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8화
푸르푸.
헬가오, 드라시온, 모락스, 아스타로트와 함께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대악마이다.
각종 퀘스트나 서적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뮐러의 영웅담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대악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푸르푸 또한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당한 대악마 중 하나였다.
그 이름, 20억 플레이어 모두가 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푸르푸의 권능.”
“푸르푸...?”
어째서 아그너스가 대악마의 이름을 거론하는가?
‘룬’이라는 아이템의 개념을 아직 모르는 평범한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해하는 반면, 룬을 아는 템빨단원들과 아레스 군단원들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다.
순간.
솨아아아아아아아-
밤하늘이 하얗게 변했다.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는 서리가 만들어내는 풍경의 변화였다.
‘블리자드 같은 마법인가?’
서리를 경계한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이 방어 태세를 취하는 그때,
“공격 마법이 아니다!”
럭과 스캇의 도움을 받아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합격을 버티고 있던 아레스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푸르푸는 조련의 악마...!”
그래, 그렇기 때문에 아레스가 가장 원했던 힘.
그 강대한 힘을 아그너스가 선점해버린 것이다!
“빌어먹을...! 아그너스의 사역마들을 경계..!!”
콰아아아아아앙-!!
아레스의 외침이 폭음에 묻혔다.
럭의 맹공에 발이 묶여있던 데스나이트가 쏘아낸 오러의 폭발 때문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서리에 물든 데스나이트의 오러는 이제 보랏빛이 아니라 얼음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컥...!”
서릿빛 오러에 가슴을 얻어맞은 아레스가 피를 토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대를 통솔해야하는 사령관이 가장 중히 여겨야하는 덕목은 바로 본인의 안전.
아레스의 능력치 대부분은 체력과 방어력에 투자되어있었다.
한데도 데스나이트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아레스 님...! 이 씹어 먹을 새끼가!!”
자신의 맹공에도 어그로가 바뀌지 않고 끝까지 아레스 님만 노리다니?
데스나이트의 집요함에 치를 떤 럭이 팽이처럼 회전, 가속력을 실은 위력적인 발차기를 데스나이트의 안면에 꽂아 넣었다.
퍼억-!
묵직한 타격음!
거대한 몸체에 비해서 얼굴은 작은 데스나이트의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나는 것처럼 보였다.
럭의 공격은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는 멀쩡했다.
하늘에서 내린 서리가 데스나이트가 타격을 입는 지점에 장벽을 생성, 럭의 공격을 무효화시킨 까닭이다.
“뭐야?”
이거 완전 사기 아닌가!
등골이 오싹해져서 할 말을 잃는 럭과 달리 스캇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술자를....! 아그너스를 공격해주십시오!!”
“....!”
스캇의 외침이 그리드에게 닿았다.
나 또한 헬가오를 레이드하기 전에 이미 룬을 확보해놓고 있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내 룬에는 헬가오의 힘 또한 귀속되어 있었을 터.
아그너스가 푸르푸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부러움과 아쉬움에 휩싸여있던 그리드.
“그래.”
그가 번뜩 정신을 차린다.
리파엘의 창이 연속적으로 쏘아내는 매직 미사일을 모조리 시체 방패로 막아내는 한편 데스나이트와 리치로 반격해오는 아그너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시작점이 다르긴 개뿔...!”
그건 사실 핑계나 다름이 없다.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시작점은 똑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리드가 더 빨랐을 수도 있다.
왜?
그리드는 클로즈 베타 시절부터 Satisfy를 플레이한 인물이었으니까.
아그너스가 바알의 계약자로 전직했을 무렵에 그리드가 저레벨 유저였던 이유?
재능과 요령이 부족한 결과였을 뿐, 시작점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말인 즉.
‘그때 벌어졌던 우리의 차이....!’
<암흑의 룬>에 귀속 된 힘을 개방하면서, 그리드는 지난날을 회상해본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행보에 부족함이 있던가?
없다.
이미 하늘 위의 하늘까지 도달해있던 크라우젤마저 따라잡았음이 그 증거다.
“....메워지고도 남는다!”
화르르륵!
그리드의 전신이 불꽃에 휩싸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요하게 일렁이는 홍염이 그리드의 눈썹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조리 뒤덮었다.
벨리알의 힘, 그중에서도 불꽃의 권능이 개방된 것이다.
“...!!”
바알의 도움을 받아 룬에 귀속시킬 수 있었던 푸르푸의 힘을 계속해서 방출하며 사역마들을 강화시키고 있던 아그너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불꽃 그 자체가 되어서 타오르는 그리드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의 세기가 오장육부를 뒤틀어놓을 정도로 아찔했던 까닭이다.
‘저게 바로...!’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당하고 약화된 푸르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정한 대악마의 힘!
두근!
아그너스의 커다란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즐거워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힘을 한발 앞서 쟁취한 그리드.
그와 겨뤄봄으로써 자신이 종국에 갖게 될 힘의 위력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음이 그는 너무 기뻤다.
“킥...! 킥킥!! 크하하하핫!! 와라앗!!”
기세 좋게 소리치는 아그너스였지만 직접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쪽 손을 하늘 위로 뻗은 채 푸르푸의 힘을 방출하며, 강력해진 소환수들을 위시하여 그리드의 돌진을 저지하고자 시도했다.
딱!
따다다닥!!
1차 방위선은 칼과 방패를 무장한 해골 전사 50여 마리.
소환수의 능력치를 강화시켜주는 바알의 계약자 클래스 고유 스킬과 <죽음의 룬> 효과, 거기에 푸르푸의 힘까지 등에 업은 해골 전사들은 그 하나하나가 250레벨 대 유저와 비등할 정도로 강력했다.
일인 군단!
아그너스를 표현하기에 이처럼 적합한 문구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군단일지라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 그리드는 이미 증명한 바 있다.
“업화의 길!”
화르륵!
아그너스를 향해서 돌진하는 그리드가 밟는 길 위로 불꽃이 치솟았고,
캬르르르륵!
딱! 따다다닥!!
그리드에게 접근하였던 해골 전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앉는 서리와 함께 통째로 녹아 사라졌다.
“핫...!”
감탄하는 아그너스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소환수를 2회 보호’시켜주는 푸르푸의 힘을 그리드가 도트 데미지로 카운터 쳐버렸으니 기가 막혔다.
‘푸르푸의 힘에 대해서 이미 숙지하고 있었단 거군?’
과연, 그 쥐새끼 같은 크라우젤과 싸워 이긴 놈답게 철두철미하다.
철컥!
그리드의 솜씨에 감탄하는 아그너스의 등 뒤로 해골 궁수 20마리가 등장해 시위를 당겼다.
해골 전사보다 체력과 방어력이 현격히 떨어지지만 공격력만큼은 2배 높은, 아그너스가 평소 사냥과 전투에서 딜러로 적극 활용하는 공격대의 등장이었다.
핑-!
피피피피피피피핑!!
날카로운 뼈 화살 수십 발이 점차 아그너스와 거리를 좁혀오는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역시 그리드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순 없었다.
“파그마의 검무, 초(超)!”
쿠와아아아아앙!!
날아오는 화살을 확인하자마자 춤사위를 펼친 그리드가 기본 공격을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시켰고,
퍼펑!
퍼퍼퍼퍼퍼퍼펑!!
그리드의 평타는 이제 업화를 두른 검기가 되어서 해골 궁수들이 쏘아낸 화살을 모조리 요격했다. 그 폭발의 여파로 균형을 잃은 해골 궁수들이 쓰러지자 아그너스가 녀석들을 그대로 거두었다.
이때 그리드는 이미 아그너스와의 거리를 코앞까지 두고 있었다.
“살(殺)!”
“어림없지!”
콰작!!
데스나이트가 나섰다.
아이템 변신 지속 시간이 끝나고 묠니르를 무장한 4자루 갓 핸드에게 발이 묶여있는가 싶던 데스나이트였다.
앞서 그랬던 것처럼 오러를 방출, 갓 핸드들을 잠시 떨쳐낸 녀석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서릿빛 오러와 살(殺)이 충돌하면서 강력한 기파가 일대의 지면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순간.
“시체 폭발!!”
들썩이는 지면의 반동으로 떠오른 시체들을 아그너스가 폭발시켰다. 아니, 폭발시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시체들은 폭발하지 않았다.
“어엉?”
아그너스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필시 스킬은 발동했고, 마나 또한 소모되었건만 스킬 효과가 적용되지 않았으니 당황할 법도 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리드의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는 검정색 반지에 꽂혔다.
“디스펠...!”
정확히 알아봤다.
그리드는 다크 버스의 반지를 착용한 상태였다.
혹시 또 시체 폭발에 자신의 검무가 캔슬되지 않게끔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파그마의 검무!!”
스파아아아앗!
살(殺)에 단순한 오러 소드로 대항하였다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데스나이트를 따돌린 그리드.
그대로 허리를 숙여서 아그너스와의 거리를 최대한 밀착시킨 뒤 궁극의 검무를 펼친다.
“연살파극(聯殺派極)!!”
“큭...! 크하하하하핫!!”
화염에 휩싸인 그리드의 푸른 대검이 내포한 기운, 그것은 여태껏 아그너스가 레이드해온 보스 몬스터들의 궁극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짜릿한 것이었다.
전율한 아그너스가 광소를 터뜨렸고, 화염을 머금은 +9실패작은 하단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그의 급소를 노리고 꽂혔다.
푸욱-!
연살파극의 개시를 알리는 연살(聯殺)의 1타가 정확히 아그너스의 심장에.
푸우욱-!!
2타 또한 같은 지점에.
그리드 필살의 스킬은 정말로 기가 막히게 꽂혀들었고 아그너스의 생명력 게이지는 순식간에 바닥을 기게 되었다.
바알의 계약자가 지닌 <마나 실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공격력이었다.
“이제부터다...!”
연살의 3타 째가 꽂히는 순간부터 연살파극의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는 바.
이를 악문 그리드는 집중력을 높였다. 아그너스에게 다음 공격까지 적중시키고자 정신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아그너스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펑-”
그리드의 3회째 연살이 아그너스에게 꽂히기 직전, 아그너스가 입으로 효과음을 냄과 동시였다.
콰자자자자자자자자작!!
지슈카, 유페미나, 폰, 레가스의 협공을 받고 있던 리치가 갑자기 그리드를 향해서 마법을 쏘았고 모두가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강한 사역마일수록 자아가 강한 법.
지슈카 일행은 자신들이 리치에게 총공세를 퍼붓는 이상 리치의 어그로가 그리드에게 향하는 법은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아니었다.
아그너스의 장악력은 상식을 위반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악!!”
“크하하하하하하!!”
후위로부터 날아온 전격 마법에 크게 얻어맞은 그리드가 비명을 토하는 꼴을 보면서 아그너스가 연신 크게 웃었다.
검무가 도중 캔슬되어 휘청거리는 그리드를 같잖다고 비웃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죽어?’
솨아아아아-
리치의 마법에 적중당한 그리드가 잿빛으로 산화해버리는 게 아닌가?
아그너스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드가 리치의 마법 한 방에 죽을 리도 없을뿐더러, 설사 죽을 만큼의 데미지를 입었을지언정 전설이라면 잠시 불사 상태에 돌입함이 정상이다. 한데 죽다니?
‘설마...!’
깜짝 놀란 아그너스가 다급히 시선을 뒤로 돌려보았으나.
“이미 늦었어! 새끼야!”
푸우우욱-!!
“커억....!”
후방에서부터 날아온 그리드의 3회째 연살이 아그너스의 옆구리에 꽂혔다.
랜디와의 <위치 바꾸기>스킬을 활용한 그리드의 회심의 일격이었다.
『닌자...!!』
전세가 한순간에 뒤바뀌자 전 세계 방송국 해설진이 흥분했다.
특히 일본 방송국들이 난리였다. 닌자의 바꿔치기 술법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리드의 스킬 활용을 본 일본 해설진은 평소의 그리드가 일본의 닌자를 좋아해왔던 게 분명하다며 쓸데없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지금 이 순간, 그리드의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특히 그리드는 아그너스의 생명력 게이지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는 사실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끝이다!’
확신하며 파(派)의 묘리를 잇는 그리드의 귓가로 아그너스의 음침한 음성이 들려온다.
“벤타오의 조롱.”
퍽!
[1,9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리드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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