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8화
“템빨왕 전하!!”
대 연병장.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아스모펠이 그리드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과연 무인은 무인인지, 그리드의 허리춤에 매달려있는 묵색의 칼날에 관심을 보이는 그였다.
“특이하게 생긴 무기로군요?”
손잡이 없는 칼날이라니, 저걸 과연 무기라고 칭해도 될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아직 제작 과정이 끝나지 않은 검입니까? 아!”
질문하던 아스모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드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묵색 칼날, 갑자기 홀로 용암처럼 달아오르더니 이내 불꽃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피어오르는 꽃처럼 펼쳐졌다가 덧없이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그리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멋지지? 아스모펠 네 무기처럼 벨리알의 뿔로 제작한 칼날이야. 그리고 이래 봬도 완성품이지.”
긴 설명은 필요 없다.
달칵!
검은 귀신의 소도 부분을 꺼낸 그리드가 땡기미의 버튼을 누르자.
휘리리릭!
철컥!!
은사에 이끌린 묵색 칼날이 검은 귀신에게 날아와 부착되었다.
“허.... 이제 보니 칼날 안쪽에 깊은 홈을 파놓으셨군요.”
“응, 소도의 칼날 부분에 칼집처럼 꽂힐 수 있게끔 유도했어.”
“화려하군요. 전투 도중에 발사해서 적에게 예상치 못한 일격을 먹일 수도 있을 테고.”
“음, 뭐... 그런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
아스모펠과 대화를 나누면서 연병장을 가로지르는 그리드.
그의 위엄 넘치는 모습이 병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연병장에 가득한 수천 병사들이 훈련도 잊고 그리드를 주목했다.
개중에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한때 코크로 섬에서 극검과 활약했던 솔져와 마찬가지로 ‘군인’ 클래스를 보유한 플레이어들.
그들이 강대국 사하란 제국도 아니고 템빨국 군대에 입대한 이유?
그리드를 선망한다거나 하는 고상한 이유도, 템빨국의 미래가 제국보다 찬란할 거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지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원해서였다.
그렇다.
그들은 템빨국 군대에서 받을 수 있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이를 토대로 템빨을 갖추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만 이루면 언제든지 템빨국을 떠나버릴 여지가 있는, 불완전한 병력인 것이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만 아니었으면.’
‘제국군에 입대했거나 아레스의 군대에 입대했지.’
‘우리들 군인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그리드보다야 제국이나 아레스가 훨씬 더 메리트가 크니까.’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받고 떠난다고 해서 먹튀도 아니다. 그들이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얻기 위해서는 템빨국의 발전에 일조해야했으니 상부상조인 셈이다.
“응? 뭘 하려는 거지?”
템빨국을 ‘거치는 단계’쯤으로 인식하는 플레이어 병사들.
NPC 병사들과 달리 그리드를 감흥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드가 연병장 한쪽에 배치된 허수아비 앞에 섰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실소했다.
“병사들 앞에서 무용을 선보이고 군대의 사기를 높일 요량인가본데?”
“풋....”
그리드의 강함은 만천하가 알고 있다.
물론 플레이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플레이어 병사들은 얼마 전 벨토 왕국에서의 전투를 기억하고 있었다. 국가 대항전에서는 크라우젤에게 패배하고, 벨토 왕국에서는 아그너스에게 수세에 몰렸던 그리드를 그들은 ‘2인자’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솔직히 웃겼다.
‘하기야, NPC 병사들은 우물 안 개구리 같아서 크라우젤과 아그너스가 누군지도 모르겠지. 그리드가 그저 최고인 줄 알고 그가 무용을 선보이면 찬사를 보낼 거야.’
‘그리드는 병사들이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할 테고.’
지금, 플레이어 병사들은 그리드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잘난 그리드를 시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격지심이 심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이들 또한 그리드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드의 작은 흠이라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이를 비난함으로써 자위하고자 애쓸 뿐이다.
“음.”
한편, 그리드는 플레이어 병사들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템빨국 군대에 입대한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병풍 취급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리드가 연병장을 찾아온 이유는 스트레스도 풀 겸 무기의 위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지 병사들을 살피러 온 것이 아니다.
“실험해볼까.”
화르륵!
불꽃이 점멸하는 묵색의 검을 거머쥔 그리드.
방어력과 저항력이 0으로 고정되어있는 훈련용 허수아비를 그가 평타로 때렸다.
하지만 위력과 이팩트는 평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쩌어어어어엉-!!
“....!!”
이번에 신화급 아이템을 제작하고 모든 스탯이 또 10씩 상승한 그리드의 총 근력 수치는 3,120.
3차 각성한 근력 스탯은 1당 0.4의 공격력을 올려줬으므로 3,120의 근력은 1,248의 공격력을 보장한다.
여기에 <물리 공격력 20퍼센트 추가>, <화염 속성 공격력 30퍼센트 추가>, <암흑 속성 공격력 30퍼센트 추가> 옵션이 합산 된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공격력이 6,300.
그리드는 화염 내성과 암흑 내성이 없는 대상에게 총 7,548의 공격력을 발휘한다는 뜻이 되었고, 거기에 플러스알파로 <파그마의 검무>Lv.4와 <중급 웨폰마스터리>Lv.5의 효과까지 중첩 적용됐다.
<파그마의 검무>Lv.4는 비활성화 시 공격력을 34퍼센트, <중급 웨폰마스터리>Lv.5는 항시 공격력을 17퍼센트 상승시켜주는 바.
[대상에게 11,39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치명타도 터지지 않은 그리드의 ‘평타’가 허수아비에게 1만 이상의 데미지를 입힌다.
쿵-!
“...!!!”
1만 이상의 데미지를 입었다는 증거로 뒤로 완전히 나자빠졌던 허수아비가 곧바로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자 병사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고, 그리드는 허수아비에게 2격, 3격, 4격을 연달아 날렸다.
쩡! 쩌정! 쩌저정!!
[대상에게 12,53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3,791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15,17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중첩시킬 때마다 데미지를 상승시켜주는 검은 귀신의 효과가 발휘되면서 허수아비가 더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다.
“...어?”
플레이어 병사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드가 스킬을 사용하는 것 같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수아비가 얻어맞을 때마다 뒤로 벌러덩벌러덩 자빠졌으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서, 설마, 평타 한 방의 데미지가 1만 이상이라는 거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병사들이 설마, 설마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그때.
쩌어엉-!!
[크리티컬!]
[칭호 <한 방의 한 놈!> 효과로 크리티컬 데미지가 30퍼센트 추가됩니다!]
그리드의 평타에 크리티컬이 적용됐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 방의 한 놈!>칭호와 마찬가지로 <파그마의 검무> 또한 크리티컬 데미지를 상승시켜준다는 점이다. 레벨 4의 파그마의 검무가 상승시켜주는 크리티컬 데미지는 무려 20퍼센트.
플레이어들의 기본 크리티컬 데미지가 200퍼센트인 것에 반해 그리드의 크리티컬 데미지는 250퍼센트 이상이었다. 어쌔신과 비등한 수치였다.
[대상에게 41,718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콰작-!
“......저거 평타 아니지?”
‘5만 이하의 데미지를 버틴다’는 옵션을 보유한 허수아비가 반파되어버리자 플레이어 병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허수아비를 재차 또 때리고 있었다.
[<+8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옵션 효과로 <5연격> 스킬이 발동합니다!]
[대상에게 91,7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같은 대상을 때릴 때마다 공격력이 상승하는 검은 귀신의 옵션으로 기본 평타 데미지가 1만 8천을 넘어가게 된 시점.
이와 동시에 발동한 5연격이 허수아비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쿠와아앙-!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의 옵션 효과로 5천의 화염 데미지를 추가로 입힙니다!]
때마침 발동한 화염 방출 옵션이 허공에 흩날리는 잿더미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버렸다.
“.....저거 계속 스킬 쓰는 거지? 맞지?”
“당연히 스킬이지. 평타로 어떻게 허수아비를 부수냐.”
플레이어 병사들은 허수아비를 때리는 중인 그리드가 평타만 사용 중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드가 ‘스킬을 딜레이 없이 계속 사용한다’고 오해하며 감탄했다.
그때였다.
[대상에게 11,397의 피해를...]
[대상에게 12,537....]
[대상에게 13,791....]
.....
....
...
[대상에게 22,79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새로운 허수아비에게 10번 연속으로 평타를 날리고 공격력을 순식간에 100퍼센트까지 상승시킨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 창이 떠올랐다.
[<깨달음을 주는 불타는 열망의 무아지경의 검>옵션 효과로 <검은 불꽃>이 폭발합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대 연병장 한쪽.
병사들의 타격 훈련용으로 배치 된 총 5천 개의 허수아비.
그 중심부에서 허수아비를 가격하고 있는 그리드의 검 끝으로부터 칠흑의 불꽃이 폭사하자!
[반경 10미터 이내에 공격력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스플래쉬 데미지를 입힙니다!]
[크리티컬!]
[칭호 <한 방의 한 놈!>효과...]
[<+8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옵션 효과로 <5연격>....]
[대상에게 854,77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54,77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54,77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854,775의....]
....
...
..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그리드를 중심으로 발생한 원형의 폭발이 360도 전방위를 집어삼켰다.
수백 개의 허수아비가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
“.....라우엘 재상이 성을 낼 것 같군요.”
연병장을 휩쓸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파괴력.
폭발의 후폭풍으로 찾아온 고요 속에서 식은땀을 닦아낸 아스모펠이 중얼거린다.
파괴력을 감당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병사들은 NPC와 플레이어를 가리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사색이 되어 있었으며.
“...쩔어.”
그리드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흑화와 대장장이의 분노 등, 버프 스킬조차 쓰지 않고 오로지 ‘순수한 평타’만으로 반경 10미터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으니 감격할 만도 했다.
이날.
제목:템빨왕이 아그너스한테 진거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보세요.
내용:안녕하세요. 저는 템빨국 소속 병사 J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진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상상도 못하시겠지만, 사실은 벨토 전투 당시 우리 그리드 국왕전하께서 아그너스를 봐주셨습니다. 사실 그리드 국왕전하께는 불타는 검이 있는데요... 그거로 평타만 날렸어도 아그너스며, 데스나이트며, 리치며 다 골로 갔어요.... 근데 그럼 너무 시시하니까 그리드 국왕전하께서 봐주신 겁니다.ㅡㅡ;;;; 참고로 전 평생 영원히 템빨국 군대에 말뚝 박으려고요.ㅎㅎ
각국 Satisfy 커뮤니티에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내용이 너무나도 황당무계하여 신빙성이라고는 제로였다.
사람들은 템빨국이 그리드의 명성을 지키고자 여론을 조작하는 거라고 해석했다.
뭐,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다.
후일담.
“충성!”
“그리드 국왕전하 만세!!”
“....?”
플레이어 병사들이 그리드에게 보내는 시선이 NPC 병사들의 시선만큼이나 초롱초롱해졌다.
열정으로 가득한 템빨국 군대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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