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3화
-네 몫은 남겨놓을 테니까 끼어들지 말아줘.
아그너스가 리치 무무드를 소환한 직후, 그리드가 유페미나에게 보낸 귓속말의 내용이다.
그리드는 아그너스와의 대결에 유페미나가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최강이라고 칭송 받는 아그너스와 정정당당하게 대결해서 승리하고 진정한 지존으로 거듭나고 싶어서였다.
유페미나도 납득했다. 그리드의 마음을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폄하하지 않고 존중했다.
그래서 잠자코 있었다.
레가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백요와의 전투에서 힘을 비축하면서 자신이 나설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드가 아그너스에게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둔 후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랐다.
한데 망했다.
“필멸!”
그리드의 소환에 응하여 등장한 피아로.
절구질로 백요를 일격에 해치우고, 춤추는 시체의 산을 순식간에 돌파한 그가 최강 최악의 기술을 전개했다.
아그너스를 대상으로 말이다!
폭!
“아, 안 돼...!!”
소환자의 죽음은 소환수의 패퇴를 의미하는 바, 호미에 이마를 찍힌 아그너스가 잿빛으로 산화하기 시작하자 그리드와 유페미나는 사색이 되었다.
아그너스가 죽으면 무무드가 소멸하는 것이 당연한 패턴이었던 까닭이다.
그렇다.
피아로 탓에 그리드는 <브라함&무무드>퀘스트를, 유페미나는 <무무드 영혼 해방>퀘스트를 동시에 실패해버리게 생긴 것이다.
“비, 빌어먹을 피아로...”
브라함에 이어서 너마저 트롤링을!
“망했..... 어?”
좌절하던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했다.
아그너스를 산화시키고 있던 잿빛이 점차 약해지더니 급기야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망 판정이 도중에 취소됐다고?’
전설, 혹은 전설에 근접한 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불사 패시브와 개념 자체가 틀리다.
불사 패시브는 사망 판정을 일시적으로 저항시켜주는 개념의 스킬인 반면, 아그너스는 이미 받은 사망 판정을 물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아그너스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큭큭! 무슨 보스 몬스터 레이드하는 것도 아니고, 대인전에서 이 모습까지 선보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
완연히 걷히는 잿빛 너머로 모습을 다시 드러낸 아그너스의 모습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신체 곳곳의 살과 근육이 찢겨져 나가고 백골을 드러낸 상태였다.
마치 언데드를 보는 듯하였기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기사 소환... 소환 대상들을 일일이 컨트롤할 필요가 없으니까 최고의 소환 스킬이라고 할 수 있지.”
피와 땀에 쩔어 흐트러진 녹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그너스.
그 또한 당연히 귀족의 작위를 갖고 있었고 기사 소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전투에서 기사 소환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와 주종 관계를 맺은 플레이어는 이미 전투에 참전 중이었고, NPC 기사들은 목숨이 유한하였으니 ‘강적’ 그리드를 상대로 그들을 소환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러니까 결론은, 네놈의 기사가 너무 사기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아그너스가 피아로를 노려봤다.
현재 시점에서는 플레이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설급 NPC.
저런 괴물이 누군가의 소유물로 존재한다는 건 너무 언밸런스한 일 아닐까?
‘남들이 나를 볼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였구만.’
피식 웃은 아그너스가 <절대 지배>스킬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절대 지배.
바알의 계약자가 단 3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 죽은 대상을 영원히 자신의 종으로 만들 수 있다.
여태까지 아그너스가 절대 지배를 사용한 횟수는 딱 1회.
본래 브라함이 데리고 있던 리치 무무드를 빼앗아올 때뿐이었다.
‘이 스킬을 또 누구를 상대로 써먹나 싶었는데...’
씨익.
아그너스의 입꼬리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피아로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깃든 것은 오로지 탐욕이었다.
한편 피아로는 아그너스에게 맹렬한 적의를 보내는 중이었다.
“죽음을 지배하는 힘... 위험한 놈이로다.”
강자라 하면 설령 적이라 할지언정 호의를 보내왔던 피아로가 경계해야할 정도로 아그너스의 힘은 불온했다. 피아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그너스를 끝장내놓지 않으면 언젠가 그리드에게 큰 화가 되어 돌아오리라 보았다.
“기필코 네 목을 쳐야겠다.”
타앗-!
살의를 불태우며 호미와 낫을 고쳐 쥔 피아로가 몸을 날리는 순간.
“아아, 오늘은 관두자고.”
아그너스가 뒤로 물러섰다.
임모탈 전원이 아그너스의 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딱! 딱딱딱!!
달그락달그락!
우워어어---
수천 마리의 해골과 구울이 만들어내는 장벽은 장관이었다.
피아로조차도 섣불리 돌진하지 못하고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를 위시한 베라딘이 아레스 군단의 포위망을 돌파하며 외쳤다.
“아그너스 님, 이쪽으로!”
“기다려!!”
그대로 퇴각하려하는 아그너스를 그리드가 불러 세웠다.
“너는 고추도 없냐? 사내새끼가 싸우다가 도망치는 게 말이 돼? 부끄럽지도 않아?”
“고추?”
아그너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드는 자신의 도발이 먹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공교롭게도 아그너스는 비난과 조롱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리드의 도발에 일일이 과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감성적이지 못했다.
“없는데? 킥!”
펄럭-
콧방귀 뀐 아그너스가 로브를 벗어던지자 드러나는 하반신.
백골화 된 상태이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던 까닭에 그리드는 움찔했고 누군가는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다.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자고. 어차피 제한 시간이 존재하는 퀘스트도 아니었고 말이야. 큭큭!”
손을 흔든 아그너스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했지만 템빨단원들과 아레스 군단원들은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날아오르라!!”
지슈카가 신화급 주작궁의 시위를 당기자 주작이 날아올랐고, 쏟아지는 불의 비를 신호로 아레스 군단원들의 맹공이 아그너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우비. 시체 방패.”
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날아오르라!는 아그너스의 대공방어 마법에, 그 외 스킬들은 시체의 방패들에게 무력화 되었다.
물론 모든 스킬을 아그너스 혼자서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곁에는 수백 명의 네크로맨서들이 있었고 그들의 언데드는 수천이었다.
방어에만 집중하는 언데드 군단을 빠르게 돌파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피아로와 유페미나가 백골들을 때려 부수며 분투하였으나.
“다음에 만날 때 또 그 농부 새끼를 소환했다가는 울게 될 거라는 것만 알아둬라.”
리치 무무드의 대단위 마법을 위시한 아그너스의 퇴각이 너무 빨랐다.
임모탈의 결사대가 템빨단과 아레스 군단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아그너스는 그대로 전장에서 이탈해버렸다.
[리치 무무드 제압에 실패하였습니다.]
[브라함이 다음을 기약합니다.]
***
아그너스를 놓친 것을 손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리드의 목적은 아레스 군단의 벨토 왕국 점령을 돕는 것이었고, 아그너스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으니까.
『아그너스와 임모탈이 퇴각하자마자 벨토 왕국이 백기를 들었습니다!』
『군신 아레스가 벨토 왕국을 점령하고 플레이어 두 번째 국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국가급 군단을 소유한 인물이 여태껏 무명으로 지내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Satisfy가 얼마나 넓은 세계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아그너스 또한 대단했죠. 템빨왕과 군신을 학살하겠다는 천명을 지키지 못하고 패퇴하였다고는 하나, 그와 임모탈의 강함은 독보적인 것이었습니다.』
『템빨단 최정예 전력과 아레스 군단을 홀로 막아섰으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크라우젤이 등장했을 때보다 임팩트가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를 보며 몇 번이나 전율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결론은 그리드가 더 대단했죠. 플레이어 두 번째 국왕이 탄생하는 것에 일조한 최초의 왕 그리드의 위명은 앞으로 더욱더 드높아질 것입니다.』
『아무래도 농부가....』
전투의 파장은 컸다.
템빨국에 이어서 두 번째로 플레이어의 나라가 탄생했고, 하필이면 그 나라가 템빨국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으니 그리드의 영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드를 더욱더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덩달아 아레스 군단의 명성도 하늘을 찔렀다.
여태껏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세력이 일개 국가를 압도하는 전력을 뽐냈으니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아레스 군단 외에도 자신들이 모르는 세력이 또 숨어있는 게 아닐까 추측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만약, 아그너스가 아레스를 경계하는데 힘을 소비하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으로 그리드를 상대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어.”
“특히 죽음에 도달했을 때 언데드화 되는 모습은 전율마저 일으키더군. 장담하건데 아그너스는 최소 크라우젤급이다.”
“나는 그 자식이 같은 편을 웃으면서 희생시키는 모습에서 카리스마를 느꼈어.”
“그래.... 아그너스뿐이다. 아그너스를 따르도록 하자.”
전 블러드 카니발 소속원들을 비롯한 악당들이 아그너스의 강함과 광기에 이끌렸다. 너도나도 아그너스의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미안하다.”
그리드가 유페미나에게 사죄했다.
자신의 승부욕 때문에 리치 무무드를 놓쳐버렸으니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유페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전투에 참전했었더라도 무무드를 온전히 제압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에요.”
아그너스와의 만남은 예정되어있지 않았다. 그리드와 유페미나의 입장에서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철갑귀마대를 상대하느라 대량의 스킬을 소진한 상태였던 유페미나가 아그너스와 무무드를 상대로 좋은 컨디션을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강해도 너무 강했네요.”
아그너스의 강함은 모두가 상정한 범위를 초월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그너스를 돌이켜보는 유페미나와 템빨단원들의 얼굴에 그림자는 없었다.
아그너스가 제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그리드가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템빨단원들은 자신들의 곁에 그리드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든든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세간에서 하는 말이 맞아. 만약 아그너스가 처음부터 모든 리치와 데스나이트로 내게 총공세를 가했다면 승산이 훨씬 줄어들었을 거다.’
애초에 <브라함&무무드>퀘스트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리드는 아그너스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퀘스트 보정 효과로 강력해진 백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아그너스와 비빌만했던 거라고 그리드는 생각했다.
‘그래, 현재 시점에서 나는 아그너스보다 약해. 피아로가 없었다면 필시 내가 졌을 거다.’
하지만.
‘다음은 다르지.’
그리드의 얼굴에 드리웠던 암운이 거짓말처럼 걷힌다.
그는 템빨의 유연함을 상기하고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의 최대 장점.’
그건 바로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대언데드용 아이템만 갖춰도 아그너스를 상대하는 일은 훨씬 더 수월해질 거라고 말이다.
‘확신해. 아그너스는 크라우젤과 달라.’
컨트롤과 센스를 강함의 기반으로 삼는 크라우젤은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지는 반면 스킬빨을 위시하는 아그너스는 맹점이 많아보였다.
그리고 아이템이야말로 스킬을 카운터 치기에 적합한 도구였다.
“다음엔 기필코.”
내가 이긴다.
씨익!
다짐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게임이 지루할 틈이 없었으니 즐거운 것이다.
***
벨토 왕국 외곽.
칙....
치이이이이익--
병력을 물리고 혼자 남은 아그너스의 육신이 잿빛에 산화되기 시작했다.
반(半) 리치화의 지속 시간이 끝난 것이다.
[사망하였습니다.]
[경험치를 대량으로 손실합니다.]
“킥... 킥킥킥! 그리드...”
화려하게 장식하려했던 데뷔전이 수모와 굴욕으로 얼룩져버렸지만 아그너스는 분노하지 않았다.
크라우젤 이후로 자신을 이토록 몰아붙였던 상대가 또 있었던가?
없다.
“...그리드! 키햣! 크키키키킥! 크하하하핫!!”
아그너스는 기뻤다.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기억 한편을 지배해준 그리드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곤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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