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2권 - 2화
Satisfy는 그 어떤 게임과 영화보다 화려한 그래픽을 자랑한다.
스킬과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발생하는 이팩트가 하나같이 아름답고 화려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고, 보다 화려한 스킬과 마법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일수록 선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날개...?”
타오르는 홍염의 좌익과 일그러진 칠흑의 우익.
긴 날개를 펼친 백발 그리드의 모습이 전장의 모든 이들과 시청자들을 현혹시킨다.
플레이어가 날개를 두른 것만으로도 생소한 일이건만, 그 날개가 상반되는 기운까지 겸비하였으니 모두가 감탄했다.
“킥....”
남들은 그저 넋을 잃고 있는 이때에도 아그너스는 집중력을 유지했다. 즐거움에 몸서리치며 사태를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법을 강구했다.
“폭격 기능을 겸비한 비행 마법...쯤 되겠군?”
아그너스는 그리드가 날아오르리라 보았다.
속단이 아니다.
날개는 하늘을 날기 위한 도구인 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도달한 결론이었다.
“우비.”
촤르르르르륵-!
아그너스가 죽음의 룬에 귀속된 스킬을 사용하자 상공에 수십 겹의 마력 실드가 중첩 생성됐다.
최강의 대공방어 마법이었다.
아그너스는 그리드가 상공에서부터 공격해올 것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게 큰 실수였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
그리드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지면에 그대로 선 채 날개를 힘껏 펄럭였고, 동시에 불꽃과 암흑의 마력을 직선으로 방출해서 리치 무무드를 공격했다.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라고?’
날개처럼 보였던 마법의 정체가 사실은 다중 전개된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였다니, 상상조차 못했다.
뒤늦게 자신의 오판을 깨달은 아그너스가 황급히 대공방어 마법을 해제, 주위의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시체 방패의 전개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퍼퍼퍼퍼퍼퍼퍼퍼펑!!
“큭...!”
늦었다.
대공방어 마법을 실행하고 해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간의 간극 때문에 시체 방패의 전개가 늦고 말았다!
‘제길!’
아슬아슬하게 시체들을 스쳐지나가는 10쌍의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를 허망한 시선으로 뒤쫓는 아그너스.
한 순간 여유를 잃는 그의 귓가로 강력한 폭음이 들려왔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리치 무무드가 38,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리치 무무드가 36,86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리치 무무드가 37,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리치 무무드가...]
....
...
“.....”
리치는 언데드의 정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독자적인 개체로 존재했을 때의 이야기.
플레이어의 사역마가 된 순간, 제아무리 리치라고 해도 그 힘은 지극히 한정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능력치가 약화되거나 하는 등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 시스템의 한계다.
실시간 전투 도중, 플레이어가 사역마에게 특정 행동을 상세히 지시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고 이는 사역마의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결과를 야기했다.
물론, 집중력과 순발력이 뛰어난 플레이어일수록 사역마에게 퀄리티 높은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상황에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예측 불가능’한 상대와 전투 중에 퀄리티 높은 명령을 지속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변수에 무한정 응수하기란 어려웠고 결국에는 빈틈을 드러내게 마련이었다.
지금의 아그너스처럼 말이다.
‘너무 성급했어. 무무드에게 방어를 지시했어야했다.’
그리드의 공격이 상공에서부터 쏟아질 거라고 판단한 것부터가 너무 섣불렀다.
아니, 그리드의 공격으로부터 무무드를 보호할 수 있다고 과신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아그너스는 무무드에게 공격 마법의 캐스팅을 명령했고, 그 결과 무무드는 그리드의 마법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치명상을 입었다.
무려 10쌍의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에 적중당한 무무드가 소진한 마나와 생명력은 각 30만과 7만.
이제 무무드의 남은 생명력은 5만, 마나는 17만 가량에 불과했다.
‘아까부터 최하급 마법으로 이만한 위력을 발휘하다니...’
단지 공격력만 강한 게 아니다.
아무리 최하급 마법이라고 해도 무려 20발의 마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하다니, 믿기지 않는 연산 능력이다.
‘브라함의 고유 특성인가?’
독자적인 마법을 지녔으며 마법 캐스팅 속도 상승, 마나 회복 속도 상승 특성을 보유한 무무드처럼 브라함 또한 고유 특성을 지녔어도 이상하지 않다.
여기서 결론이 내려진다.
‘상성이 나쁘다.’
무무드 고유의 마법은 대부분 ‘고위급’으로 분류되는 대단위 마법이다.
무무드는 대량 살상에 적합한 마법사라는 뜻이다.
반면 브라함은 기초가 튼튼했다. 믿기지 않는 위력을 품은 최하급 마법을 연발 가능했고, 이로 인해서 딜레이 없는 극강의 공격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법사였다.
대인전에 특화됐다는 뜻.
최소한 1대1 승부에서만큼은 브라함이 무무드보다 앞섰다.
‘내 역할이 중요하군.’
이제 아그너스는 눈앞의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음과 영혼을 괴롭히는 현실의 기억을 온전히 망각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스르륵.
번들거리던 아그너스의 금안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순간.
“정신 바짝 차려라.”
무심한 표정으로 TV를 시청 중이던 흑발의 미남자가 그리드를 응원했다.
크라우젤이었다.
***
‘흠.’
무무드에게 마법의 캐스팅을 취소하라고 명령하고 ‘방어’와 ‘회피’ 커맨드를 입력해놓은 아그너스.
그리드가 쉬지 않고 쏘아내는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를 회피하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다른 곳을 훑는다.
단신으로 레가스와 유페미나를 상대 중인 백요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때였다.
퍼엉-!
한눈팔다가 파이어 볼에 적중당한 아그너스의 신형이 흔들렸다.
‘...까다롭군.’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는 최하급 마법답게 경로가 단순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반격을 감안하지 않고 오로지 회피에만 집중하면 비교적 피하기 쉬웠다.
하지만 그리드는 문득 문득 10쌍의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를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하였고, 이때마다 아그너스는 몇 발의 마법을 허용하고 말았다.
반면 무무드는 방어 마법으로 온전히 스스로를 보호 중이다.
그를 보고 안심한 아그너스가 다시금 백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 홀로 레가스를 압도하는 듯 보였으나, 결정타는 먹이지 못하고 있었다. 유페미나라는 소녀 마법사가 중요한 순간마다 백요를 방해하는 까닭이었다.
단시간 내에 백요 혼자서 저 둘을 제압한다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그래서야 쓸모없지.’
낼름.
아그너스가 꺼내 쥔 검을 혀로 핥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피시식-
아그너스가 혀로 훑은 검날이 검게 부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무무드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파이어 볼과 다크 커터를 사용 중이던 그리드의 동공이 흔들렸다.
단지 혀로 핥아서 검날을 부식시키는 아그너스의 몬스터 같은 독성에 깜짝 놀란 것이다.
순간.
터엉-!
아그너스가 전선에서부터 이탈했다.
그리드의 공격은 순전히 무무드 혼자서 감당하게 시켜놓고 자신은 백요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위험해!”
그리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그너스가 레가스와 유페미나의 허를 찌르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그너스가 노린 것은 그 두 사람이 아니었다.
푸욱-!
“커윽...!”
아그너스의 부식된 검에 복부를 꿰뚫리는 여성.
그건 바로 백요였다.
“엥?”
같은 편을 공격하다니?
모두가 깜짝 놀랐고, 백요는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가장 당황하는 눈치였다.
“무슨 짓이야?”
꽈드득, 이를 갈며 노려보는 백요에게 아그너스가 속삭였다.
“힘을 받아들여라.”
스아아아아아아--
백요의 복부를 찌른 부식된 검으로부터 방출되는 보랏빛 마기가 백요의 혈관과 근육을 타고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데스나이트화>의 전조였다.
[대상을 일시적으로 데스나이트로 만듭니다.]
[대상이 마기를 받아들일 경우, 대상은 데스나이트가 되고 종족이 언데드로 변합니다. 이때 모든 능력치가 23퍼센트 상승하며 ‘죽음 오러’ 스킬을 소유하게 됩니다. 단, 신성 마법에 극도로 취약해지며 회복 효과를 받지 못합니다.]
데스나이트화.
살아있는 대상에게는 데스나이트가 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며, 이미 죽은 시신의 경우 강제로 데스나이트로 만들어버리는 무지막지한 스킬.
아그너스가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얻은 힘이다.
누가 봐도 사기적인 힘이었지만 그만큼 위험부담도 높았다.
이 스킬의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아그너스’가 당신을 데스나이트로 만듭니다! 데스나이트화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 사망하고 경험치를 잃게 됩니다!]
‘씨발!’
데스나이트가 되는 대상이 엄청난 페널티를 입게 된다는 것.
아그너스에게 어지간한 호감이나 충성심이 있지 않는 이상 데스나이트화를 순전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었다.
욕설을 지껄이며 망설이는 백요에게 아그너스가 속삭였다.
“거부하면 죽여서라도 데스나이트로 만들 거야. 서로 편하게 가자고. 엉? 큭큭!”
데스나이트화는 시신을 대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단, 시신을 데스나이트로 만들 경우에는 능력치가 온전히 적용되지 않고 아그너스가 직접 제어해야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차선책인 것이다.
“개자식.... 나중에 제대로 보상 받겠어!!”
이미 숨통이 잡혀버린 백요는 아그너스를 거부하지 못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데스나이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키야아아아아아아!!”
퍼어어어어어엉-!!
분노의 기성을 토한 백요가 내지른 주먹이 보랏빛 오러를 방출, 레가스와 유페미나를 동시에 날려버렸다.
“레가스...! 유페미나!!”
흑요를 상대 중이던 지슈카와 폰이 경악했다.
데스나이트로 변신한 백요의 힘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리드도 위험해보였다.
아그너스가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킥킥, 네크로맨서는 물량빨이지. 안 그래?”
데스나이트화는 지속 시간을 보유한 단발성 스킬이지만 그 대신 지배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지배력을 대량 소모하는 무무드와 데스나이트를 동시에 거느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아그너스는 자신감이 넘쳤다.
백요와 자신이 그리드의 발을 묶고, 그 틈에 무무드에게 궁극의 마법을 캐스팅하도록 지시하면 그리드를 순식간에 박살낼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비단 아그너스 뿐만이 아니었다. 전장의 모두와 시청자들 또한 그리드의 패배를 직감했다.
“곧 끝이로군요.”
스캇을 상대 중이던 베라딘이 한숨 돌렸다.
자신을 비롯한 임모탈의 모든 네크로맨서들, 아레스 군단의 수만 병력을 막아내느라 과도한 힘을 소비하고 말았다. 아레스 군단은 상정한 것만큼 강했고,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가는 역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베라딘은 아그너스가 한시라도 빨리 전투에 종지부를 찍어주길 바랄뿐이었다.
‘아그너스 님께서 그리드에게 이토록 오랜 시간을 허비하실 줄은 몰랐... 뭐?’
수십 분 동안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전황이 이제 뒤엎어질 것이다.
자신하며 안도하던 베라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만 병력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전장에 그림자가 드리운 까닭이다.
“뭐...?”
베라딘을 비롯한 임모탈 전원.
또한 아레스 군단원 모두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들은 지금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거대한 기둥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상농법 극의, 절구질.”
“....?”
혼란스러워하는 모두의 귓가로 낯선 음성이 들려왔고,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기둥.
거대한 강기의 집약체가 그리드에게 돌진하고 있던 백요를 짓뭉개버렸다.
“.....어엉?”
하늘에서 갑자기 기둥이 떨어지다니?
데스나이트화 된 백요가 일격에 죽어버리다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아그너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탓에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에게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친구는 네가 먼저 부른 거다. 응?”
“.......”
수십, 수백 발의 마법을 쉬지 않고 쏘아 대량의 마나를 손실한 그리드.
지친 기색을 금치 못하는 그의 곁에 낫과 호미를 거머쥔 중년인이 서있었다.
그의 이름은 피아로.
이제는 유명한 전설의 농부였다.
“감히...! 감히 템빨왕 전하께 항거한 자 누구인가!!”
쿠오오오오오오!!
대노하는 피아로!
그의 분노에 호응한 세상 곡물이 휘몰아친다.
<자연경>을 발동한 피아로와 아그너스의 거리는 막말로 순식간에 좁혀졌다.
“필멸!”
“...?!”
폭-
어딘지 김빠진 효과음이 침묵에 잠긴 전장 전역에 울려 퍼지자.
“아, 안 돼....”
“.....”
그리드와 유페미나가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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