부터 쉽게 유추할 수 있던 부분이다.
애초에 번헨 열도는 ‘결말이 존재하는 콘텐츠’인 바, 스토리의 전개를 위해서라도 60번대 섬의 보스들은 유한해야했다. 비네임드 보스처럼 무한 리젠 되었다가는 번헨 열도 스토리가 결말을 맺지 못할 테니까.
‘60번대 섬들은 먼저 먹는 사람이 장땡이라는 뜻...’
선점이 중요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란스티어를 놓친 것이 뼈아팠다.
‘란스티어의 망토와 단검을 아그너스가 획득했을 가능성이...’
아이템만 얻었으면 다행이다.
아그너스의 직업 특성을 고려해봤을 때, 아그너스는 란스티어의 데스나이트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그건 너무 비약이 심한가? 만약에 놈이 란스티어의 데스나이트를 얻었다면, 이미 벨토 왕국 전쟁에서 꺼냈을 테니까?’
생각에 잠긴 그리드의 눈앞에 펼쳐지는 61번째 섬의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드넓은 초원을 보듬듯이 스쳐가는 선선한 바람이 민들레 씨앗을 눈처럼 퍼뜨렸고, 초원의 끝 너머에 자리 잡은 수평선은 일광을 보석으로 만들었다.
일전에 그리드가 찾아왔을 때는 황폐한 황무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저벅저벅.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 따위 부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번헨 열도에 도전하고 있으며, 그중 누군가는 이곳 60번대 섬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초조했던 것이다.
‘남은 보스는 전부 내꺼야.’
탐욕을 불태우는 그리드!
62번째 섬과 이어진 징검다리에 당도한 그가 망설임 없이 게이트에 입장했다.
동시에.
[예순 두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탕! 타탕탕!!
장소가 변경됨과 동시였다.
잠시 어두워졌던 그리드의 시야가 회복되면서 알림 창을 마주하는 순간, 반응할 틈도 없이 옥빛의 총탄 4발이 날아왔다.
62번째 섬의 수호자,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의 날카로운 기습이었다.
실제로 아그너스는 62번째 섬에 입장하자마자 이 기습을 허용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진행했었다. 비단 아그너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기습을 허용했을 것이다.
알렉스의 공격 속도는 0.25.
초당 4회의 공격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초당 4발의 총탄을 쏜다고 해석하면 되었고, 총이라는 무기는 모든 무기를 통틀어서 가장 명중률 보정이 높았으므로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알렉스의 기습에 대처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누군가?
템빨의 극의를 이루고 있는 자다.
그리드는 달랐다.
타타타탕!!
전투태세의 그리드는 늘 갓 핸드를 펼쳐놓았으며 그 효과는 가히 사기적이다.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갓 핸드들이 알렉스의 총탄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매너라고는 쥐뿔도 없군.”
알렉스를 비난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그리드가 앞으로 쇄도했다. 총을 다루는 알렉스를 수월하게 상대하려면 거리를 좁히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교과서적인 판단이었다. 뻔하다는 이야기다.
철컥!
데스나이트.
이성과 의지는 상실하였으나 생전의 전투 기술만은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
알렉스는 능수능란했다.
그리드가 거리를 좁혀오자마자 마법 공학 총검을 검 형태로 전환, 공격에 응수했다.
채채채챙!!
“...!”
검은 귀신에 결합시킨 무아지경의 칼날을 힘껏 휘둘렀던 그리드.
알렉스가 자신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반격까지 해오자 깜짝 놀란다.
‘공속이 왜 이렇게 빨라?’
최초에 총탄을 4발 연달아 날렸을 때는 무기의 특성이나 스킬이려니 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검으로 휘두르는 평타조차도 초당 4회 휘둘렀다.
진짜로 평타다.
버프를 켜거나 스킬을 사용하는 전조가 일체 없었다.
플레이어와 NPC 가릴 것 없이 ‘인간족’은 기본 공격 속도가 1(초당 1회 공격. 물론 이 수치는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에 따라서 늘어날 수도 있다)이라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공격 속도가 0.25로 추정되는 알렉스의 민첩성은 최소 8천으로 계산되었다.
‘아니, 그럴 리 없어.’
유라를 보건데 데빌 슬레이어의 코어 스탯은 무력과 지력이다. 최소한의 생존력을 위해서 체력에도 약간의 스탯을 투자해야했다. 데빌 슬레이어라는 클래스는 민첩성에 스탯을 안배할 여유가 아예 없었다.
‘그 부족한 민첩성은 총으로 충당하는 건 줄 알았는데?’
총은 무기 특성상 공격 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옵션이 잘 붙을 여지가 크다. 하지만 검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법 공학 총검이 검 모드일 때는 공격 속도 옵션이 안 붙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알렉스가 검을 들고도 평타를 4번이나 휘두를 수 있는 이유는 패시브와 특성에 있다고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데빌 슬레이어에게도 어쌔신이나 검사 계열 직업군처럼 공속을 올려주는 특성이나 패시브가 있다고?’
예를 들어서 어쌔신은 직업 특성으로 공격 속도가 상승하고 더불어서 패시브 스킬로도 공격 속도가 상승한다.
거기에 민첩성 스탯까지 꾸준히 찍어야하므로, 어쌔신이 모든 클래스 중에서 기본 공격 속도가 가장 빨랐다.
간단한 예로 페이커는 평균 초당 2회, 가끔 초당 3회의 평타를 날렸다.
‘대신 공격력이 약하지!’
쩌어엉-!
비단 페이커 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어쌔신들은 부족한 근력 스탯 탓에 발생하는 공격력의 부재를 액티브 스킬로 충당해야했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했을 때 어쌔신의 공격력은 극강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쩌정!
쩌저저정!!
그리드에게 휘두르는 평타 하나하나가 어쌔신과 비할 바 없이 강력했다.
알렉스는 어쌔신 이상의 공격 속도와 검사 수준의 공격력을 겸비한 것이다!
‘칫!’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알렉스의 평타 공격력이 갓 핸드를 경직시킬 수준은 못 된다는 점이었다.
갓 핸드 덕분에 버틸 수 있던 그리드가 틈틈이 반격을 날렸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아앙!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렉스는 평타만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초당 4회의 평타를 날리는 동시에 데빌 슬레이어 특유의 옥빛 폭발을 전개하여 그리드를 덮쳤다. 그것도 매번 기가 막히게 그리드가 반격의 기회를 엿볼 때만 전개하는 폭발이었다.
‘컨트롤까지 좋다니...’
매번 반격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이고 피해까지 누적되기 시작하자 그리드는 초조해졌다.
알렉스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절실히 느껴졌다. 현역 시절에는 당최 얼마나 강했을지 감도 안 잡혔다.
챙!
채채채채채챙!!
그래도 희망적인 사실은, 그리드가 치명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갓 핸드는 총 4개.
알렉스가 초당 4회의 공격을 휘둘러도 대부분 막아주었다.
그리드는 갓 핸드의 사기성에 새삼 경외심을 느끼게 되었다.
‘역시 템빨이 짱이라니까.’
위기 속에 찾아온 기회랄까.
알렉스의 평타를 계속해서 막아내는 과정에서 갓 핸드의 경험치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이제 갓 핸드의 경험치는 70퍼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알렉스와 한 달 내내 싸우면 갓 핸드의 등급이 레전드리로 성장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뒤지겠지...! 파그마의 검무!”
알렉스가 간헐적으로 사용하는 빛의 폭발을 무시하고 춤사위를 펼치는 그리드!
화르르르륵!!
그리드의 움직임을 따라서 호선을 그리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이 불꽃을 토한다. 그 모습, 마치 레드 드래곤의 검은 혀 같았다.
“연(聯)!!”
초당 4회의 평타?
초당 20회가 넘는 최강의 연격 스킬 앞에서는 허접할 따름이다!
쩡! 쩌저저정!!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
그리드가 신속의 검무를 펼치자 경계한 알렉스가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무의미했다.
알렉스는 그리드의 연격을 최초의 4회밖에 방어하지 못했고, 이어서 갓 핸드들이 휘두르는 묠니르에 적중되었으며 동시에 습격해오는 십수 발의 검격에 온몸이 베여버렸다.
본래 연(聯)은 보스 몬스터를 위협할 수준의 공격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으나.
[대상에게 240,55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35,900의 피해를....]
....
...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5천의 화염 데미지를 추가로 입힙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5천의 화염 데미지를....]
....
...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대상에게 3,673,8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
[대상에게 4,392,22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
[크리티컬!]
[대상에게 9,215,09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쿠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매 공격 시마다 일정 확률로 스킬이 발동되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진가는 연타 스킬과 결합되었을 때 발휘됐다.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검은 불꽃이 연(聯)의 부족한 공격력을 충당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최강의 단일 스킬 극살(極殺)의 존재 가치조차 희미하게 만들었다.
“.....대박.”
그리드가 <실패작>을 처음 사용했을 당시, <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연격>효과와 결합된 살(殺)이 선보였던 압도적인 공격력은 여전히 그리드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필드 보스조차 순간 삭제시켜버렸던 실패작의 파괴적인 위력에 그리드가 느꼈던 전율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한데 이 순간, 당시의 전율이 그리드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드가 새로이 체험할 수 있게 된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공격력은 실패작이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툭.
연속되는 폭발 데미지를 입은 알렉스.
생명력을 3분의 1가까이 소실한 그의 왼쪽 팔뼈가 어깨로부터 탈골되어 떨어져나갔다. 언데드가 폭발에 취약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이제 알렉스는 외팔이였다.
“......”
안 그래도 황량한 62번째 섬에 침묵이 찾아왔다.
유일한 화자인 그리드가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과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는 연(聯)의 위력에 너무나도 감탄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개쩌는데?’
천하무적이 된 기분!
피아로도 이길 것 같은 기분.... 아니, 그건 착각일 듯하다.
철컥!
한쪽 팔을 잃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일까?
그리드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거리를 벌린 알렉스가 마법 공학 총검을 다시 총으로 변환시켰다.
탕-!
타타타타타타타탕!!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때마다 4발의 총탄을 발사하는 알렉스!
중간마다 <연사>스킬까지 섞자 갓 핸드의 속도가 총탄을 따라잡지 못하기 시작했다.
총탄의 폭우가 갓 핸드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그리드의 몸 곳곳에 상처를 유발시켰다.
“큭!”
눈 깜짝할 사이에 피투성이가 된 그리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곳은 다름 아닌 번헨 열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에게 고배를 안겼던 극악 난이도의 인스턴트 던전이다.
템빨에 심취하여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가 이상적인 단검을 꺼내서 <신속한 몸놀림>을 전개, 알렉스에게 따라붙었다.
[5,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88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5,150의 피해를....]
....
...
성스러운 빛의 장갑도 포기하고 물리방어력에 특화 된 삼겹갑 세트로 무장한 그리드였지만 알렉스의 총탄은 강력했다.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그리드에게 계속해서 총알을 명중시키며 상당한 피해를 누적시켰다.
총 생명력이 아직 10만이 안 되는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가 빠르게 소실되었고, 이를 악문 그리드는 알렉스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리드의 목표는 불사 패시브가 발동하기 전에 알렉스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공격력이라면 가능하리라 보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리드와의 접근전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은 그는 그리드에게 두 번 다시 거리를 주지 않았다.
펑!
퍼퍼퍼퍼펑!!
[15,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아아아아악!!”
어느새?
아니, 미리 심어두었던 건가?
알렉스에게 돌진하던 그리드가 경로에 있는 지뢰를 밟고 폭발에 휩쓸렸다. 폭발의 위력이 어찌나 큰지, 그리드의 몸이 1미터나 뒤로 날아가서 바닥을 뒹굴었다.
데빌 슬레이어 특유의 마력이 담겨있는 지뢰였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삼겹갑 세트를 무장했더라도, 만약 흑화를 발동한 상태였으면 일격에 폭사 당했을 가능성이 높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력을 내포한 지뢰였다.
“제길...!”
쓰러진 그리드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때.
철컥!
알렉스는 권총 형태였던 마법 공학 총검을 저격 총으로 전환시켰다. 아직 유라는 선보인 적 없는-아직 사용하지 못하는- 스나이퍼 모드였다.
퍼어어어엉-!!
알렉스가 그리드의 미간을 정확히 조준함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알렉스의 머리통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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