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9화
“....개당 58골드짜리인데.”
국가 메뉴 <시설>탭에서 구매, 설치할 수 있는 <훈련용 허수아비>는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군사 용품답게 값이 꽤 나가는 편이다.
한데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무려 219개의 허수아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왜?
다름 아닌 그리드가 때려 부쉈단다.
‘어째서 죄 없고 값비싼 허수아비를 파괴하신 거지? ...가만, 그리드 전하께서는 벨리알의 뿔로 마검을 제작하겠다고 하셨었는데?’
부들부들.
치미는 화에 몸을 떨던 라우엘이 문득 그리드를 걱정하였다.
‘설마, 아이템 제작에 실패라도 하신 건가?’
짠돌이 그리드가 당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국가 용품을 때려 부쉈겠는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벨리알의 뿔로 만든 무기가 만족스럽지 않게 완성되었으면 화가 나셨을 법도 하지.’
아그너스라는 강자를 만난 직후이다.
안 그래도 초조할진데 무기 제작까지 실패하셨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이런... 나라도 위로해드려야겠어.’
신하이자 동료이기에 앞서 친구로서 그리드를 걱정한 라우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애써 외면한 그가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보내려하는 순간이었다.
“하이, 히사시부리.”
벌컥, 집무실 문이 허락도 없이 열리더니 교황 데미안이 찾아왔다.
이사벨과 한창 연애 중인 그의 얼굴은 싱글벙글, ‘나 요즘 연애하는 중이요’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성스러운 교황 성하께서 어찌 예까지 발걸음을? 교황청 축제 준비로 한창 바쁠 시기 아닙니까?”
라우엘은 데미안을 무척 좋아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면이 있었던 까닭이다.
“야레야레... 제가 바빠 봤자 템빨국의 브레인인 라우엘 님만 하겠습니까? 레베카 여신의 신전들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해볼 겸 놀러 왔지요.”
데미안은 교황의 자격으로 라인하르트에 총 3개의 레베카 신전을 건설했다. 그리고 신전마다 50명의 사제와 100명의 성기사를 배치하였다.
하지만 누차 말한 바 있듯이 사제는 귀한 존재다.
NPC사제를 다수 배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데미안은 플레이어 사제들에게 퀘스트를 주고 그들이 템빨국에 머물도록 유도했다.
결과적으로 신전마다 많은 수의 사제들이 머물게 되었다지만, 과연 그들이 템빨국에서 제대로 활동하는 중일까?
데미안은 솔직히 못미더웠다.
“얼마 전 임모탈과의 전쟁 때, 그리드 님께서 사제들을 대동하지 않으신 걸 보고 영 찝찝했습니다. 사하란 제국이 사제들을 유혹하여 빼돌린 것은 아닌지요?”
걱정하는 데미안에게 라우엘이 웃어보였다.
“아닙니다. 사제들은 여전히 템빨국에 머물면서 왕성한 활동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그리드 전하께서 사제들을 대동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고요. 아그너스의 출현을 미리 예측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최근 제국이 템빨국에 머무는 우리 사제들에게 접근을 시도하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어서 걱정했거든요. 다행히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
헛소문이 아니다.
사하란 제국은 템빨국을 대놓고 압박하는 중이었고, 실제로 레베카교 사제들을 빼돌리기 위한 수작도 걸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페이커 님이 바쁘시지.’
템빨국을 보위하는 그림자.
살신 페이커가 레베카교 사제들을 항시 감시 중이다. 제국의 첩자들이 사제에게 접촉을 시도하기 전에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개인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중책을 수행하게 된 페이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라우엘이었으나, 페이커가 얼마 전에 좋은 소식을 전달해왔다.
“제국의 첩자들을 사냥하다보니 레벨이 빠르게 오르더군.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배는 낫다.”
거짓은 아닌 듯하다.
페이커의 레벨은 사냥터에 나가있는 다른 템빨단원들보다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사하란 제국의 비열한 마수가 도리어 페이커를 돕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카심 님께서도 페이커 님에게 관심을 가진 듯하고.’
그림자의 왕이자 란스티어의 제자였던 카심은 피아로, 아스모펠과 동급의 네임드 NPC이다.
그가 페이커에게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어쩌면, 페이커는 히든 퀘스트를 토대로 란스티어의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었다.
‘....페이커 님도 그리드 님과 비등할 정도로 강해질 수도.’
페이커는 보통 템빨단원들과 달리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다. 각종 행사와 전투 등에서 활약한 횟수가 다른 템빨단원과 비교해서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페이커가 약해서가 아니라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이었다.
페이커는 지슈카 이상의 재능, 레가스 이상의 열정, 폰 이상의 이성을 지닌 인물인 바, 발전 가능성은 실로 무궁무진하였다.
‘직업 특성상 개인 활동 시간이 적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제국의 첩자들을 사냥하면서 성장하는 한편 란스티어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면....
“...님? 라우엘 님?”
“아, 이거 죄송합니다.”
상념에 잠겼던 라우엘이 데미안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 차렸다. 데미안이 그를 안쓰럽다는 듯이 보았다.
“요즘에도 대부분의 업무를 혼자 보시는 겁니까? 그러다가 탈모 더 심해집니다. 인력 좀 구하시죠?”
“하하,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행정 업무를 보는 인원을 대폭 늘린 상태이니까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여느 국가와 마찬가지로 템빨국 또한 인력 구하기에 열성이었다. 수시로 시험이나 대회를 개최하여 NPC며 플레이어며 가릴 것 없이 각 분야의 인재를 모집했다. 더군다나 대현자 스틱세이가 교육시키는 NPC들의 성장률이 높아서 템빨국의 인력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라우엘의 업무량은 몇 달 전보다 몇 배나 줄었다. 그래도 여전히 살인적인 스케줄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한데 어디 가시려던 길 아니었습니까?”
“아, 마침 그리드 전하를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아이템 제작에 실패하여 상심이 크신 듯해서요.”
“아니, 뭐라고요? 그리드 님이 아이템 제작에 실패하셨다고요!?”
데미안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전설의 대장장이이신 그리드 님께서 아이템 제작에 실패하시다니!!”
“.....”
그리드는 대장 기술만으로 이사벨을 구원한 인물이다.
데미안이 경험한 그리드의 대장 기술은 남들이 평가하는 것보다 수천, 수만 배 더 위대한 것이었다. 한데 그리드가 아이템 제작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데미안이 받은 충격은 무척 컸다.
때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반트너가 그의 절규를 듣고 달려 들어왔다.
“뭐라고!! 그리드가 아이템 제작에 실패했다고?!”
대머리 반트너의 목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크다. 각종 언변 스킬을 보유한 웅변가 후로이 다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다.
“갓리드가 아이템 제작에 실패했다는 말이 사실이야?”
“그리드가 만든 무기가 노말로 떴다고?”
“아니, 아예 무기 제작에 실패했대! 재료만 날렸다고 하더라!”
“미친...! 그리드의 대장장이 기술 레벨이 떨어졌단 말이야?!”
“그리드가 전설의 대장장이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소문이란 과장되고 와전되기 마련!
급기야 그리드가 전설의 대장장이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템빨단이 혼란에 빠졌다.
“아그너스와의 전투에서 강제 동화 상태를 유지했을 때 페널티 같은 게 생긴 건가?”
“이제 그리드는 전설의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설의 대마법사가 되는 거야?”
“이럴 수가... 템빨왕이 대장장이가 아니라 마법사라니.... 그럼 더 이상 템빨왕이 아니잖아?”
“마법왕으로 이름 바꿔야지....”
“그리드의 상심이 얼마나 클까...!!”
멋대로 오해하고 해석한 템빨단원들이 라인하르트 전역을 수색하였다.
어딘가 숨어서 홀로 괴로워하고 있을 그리드를 찾는 거였다.
데미안도 함께였다.
그리고.
“찾았다!”
템빨단원들은 대 연병장에서 그리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허수아비 수백 개를 때려 부순 그리드는 라우엘의 잔소리가 두려워서 난감해하고 있던 차이다.
“저 기죽은 표정 좀 봐!”
“소문이 사실이었어....”
“그, 그리드, 괜찮은 거냐?”
“....?”
왜들 저 난리지?
격렬하게도 걱정해오는 템빨단원들이 그리드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달려왔다.
“그리드 님! 아이템 제작을 말아먹으셨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리드 님이라도 늘 잘날 수는 없는 거겠죠! 오늘만 날이겠습니까? 이번 아이템 제작에는 비록 실패하셨다고 해도 다음 아이템을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라는 거야.”
지존 무기 만들고 기뻐하고 있는 사람한테 찾아와서 말아먹었다느니, 실패하였다느니 지껄이는 의도가 뭔지 영 이해가 안 된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자신의 가슴을 떵, 떵, 때려보였다.
“저를 때리십시오!”
“...??”
“국가대항전에서 저와 겨뤄보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튼튼합니다! 안 죽어요! 저를 실컷 때리면서 상심한 마음을 달래세요! 스트레스를 해소하라고요!”
템빨단을 대표하는 탱커 반트너와 토반도 나섰다.
“우리도 때려라! 실컷 맞아주마!”
“아그너스 때부터 쭉 스트레스가 쌓였을 텐데 마음 한 번 시원하게 풀어봐! 자, 와라!”
“...오호.”
안 그래도 평타 데미지밖에 실험하지 못해서 아쉽던 차이다.
마음 같아서는 5천 개의 허수아비를 모조리 때려 부수면서 무아지경의 검의 위력을 만끽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샌드백들... 아니, 친구들이 나서주자 그리드는 기꺼운 마음으로 응했다.
“좋아, 대결 신청 받아. 혹시 죽더라도 경험치 안 떨어지게.”
“죽기는 무슨.”
“우리 이래 봬도 탱커야.”
“아니, 그리드 님. 국가대항전에서 제가 얼마나 튼튼했는지 잊으신 겁니까? 저는 그때보다 몇 배나 튼튼해졌다고요. 그냥 실전처럼 마음껏 때리면서 화풀이하세요. 얼마든지 버텨 보이겠습니다.”
“후회 안 하지?”
싱긋, 미소 지은 그리드가 검은 귀신에 부착시킨 무아지경의 검을 힘껏 휘둘렀다.
표적은 데미안이었다.
순간.
퍼어어어어어어어어엉-!
데미안과 충돌한 검으로부터 검은 불꽃이 폭발하였고....
“타, 타이무!! 스타푸!!!”
피해량을 확인한 데미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는 사색이 되어있었다.
“대, 대결 신청부터...!”
“싫은데?”
그리드는 이미 손맛을 봤다.
‘신성한 존재에게 50퍼센트 데미지 추가’ 옵션까지 적용 된 무아지경의 검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자랑했고 그리드는 흥분했다.
“우와아아악! 야메떼!! 야메떼 구다사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그리드로부터 도망치는 데미안.
방어 버프를 둘둘 두르기 시작한 그로부터 조금 전까지의 자신만만한 기색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
“....검 제작 망했다지 않았냐?”
반트너와 토반은 이미 슬금슬금 뒷걸음치고 있었다.
각국 Satisfy 커뮤니티에 그리드 찬양글이 도배되기 시작한 이날,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의 신무기 위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본격적인 템빨 신화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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