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11화
“으음.... 번헨 열도라.”
그리드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기상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우엘의 생각은 달랐다.
“61번째 섬의 수호자가 전설의 어쌔신 란스티어라고 했었지요?”
“정확히 말하면 데스나이트가 된 란스티어지. 그것도 파그마의 템빨을 무장한 개사기 데스나이트!”
“필시 강하겠네요. 하지만 문제될 게 없는 것이, 전하께서는 이미 진즉에 란스티어 대처법을 세워두지 않았습니까? 란스티어의 공격력을 허무로 돌릴 수 있는 방어구를 제작하셨잖아요?”
물리 저항력에 특화된 삼겹갑, 란스티어의 망토, 뿔 투구, 큰 장갑을 말함이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로 돌린다는 오글거리는 표현을 써도 될 수준은 못 된다만.... 확실히, 이제 전처럼 몇 대 맞고 의문사하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탱만 되면 뭐해?”
그리드가 걱정하는 부분은 무기에 있었다.
“이번에 내가 제작한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은 마검이야, 마검. 신성한 존재에게 극상성으로 작용하는 무기지 언데드를 상대로는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데스나이트 란스티어는 엄밀히 따져서 암흑속성 몬스터로 분류된다.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에 귀속된 옵션 ‘암흑 속성 데미지 30퍼센트 추가’가 녀석에게 힐로 작용할 것이었다.
회피율이 극단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모자라서, 네임드 보스 몬스터답게 피통까지 높을 녀석을 무아지경의 검으로 처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흐음.... 우선은 성검부터 만들어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는 편이 확실하겠지.”
“일리가 있군요.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고 도전했다가 사망 페널티라도 얻었다가는 큰일이니... 그렇다면 성검의 재료로 사용할만한 광물은 확보하신 겁니까?”
“미스릴 계열의 광물이야 뭐, 거래소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
“미스릴이라고요!!”
갑자기 버럭 소리친 라우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격한 반응에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왜 흥분하고 그래?”
“제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습니까! 명색이 성검이라고요, 성검! 근데 고작 미스릴 따위로 제작하시겠다고요?”
“.....”
마(魔). 특히 언데드에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미스릴은 상급 제작 재료에 속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에게나 통용되는 인식이었다.
“전하의 마검은 벨리알의 뿔로 만든 것이 아닙니까? 전하께서 사용하실 성검이라 하면, 응당 벨리알의 뿔과 동급의 제작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해야 그럴듯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칼날>은 신화급 무기이다.
언데드를 상대한다고 가정해 봐도, 레전드리 등급의 미스릴 무기보다 무아지경의 칼날이 더 높은 위력을 발휘할 공산이 컸다.
“맞네. 내가 직접 사용할 무기를 어중간한 제작 재료로 만드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겠군.”
“제 말을 제대로 이해하셔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그리드 전용의 무기는 모두 ‘최소’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과 동급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의미가 있었다.
깨달은 그리드가 난감해졌다.
‘...그럼 성검의 재료는 대체 어디서 구해야 되지?’
아다만티움조차 벨리알의 뿔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벨리알의 뿔과 동급 이상의 성스러운 제작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천사라도 잡아야 되는 거야?’
무슨 명목으로?
‘아니, 천사랑 만날 수는 있나?’
그리드의 머릿속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그리드 님 계십니까?”
대현자 스틱세이가 찾아왔다.
라우엘이 미리 호출해놨던 것이다.
“번헨 열도에 가시겠다고요?”
스틱세이의 염원은 번헨 열도의 정화였다. 번헨 열도가 명예의 전당으로써 재기능을 회복하길 바랐다. 그리드가 번헨 열도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하니 그는 무척 반가웠다.
그의 환한 얼굴을 확인한 그리드가 뺨을 긁적였다.
“아니, 시기를 좀 미뤄야할 것 같은데.”
그리드는 스틱세이가 납득할 줄 알았다.
스틱세이는 60번대 섬의 수호자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뻔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스틱세이의 반응은 의외였다.
“왜 미루시겠다는 겁니까?”
“왜라니? 그야 내가 아직 약하니까?”
“네??”
“.....”
황당하다는 반응!
그리드가 당황했다.
“뭐야, 그 반응은? 란스티어의 강함은 스틱세이 당신도 알고 있잖아? 전에 나 손도 못 쓰고 당했었다고?”
“그거야 옛날이야기죠. 주인 잃은 데스나이트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반면 당신은? 온갖 방어구와 묠니르에 이어서 새로운 무기까지 갖추었으니 전과 비할 바 없이 강해졌지요. 지금의 당신이라면 란스티어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
라우엘과 스틱세이.
똑똑한 사람들이 자꾸만 란스티어를 허접 찌끄레기처럼 말하자 그리드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
그리드는 번헨 열도에 처음 도전했을 당시와 비교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템빨이 몇 배나 더 강화됐고 캐릭터 레벨과 스킬 레벨도 꾸준히 올려왔다. 세상의 구원자와 최초의 왕 등 전설급 칭호들까지 획득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과거에 란스티어에게 당했던 충격이 너무 커서 객관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령 당신의 말대로 내가 란스티어를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번헨 열도는 61번째 섬이 끝이 아니라 총 66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잖아? 란스티어를 해치우더라도 연달아서 전대 전설들의 데스나이트와 싸워야할 텐데, 기왕이면 성검을 준비해가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어?”
“데스나이트가 악한 존재이므로 성검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시는가 보군요.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악한 존재이기에 앞서서 언데드입니다. 빛 속성뿐만 아니고 폭발 공격에도 취약하죠.”
언데드의 내구력은 약하다. 물론 고레벨 언데드의 경우 방어력도 높았지만 방어력과 내구력은 다른 개념이다. 제아무리 방어력이 높아도 강한 폭발에 휩쓸릴 경우 뼈마디가 분리되고 약화되는 현상을 겪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당신께서 이번에 제작한 마검이 폭발의 이능을 간직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어지간한 성검보다 언데드를 쉽게 격파할 수 있으실 겁니다.”
“.....”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어졌다.
스틱세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리드의 위축되었던 마음이 해방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번헨 열도가 X밥이라 이거지?”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고...”
“됐어! 좋아, 가자! 가! 당장 가자고!”
생각해보면 좀 서럽기도 하다.
명색이 국왕인데 자꾸만 출장을 강요받다니 말이다.
‘국왕이 아니라 샐러리맨이 된 기분!’
왠지 모를 소외감에 투덜거리던 그리드가 떠나기에 앞서서 라우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내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어? 만약 제국이 쳐들어오면 위험하지 않아?”
제국이 군대를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그리드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제국에게는 적기사단이 있었다.
이번 달부터 제국에 공물을 바치지 않겠노라고 계획한 라우엘이 계획을 실행에 옮길 경우, 제국은 적기사단의 무력을 앞세워서 템빨국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았다.
걱정하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안심시켰다.
“제국령 루반나에서 무패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입니다. 적기사단이 대규모로 파견되었다더군요. 아레스가 제국의 사신을 물리칠 수 있었던 근거 중 하나죠. 제국은 우리를 당장에 어찌할 여력이 없습니다.”
“무패왕의 후예...?”
무패왕 마다라에 대해서는 그리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부바트가 무장한 무패왕의 보구 세트를 본 해설진들이 마다라에 대해서 실컷 떠들었었다.
“제국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루반나의 왕....”
설마!
“부바트가 무패왕의 후예가 된 건가?”
부바트는 ‘반드시’ 명중하는 상태 이상 기술을 선보인 바 있다. 녀석이 무패왕의 힘까지 갖게 되면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경계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벌써부터 그를 신경 쓸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패왕의 등장은 도리어 템빨국과 발할라를 도와주고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며, 훗날 우리의 적이 될지 몰라도 당장은 반겨야했다. 벌써부터 경계하기에는 성급한 면이 있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
번헨 열도는 역대 전설들의 업적을 기리는 명예의 전당이자, 전대 전설과 당대 전설을 잇는 계승의 장이었던 곳이다.
인계(중간계)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 악마들의 표적이 되었다.
하찮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전설들을 경계한 대 악마들.
그들은 원활한 인계 정복을 위하여 번헨 열도를 침공하였고, 바로 이때 파그마가 나섰다.
제1위 대 악마 바알과 계약하여 초월적인 힘을 얻은 그는 번헨 열도를 개조, 대 악마들을 요격하여 결과적으로 인계를 수호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인해서 번헨 열도는 더 이상 재기능을 할 수 없게 됐다.
파그마의 손에 의해 개조 된 번헨 열도는 더 이상 명예의 전당도, 계승의 장도 아니었다. 오로지 침입자를 해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버렸다.
스틱세이는 이곳을 ‘오염 됐다’고 표현한다.
“화공 파그마의 선택과 위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그마가 없었다면 지금쯤 중간계는 악마들의 놀이터가 되어있었겠지요. 저도, 당신도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파그마는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죠.”
하지만.
“파그마의 선택은 중간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번헨 열도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역대 전설들의 위업과 비전이 소실되었고, 그 탓에 당대 전설들이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아, 피아로 님처럼 스스로 새로운 전설의 경지를 개척한 사람들은 논외로 치죠.”
“사람‘들’? 피아로 외에도 새로운 전설이 된 인물이 또 있다는 말이야?”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죠. 지금쯤 어딘가에서 새로운 인간이, 혹은 엘프가 자신의 분야에서 극의를 이루고 전설이 되었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지만 말이죠.”
“....하긴.”
Satisfy는 지구처럼 넓다.
스틱세이는 인간과 엘프만을 예로 들었지만, 드워프와 오크 등의 다른 이종족들 중에서도 전설이 태동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새로운 전설은 반드시 나타날 거야.’
그래야 기존의 전설들을 견제할 수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S.A그룹이라면, 게임 난이도를 높인답시고 또 어떤 개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치를 떠는 그리드의 어깨 위로 스틱세이가 손을 얹었다.
“출발하겠습니다.”
스틱세이가 그리드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 컸다.
파그마가 오염시킨 번헨 열도, 파그마의 후예인 그리드가 정화시키는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명예의 전당과 계승의 장을 복원하고 전설들의 영웅이 되시기를.”
‘전설들의 영웅....’
영웅들의 영웅이라는 것과 진배없는 표현이다.
‘이 내가 연예인들의 연예인, 원빔 같은 존재가 되는 건가?’
그리드가 전율하는 순간.
스파아앗-!
시야가 검게 점멸했다.
좌표를 번헨 열도로 입력한 스틱세이의 매스 텔레포트가 발동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