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7화
“.....”
이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수업 중인 학생들도, 업무 중인 직장인들도, 지하철의 탑승객과 거리의 행인들까지도 모두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주시하는 화면 속에는 대전장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배경은 수천, 수만 가구가 밀집해 있는 초대형 시가지.
커다란 철륜을 무기로, 방패로, 때로는 이동 도구로 활용하여 민첩하면서도 파괴적인 진격을 선보이는 아레스 군단의 병사들이 적진을 돌파한다. 미리 진형을 펼치고 저항하는 벨토 왕국군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렸다.
저게 플레이어가 만든 군단이라고?
병사들의 강함도 대단했고, 건물과 적군의 배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여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아레스 군단의 지휘관들 모두 역사 속 명장 같다.
시청자들이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목격했던 사하란 제국군의 강함을 연상시키게 만들 정도다.
반면 벨토 왕국군은 제대로 된 사령관이 없었고, 결국 왕도는 함락당하는 듯했다.
시청자들 모두가 아레스 군단의 힘에 전율을 느꼈다. 특히 선두에서 군대를 호령하는 아레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아그너스가 어째서 아레스를 군신이라고 칭하였는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따닥!
따다다다닥!!
아레스 군단이 궁전 앞까지 당도한 순간 흐름이 변했다.
오우거처럼 거대한 골격을 지닌 데스나이트가 등장하면서 전황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협공을 받은 아레스가 전선에서 이탈해버렸고, 그 사이 사방팔방에서 솟구친 백골의 파도가 아레스 군단을 집어삼켰다.
살육, 파괴, 비명, 절규, 분전.
베고, 또 베어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나는 해골 군단에 맞서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각국 방송사의 카메라가 생동감 있게 담아낸다.
그러던 도중.
『드디어!』
전장의 모든 카메라가 두 명의 사내에게 포커스를 맞추기 시작했다.
두 명의 사내란 다름 아닌 그리드와 아그너스였다.
붉은 피와 백골 가루가 안개를 이룬 전장 한복판에서 조우한 두 남자는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새카만 갑주를 무장한 거구의 데스나이트와 마력을 풀풀 내뿜는 리치의 비호를 받고 선 아그너스.
스스로 움직이는 4개 황금 손의 중심에서 푸른 대검을 휘두르는 그리드.
광소를 머금은 아그너스는 병사들의 방벽을, 이를 악문 그리드는 해골의 파도를 해치고 나아가 전진하여 결국 대면하게 된다.
중계진이 흥분했다.
『드디어 템빨왕과 아그너스가 격돌합니다!!』
『아그너스는 과연 스스로 선언한대로 템빨왕을 학살할 수 있을까요?!』
『흐음.... 접근전은 그리드에게 너무 유리한 거 아닙니까? 아그너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드와의 거리를 좁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데스나이트를 선두에, 리치를 후위에 배치하고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그리드와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을 텐데요?』
『자만이겠죠. 아그너스는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무려 2기씩이나 거느린 괴물 중의 괴물입니다. 그리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싸울지라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품은 게 분명합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그리드는 조롱을 당하고 있는 거죠.』
이제 해설진은 아그너스의 진정한 힘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그너스의 클래스?
리치가 아니다.
만약 그의 클래스가 리치였다면 또 다른 리치를 권속으로 부리지 못했을 테니까.
『아그너스는 자만해도 됩니다. 그는 모두의 예상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클래스의 주인이며, 그 힘은 필시 그리드 이상일 겁니다.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2기씩이나 권속으로 부린 시점부터 그는 이미 게임의 밸런스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전력으로 봐서는 아그너스가 그리드보다 우위에 있는 것 같네요. 아그너스는 단순 에픽 전직자가 아니라 성장형 히든 클래스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드의 저력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늘 위의 하늘마저 무너뜨렸던 그가 패배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군요.』
『맞아요. 그리드는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지존이죠. 반드시 그리드가 이길 겁니다. 왜냐? 아그너스가 지닌 힘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반동으로 필시 큰 페널티를 안고 있을 겁니다.』
『화려한 존재일수록 그 이면이 초라한 법이니....』
데스나이트.
3차 전직 네크로맨서가 거느릴 수 있는 권속 중 최강의 언데드이다.
‘생전에 어떤 기사’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부분이지만, 데스나이트의 능력치는 기본적으로 플레이어보다 몇 배 더 뛰어났다. 또한 강력한 스킬도 다수 보유했다. 가장 무서운 점은 플레이어처럼 레벨 업을 통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부분이다.
착용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 한정적이고 컨트롤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등 다수의 단점을 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나이트는 네크로맨서 최강의 힘인 것이다.
한데 아그너스는 데스나이트를 무려 2마리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뿐이랴?
리치도 2마리나 데리고 있다.
리치.
무한한 마력을 기반으로 고위 마법을 ‘연발’할 수 있는 언데드의 정점.
그 힘은 데스나이트를 압도한다.
간혹 보스로 출몰하는 리치가 다수의 데스나이트를 수족으로 부리는 것이 단편적 증거다.
말인 즉, 리치는 플레이어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네크로맨서의 4차 전직 클래스로 리치가 등장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추측해왔을 정도였다.
그래, 아그너스의 에픽 클래스가 리치일 거라고 추측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리치는 강력한 존재였다. Satisfy 설정상 언데드의 정점에 군림하는 것이 바로 리치였고 그 무한한 마력을 플레이어가 감당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한데 아그너스는 리치를 무려 2마리나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플레이어의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도리어 의심했다.
아그너스는 필시 커다란 페널티를 안고 있을 것이며, 그 페널티가 아그너스의 발목을 붙잡으리라고.
이번 전쟁에서 그리드가 반드시 승리하리라 보았다.
***
<리파엘의 창>
등급:전설(변신 재현)
내구력:무한
공격력:1,230~1,890
*매 공격 시 +3,000의 고정 데미지 추가.
*공격 시 보통 확률로 ‘빛의 차륜격’ 스킬 발동. 빛의 차륜격이 발동할 때마다 ‘매직 미사일(강화)’가 방출됩니다. 빛의 차륜격의 전개 범위에 따라서 매직 미사일의 방출 개수가 정해집니다. 매직 미사일의 피해량은 발당 4,000으로 고정되며 대상이 악한 존재일 경우 피해량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마나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방어나 회피 시 보통 확률로 ‘빛의 보호막’ 스킬 발동. 빛의 보호막에 ‘매직 미사일(강화)’가 귀속됩니다. 빛의 보호막을 가격하는 대상은 매직 미사일에 반격을 당합니다. 매직 미사일의 피해량은 발당 4,000으로 고정되며 대상이 악한 존재일 경우 피해량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반격으로 발동하는 매직 미사일의 적중률은 100퍼센트이며 마나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이동 시 낮은 확률로 ‘빛의 인도’ 스킬 발동.
*암흑 계열 마력을 보유한 대상에게 공격력 +20퍼센트.
그리드가 레베카교의 신기 리파엘의 창을 개조한 이유는 순전히 이사벨을 위해서였다. 그녀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리드 본인을 위한 일이 되기도 했다.
무려 신화급 리파엘의 창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백화의 위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창 고유의 능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린 NEW리파엘의 창을, 그리드는 이제 아이템 변신으로 재현할 수 있었다.
그것도 최대 4자루나!
파직!
파지지지직!!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며 해골들을 때려 부수던 4개의 갓 핸드가 일제히 정지, 실시간으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하자 아그너스의 조그마한 동공이 움찔했다.
차츰 길쭉한 창으로 변해가는 황금 손들로부터 신성력을 감지한 까닭이다.
‘큭큭! 기본이라 이거냐!’
Satisfy에는 언데드 계열 몬스터가 무수히 많다.
아이템을 자유자재(?)로 제작할 수 있는 템빨왕 그리드가 언데드 전용 무기 하나 없으면 이상한 것이다.
즐거워하는 아그너스의 귓가로 그리드의 도발이 들려왔다.
“미친개라지? 오늘이 복날인 줄은 몰랐군.”
“킥?”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허공의 4자루 창이 수레바퀴처럼 회전하면서 아그너스를 덮침과 동시에 폭사하는 광휘.
신성력을 머금은 매직 미사일(강화)가 수십 발 한꺼번에 방출되어 전장 일대를 초토화 시켰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
임모탈의 네크로맨서들이 계속해서 일으키는 해골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던 아레스 군단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그너스가 서있던 지점에서 발생한 폭발이 그 일대에 있던 수십 마리의 해골을 순식간에 잿빛으로 산화시킨 까닭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공격력.
주작 소환과는 또 다른 그리드의 궁극기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도대체 저 황금 손의 정체는 뭐야?’
‘어떤 적을 상대하느냐에 따라서 모양을 유연하게 바꾸고 그때마다 압도적인 화력을 발휘하다니....’
템빨왕이라는 이름에 이견을 제시할 여지가 없다.
그리드의 템빨은 최강이다.
‘저 아그너스조차도 극상성 앞에서는 어쩔 수 없겠.... 헉?’
신성력이 깃든 마법의 폭발.
아레스 군단원들은 아그너스가 당연히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서서히 걷혀가는 흙먼지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아그너스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시체 방패>스킬 덕분이다.
네크로맨서의 상위호환 격인 바알의 계약자는 시체를 활용하는 능력이 특출했고, 그중에서도 시체 방패 스킬은 엄청난 효율을 자랑했다. 1만 이하의 데미지를 입히는 공격은 시체 하나만으로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리드가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로 소환하는 템빨골이 적의 공격을 1회 막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치사한 새끼!”
시체가 즐비한 전쟁터를 첫 전투의 무대로 선택하다니, 아그너스는 거침없는 미친놈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의외로 신중한 성격일 수도 있겠다.
판단하며 욕설을 지껄인 그리드가 아그너스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혔다.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으나,
쩌저저저저정!!
“....!!”
4자루 리파엘의 창의 집중포화가 데스나이트의 거구를 꿰뚫고 그리드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크하하하핫!! 와라!!”
아그너스는 여유가 철철 넘쳤다.
그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리치를 믿었다. 그리드가 자신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소멸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상에게 5,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이 피해에 저항하였습니다.]
[대상이 피해에 저항하였습니다.]
[대상에게 6,100의 피해를 입혔....]
‘완전 저항?’
그리드는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무장하고 있었다.
아그너스의 주력이 리치임을 고려한 아이템 선택이었다. 덕분에 리치가 퍼붓는 암흑 마법이 그리드에게 큰 데미지를 주지 못했다.
“파그마의 검무!”
템빨을 위시하여 아그너스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성공한 그리드.
타앗!
한 걸음 크게 내딛으며, +9실패작을 연속적으로 찌른다.
“연살(聯殺)!!”
“시체 방패!”
아그너스가 대처해보지만 안 된다.
푸욱-!
[대상의 공격력이 너무 강합니다. 방어에 실패합니다.]
“킥...? 쿨럭!!”
방패로 내세운 시체와 함께 통째로 가슴을 꿰뚫리는 아그너스.
커다란 입으로부터 피를 내뿜고 허리를 기울이는 그에게 그리드가 연살(聯殺)의 2회째 공격을 연계하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어어어어엉-!!
그리드와 아그너스 사이에 놓였던 시체가 폭발을 일으킴으로써 그리드의 공격 모션을 끊어버렸다.
시체 폭발이었다.
‘씨펄!’
도중 캔슬되어버리는 연살(聯殺)!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그리드의 턱으로 아그너스가 뽑아 든 장검이 꽂혀들었다.
쩌어어어엉-!
[2,859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
바알의 계약자는 결국 네크로맨서 아니었던가?
한데 아그너스는 무슨 수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며, 이 공격력은 또 뭐란 말인가?
제아무리 성스러운 무구 세트의 물리방어력이 낮다고 하나 이 피해량은 납득할 수 없다.
흔들리는 그리드의 동공을 확인한 아그너스가 혀를 날름거렸다.
“이거 평타야.”
안 그래도 솟구쳐있는 그리드의 진한 눈썹이 더욱 높이 솟구친다.
“이 새끼가 지슈카의 유행어를...!”
분노를 담은 그리드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퍼어어어어엉-!!
4자루 리파엘의 창에게 고립당해 있던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가 갑자기 오러를 사방으로 분출한 까닭이다.
그 영향력 안에 그리드도 있었다.
큰 파괴력을 담은 공격은 아니었지만 ‘범위 내의 대상을 밀어 낸다’는 효과를 발휘하는 스킬이었기 때문에 그리드의 신형도 흔들리고 말았다.
“재밌는 거 보여줄까?”
히죽 웃은 아그너스가 <죽음의 룬>을 개방했다. 그리드의 <암흑의 룬>보다 등장 시기가 훨씬 더 빨랐던 룬. 현재 그 룬에는 총 9개의 스킬이 귀속되어 있었다.
“푸르푸의 권능.”
“....!!”
대악마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리드는 상기한다.
출발 선상부터가 달랐음을.
아그너스가 이미 바알과 계약했을 무렵, 그리드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하디흔한 초보 플레이어에 불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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