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12화
<시신함>
네크로맨서 계열 직업군에게만 존재하는 인벤토리이다.
NPC와 몬스터의 시신을 총 다섯 구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창고로써, 네크로맨서들은 퀘스트나 이벤트에서 획득한 네임드급 NPC의 시신이나 레이드로 획득한 보스 몬스터의 시신을 이 시신함에 보관해두는 습성이 있었다.
보다 뛰어난 시신을 모으고 모아, 그중에서 선별한 최고의 시신을 데스나이트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즉, 시신함이란, ‘데스나이트 후보군 컬렉션’ 같은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아그너스에게도 시신함이 있었다.
<란스티어의 유골>
등급:레전드리
전설의 어쌔신으로 추앙 받았던 제25대 란스티어의 유골입니다.
“...이 녀석을 어서 써보고 싶지만 지배력 스탯을 올리기가 너무 힘들단 말이지.”
전대 바알의 계약자였던 파그마의 유산을 찾고자 번헨 열도를 찾아갔던 아그너스.
그는 61번째 섬에서 만난 란스티어와 이틀 밤낮을 싸웠다. 데스나이트와 리치들의 경험치를 몇 번이나 손실하고, 결국 리치화 패시브까지 발동하고 마는 등 더럽게 힘든 전투였다. 특히 스태미나를 안배하느라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도 오싹할 정도로 즐거웠다.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전설의 시신을 사용한 400레벨의 데스나이트...’
더군다나 란스티어는 어쌔신이다.
그 민첩함은 아그너스가 기존에 거느리던 데스나이트들과 비할 수가 없어서 마치 살아있는 존재 같았다. 그 위용, 리치 무무드와 비견할만하다고 아그너스는 확신했다.
‘레벨을 올려서 지배력을 충족시키고 란스티어까지 수족으로 부릴 수 있게 되면.’
일전에 고배를 마셨던 62번째 섬에 재도전하리라.
“....60번대 섬에 남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를 모조리 내 종으로 만드는 거야...”
아그너스는 이제 깨닫고 있었다.
번헨 열도에 있는 파그마의 유산이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와 그들이 무장한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더.’
더, 더, 더 강해져서.
‘모조리 다 때려 부숴주마.’
살육과 파괴만큼 즐거운 오락도 없다.
과거의 병신이었던 자신을 죽도록 괴롭혔던 그 쓰레기들의 심정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
“큭!”
상념에 잠겼던 아그너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휘청거렸다.
자신의 삶을 망치고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내몬 쓰레기들을 옹호할 정도로 비뚤어지고 왜곡된 스스로의 마음을 자각하자 지독한 두통을 느끼는 것이었다.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다.
“하아.... 하아.... 킥, 킥킥.”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혀로 핥으며 간신히 웃음을 토해내는 아그너스.
의미 없는 대소로 과거를, 현실을 외면하고자 애쓴 그가 버럭 소리쳤다.
“베라딘! 베라디인!!”
“부르셨습니까?”
황비 마리와 로즈 나이트가 기거하는 궁전.
마리의 심기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그너스의 목소리가 베라딘을 빠르게 소환했다.
서둘러서 달려온 베라딘에게 아그너스가 선언했다.
“지금 당장 번헨 열도로 가겠다.”
“네?”
베라딘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62번째 섬을 지키고 있는 데빌슬레이어 <알렉스>의 데스나이트는 아그너스와 극단적인 상성을 보이는 바, 현재의 아그너스는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그너스가 별다른 준비도 없이 번헨 열도로 떠나겠다고 하니 베라딘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재도전해봤자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왜 그런 무의미한 짓을...”
베라딘이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아그너스의 충혈된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음을 본 것이다.
“당신....”
“싸워야 돼...! 잊어야 된다고!”
“.....”
그렇다.
아그너스는 강자와의 사투에 오롯이 집중하며 머릿속에 가득 찬 과거와 현실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너무나도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의 마음, 베라딘은 뻔히 알고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마리 황비에게 가서 퀘스트를 받으시죠. 아직 번헨 열도는 안 됩니다. 무의미한 패퇴를 반복하며 약화될 뿐이고, 이는 결국 당신의 바람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테니까요. 자, 심호흡하고 냉정해지세요.”
“.....”
베라딘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으나 목소리는 마치 동굴 같았다. 낮은 울림에는 카리스마가 있었고 듣는 이에게 강렬한 신뢰를 주었다.
덕분에 아그너스의 마음이 차츰 진정됐다.
눈치를 살핀 베라딘이 말을 이었다.
“초조해하실 것 없습니다. 당신께서 힘을 갖추기 전까지 번헨 열도는 영원히 건재할 테니까요.”
번헨 열도의 난이도는 끔찍하다.
설령 크라우젤이라고 해도 번헨 열도를 답파할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두뇌를 기반으로 확신하는 베라딘이었고, 그 덕분에 이성을 되찾은 아그너스 또한 수긍했다.
“큭... 큭큭, 그래. 번헨 열도는 나중에 도전하도록 하지. 마리에게 가겠다. 그 미친년이 이번에도 재미있는 퀘스트를 준비해뒀기를 바라야겠군.”
***
“그리드에게 아그너스의 과거에 대해서 알리지 않는 이유가 뭐지?”
페이커의 질문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페이커는 그리드가 훗날 최대의 적이 될 아그너스에 대해서 숙지해두는 편이 마땅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라우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템빨단의 수뇌부와 아그너스의 과거를 공유한 반면 그리드에게만큼은 함구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리드 님은 모질지 못해요.”
얼핏 보기에는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지만, 어디까지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으로 줄을 긋는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인정이 넘친다는 뜻이다.
만약, 그가 아그너스의 과거를 알게 된다면?
“과거를 약점으로 삼기는커녕 도리어 동정할 가능성이 높죠. 사이코패스를 상대하기에는 방해되는 감정입니다.”
“.....”
페이커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알기로 그리드의 인정은 ‘자신의 사람들’에게로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드가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풀 리 없다고 보았다.
라우엘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아그너스의 과거는 그리드 님의 과거와 겹치는 면이 있어요. 그리드 님이 동질감을 느낄 공산이 크다는 뜻이며, 이게 곧 동정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무게는 다르다.
아그너스가 당했던 괴롭힘은 그리드가 당했던 괴롭힘과 비교해서 훨씬 더 큰 것이었다.
하지만 똑같이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사람의 고통은 고하를 논할 수 없다.
“기왕이면 두 사람이 엮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바람을 말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는 라우엘의 눈빛은 간절했다. 그는 아그너스가 그리드에게 필시 독이 될 거라고 보고 있었다.
아그너스가 아픈 과거를 보낸 것은 불쌍한 일이지만, 과거를 핑계로 비뚤어진 것을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를 잠자코 지켜보던 페이커가 질문했다.
“베라딘이 아그너스를 섬기는 이유는 뭐지?”
베라딘은 루키 시절부터 유명했던 인물이다. 라우엘과 쌍벽을 이뤘을 정도였고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여전히 최고였다.
그만한 인물이 아그너스를 섬긴다는 것이 페이커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다.
라우엘이 충격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베라딘은 아그너스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실험체로 여기고 관찰하는 것일 걸요?”
“....실험체?”
“놈은 심리학자거든요.”
“.....”
결국, 아그너스는 지금도 세상에 혼자인 것이다.
지독히도 불쌍한 자라고 라우엘은 생각했다.
***
[예순 번째 섬에 입장하였습니다.]
번헨 열도.
61번째 섬에서 고배를 마셨던 그리드가 마지막 세이브 포인트에 등장했다.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엘프-하지만 남자- 스틱세이도 함께였다.
“문득 든 생각인데 말이지. 66번째 관문의 수호자는 뮐러의 데스나이트 아닐까?”
브라함조차도 인정한 역대 최강의 전설 뮐러.
만약 그를 만났다가는 번헨 열도의 정복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스틱세이가 그를 안심시켰다.
“제아무리 파그마가 바알과 계약했다고 해도 뮐러를 데스나이트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영혼마저도 고결한 존재였으니까요.”
“...역시 독보지존이라 이거군.”
죽어서도 건재했다는 뜻인가.
감탄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틱세이! 스틱세이! 스틱세이!!”
스틱세이가 없는 동안 대신 번헨 열도의 도전자들을 이끌어준 꼬마 요정 빈의 목소리였다.
뭐가 그리도 급한 건지, 호들갑을 떨면서 날아온 녀석이 그리드와 스틱세이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헥헥.”
어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지만, 서둘러 날아오느라 체력을 크게 소모한 듯하다. 숨을 헐떡이느라고 한참을 말 못하는 녀석이었다.
‘저래서 운동이 중요해.’
오늘 밤에도 팔굽혀펴기를 200회, 스쿼트와 풀업을 각 100회씩 채우고 잠들리라!
포기를 모르는 그리드가 벌써 몇 해째 해오고 있는 운동 계획을 되새김하는 그때였다.
“61번째 섬이...! 61번째 섬이 공략 당했어요!!”
“뭐라고?”
그리드와 스틱세이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란스티어의 데스나이트.
신속함과 은밀함이 극의에 달했고 극강의 공격력까지 발휘하는 그 괴물 중의 괴물을 과연 그 누가 퇴치했단 말인가?
‘대체 누가?’
플레이어 최초로 레전드리 클래스를 확보하고, 이후 끊임없이 성장하며 달려온 그리드이다.
한데 이 순간 또 뒤처진 것이다.
그리드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다. 레전드리 클래스를 선점한 주제에 매번 뒤처지는 자신의 저급한 재능이 원망스러웠다.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꼬마 요정 빈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했다.
“아그너스...! 아그너스라고 했어요!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다구욧!!”
“아그너스?”
전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내게 고배를 마시게끔 만들었던 그놈이, 지금은 또 내 앞에 서있다고?
그리드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의 눈빛은 국가 대항전에서 크라우젤을 마주했을 때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
평소의 그리드는 격정에 휩싸일 때마다 냉정함을 잃었다.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62번째 섬은? 놈이 62번째 섬도 돌파했나?”
그리드에게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경쟁자’라고 인식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제아무리 격정이 몰아치더라도 머리만큼은 냉정해지는 것이었다.
“62번째 섬은 공략 못했어요. 총 몇 방 맞더니 죽고 다시는 안 왔어요.”
“총? 62번째 섬은 전대 데빌슬레이어가 지키고 있단 건가?”
<흑화>를 봉인하고 싸워야한다는 뜻.
하지만 그 정도 페널티는 감수해야 하리라.
‘나는 66번째 섬까지 공략해야 돼. 62번째 섬 따위는 흑화 없이도 돌파해야지.’
아직 레전드리 등급으로 진화하지 못한 아그너스조차도 61번째 섬을 공략한 마당이다.
레전드리를 넘어서 신화를 엿보기 시작한 자신이 그보다 못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바로 62번째 섬으로 간다.”
검은 귀신에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을 부착시킨 그리드가 말하자.
“건투를 빕니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스틱세이가 그를 응원했다.
반면 꼬마 요정 빈은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그, 그 미친 인간조차도 실패한 62번째 섬을 당신이 도전해서 뭐해요! 당신은 61번째 섬도 돌파하지 못했잖아요!”
“그건 옛날이고.”
스파앗-
콧방귀 뀐 그리드가 눈앞에 생성되어있는 게이트로 발을 들였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빈이 어찌할 줄을 몰랐다.
“스, 스틱세이. 말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 사람 또 죽을 거라고욧!”
“아니.”
“...?”
“저분은 번헨 열도를 정화하고 영웅왕의 칭호를 거머쥐실 분이란다.”
의미심장하게 말한 스틱세이가 수정구를 꺼냈다.
순간, 수정구 속 그리드의 모습을 발견한 꼬마 요정 빈의 커다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검은 불꽃이 알렉스의 데스나이트를 날려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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