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6화
“이상한데?”
아레스 군단이 왕도에 도착하기까지 점령해야할 요새는 총 13개였다.
큰 전쟁인 것이다.
일단 요새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점령 난이도가 무척 높았으므로, 아레스 군단원들은 물론이고 그리드 일행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 보았다.
한데 어찌된 것이 요새가 죄다 빈집이다.
왕도로 향하는 경로에 자리 잡은 모든 요새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텅텅 빈 상태였다.
“요새를 비운 이유가 뭐지?”
“전쟁을 포기한 건가?”
요새는 전략적 요충지.
적군을 저지하기에 요새만큼 좋은 거점은 없다.
한데 요새를 비우다니?
그리드 일행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벨토 왕국이 이번 전쟁을 포기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반면 아레스 군단은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었다.
“왕실은 아레스 님께서 새로 육성한 강병군단이 철갑귀마대를 궤멸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벨토 왕실은 템빨단의 개입을 모른다.
반면 아레스의 강병 육성 스킬은 알고 있다.
벨토 왕실의 입장에서는, 철갑귀마대가 당한 이유를 아레스가 새로 육성한 강병군단 때문이라고 믿을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그리고 왕실은 똑똑히 본 적이 있죠. 철갑귀마대가 제국과의 전쟁에서 실시간으로 레벨을 올리고 강해지던 모습을 말이죠.”
“요새가 소수의 인원으로 대군의 전력을 소모시킬 수 있는 효율을 발휘한다고는 하나, 압도적인 전력 차에는 결국 굴복하게 마련.”
“벨토 왕실은 우리의 새로운 정예군단이 각 요새에 배치한 병력을 각개격파하고 더욱 더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분명합니다.”
“하여 병력을 모조리 왕도로 집결시키고 한 번에 우리를 요격할 계획을 세운 거겠죠.”
“음.”
부하들의 의견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이견이 없다는 뜻이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현명하게 대처했군.”
아레스가 이번에 새로이 육성한 강병군단, <철륜대>의 레벨은 아직 200에 불과했다.
벨토 왕국의 평균 병사 레벨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숫자는 고작 1만.
아레스는 철륜대의 레벨이 더 높아야한다고 판단했고, 13개 요새 정복을 레벨 업의 수단으로 계획했다.
한데 물 건너간 것이다.
1만의 철륜대는 고작 200의 레벨로 벨토 왕도까지 진격, 약 13만의 군대를 한꺼번에 상대해야하게 생겼다.
‘흐음.... 계획이 살짝 틀어져서 귀찮아지긴 했다만.’
좌절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아레스는 철륜대 외에도 3만의 군세를 거느리고 있는 바.
이들을 잘 통솔하여 적군을 처치하고, 철륜대의 레벨을 집중적으로 올려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낼 자신이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철륜대 또한 철갑귀마대처럼 ‘레벨 업 시 모든 자원 회복’이라는 특성을 보유 중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철륜대는 무한히 싸울 수 있었다.
그리드, 지슈카, 유페미나처럼 비상식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는 적을 만나서 대번에 박살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리고 벨토 왕국에는 그 셋 같은 괴물이 없지.’
심지어 지금 그 세 사람은 같은 편이다.
든든하다.
사실, 어떻게 싸우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질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레스는 들뜨지 않았다. 전쟁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평상시의 그는 팬티 속 엉덩이나 긁어대는 아저씨였지만 전쟁에서는 신(神)이었으니까.
“뱃속 창자가 뽑혀나갈 것을 모르고 아가리를 벌린 짐승을 유린하러 가볼까?”
“우오오오오오!!”
요새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진 아레스 군단이 진군 속도를 높였다. 거침없이 왕도까지 진격했다.
***
“속보...! 긴급 속보를 내보내라!!”
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언론사가 발칵 뒤집혔다.
임모탈.
자신들을 아그너스의 추종자라고 소개한 그들이 전언을 보내온 까닭이다.
-오늘, 아그너스 님께서 템빨왕과 군신을 학살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왕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아그너스.
최초의 에픽 전직자로 알려졌으나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
그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전무하다.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하지만 아그너스가 강하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 랭커가 한두 명이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미친개!’
길가다 눈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플레이어를 학살한다는 인물.
그가 이번에 언론까지 이용해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뽐내려하였으니,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심지어.
‘학살 대상이 템빨왕 그리드라니!’
대부분의 사람이 ‘군신’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템빨왕은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도 알고 있다.
템빨왕 그리드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거물을 학살하겠다고 선포한 거다!”
“아그너스...! 과연 소문대로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당장 벨토 왕국으로 중계진을 파견해!! 이 특종을 조금이라도 놓쳤다간 시말서 쓸 각오해라!!”
***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24분경, 전 세계 언론사에 한 통의 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오늘, 아그너스가 템빨왕과 군신을 학살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왕으로 군림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우편이었는데요. 아그너스는 모든 분들이 아시다시피 최초의 에픽 클래스 전직자이며 현재 통합 랭킹 5위에 위치한 인물....』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왕이라는 표현에 집중해야합니다. 과거 누군가가 추측했던 대로 아그너스의 클래스는 리치. 즉, 불멸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으며....』
『자신을 아그너스의 추종자라고 밝힌 베라딘이라는 인물은 10인의 루키 시절 천재라고 추앙 받았고 현재는 네크로맨서 랭킹 1위로 유명하죠. 아그너스가 그를 부하로 거느렸다는 것은 아그너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예로써....』
『임모탈. 리치 아그너스와 네크로맨서 베라딘을 주축으로 삼은 언데드 군단일 가능성이 높죠. 아마 템빨단 이후 최강의 플레이어 집단이 될 겁니다. 그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템빨왕 그리드를 표적으로 삼은 것일 테고요.』
『하지만 아그너스가 그리드를 상대로 승산이 있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아그너스는 최초의 에픽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젤, 유라가 랭킹계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만년 랭킹 7위였던 인물에 불과하잖습니까. 물론 통합 랭킹 7위가 낮다고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게임 재능이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분류되는 지존급 플레이어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리치라는 클래스는 무한한 마력과 생존력을 기반으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것으로 추측되지만, 아그너스라는 인물 자체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굳이 급을 나누자면 크라우젤보다 한참 아래겠죠. 고작 그만한 인물이 크라우젤조차 꺾은 그리드를 학살하겠다고 전 세계에 표명한 것은 오만 그 자체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그리드와 아그너스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다. 수수께끼의 군신에 대해서는 거론 자체가 적었다.
하지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군신에게도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OGC 국장 이국래였다.
‘무려 군신(軍神).... 신이라는 이명을 가져놓고 피라미일 리가 없다.’
이국래 국장은 군신의 정체가 궁금했다. 다른 방송사들은 아그너스와 그리드에게 집중하고 있는 그때, OGC가 가장 빨리 군신의 정보를 획득하고 이를 시청자들에게 알려야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
“이럴 수가!”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게임에 접속해 있다가 뒤늦게 뉴스를 접한 라우엘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그너스라고?
그 미친 괴물이 아레스와 적대하고자 벨토 왕국의 편에 섰다고?
‘안 돼!’
아그너스와 아레스의 싸움에 우리가 휘말리게 생겼다.
그리드 님께서 아무런 대비도 없이 아그너스와 맞부딪쳤다가 사달이라도 나면 일이 피곤해진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재수 없게 꼬인 거지? 아니... 처음부터 놀아난 거다.’
임모탈 길드에 베라딘이 있다.
그 소식까지 뒤늦게 접한 라우엘이 꽈드득, 이를 갈았다.
“베라딘...! 이 모든 게 네놈의 수작이구나!! 우리가 아레스 군단과 손을 잡을 것을 예측하고...!!”
베라딘은 라우엘이 10인의 루키 시절부터 경계해온 인물이다.
자신이야말로 현세 최고의 천재라고 자부하는 라우엘이었으나, 베라딘의 뛰어난 두뇌와 냉정한 사고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부터 이어져온 최악의 악연...!’
라우엘은 확신한다.
베라딘은 템빨단과 아레스 군단이 손을 잡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 둘을 동시에 처단할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고.
‘벨토 왕국에 어떤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다급해진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리드 님, 지금 당장 복귀를...!
말을 끝까지 잇기도 전이었다.
-왜? 아그너스 때문에?
-....!!
***
시간을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임모탈의 전언이 전 세계 언론사에 전파되기 전.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레스 군단과 그리드 일행이 벨토 왕도에 도착했다.
13만 대군의 수성 진형을 과연 어떻게 돌파해야할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던 모두가 동시에 허망함을 느꼈다.
마치 아레스 군단을 환영한다는 듯이, 왕도의 성문이 활짝 열려있었던 까닭이다.
심지어 성벽 위도 텅텅 비어있었다.
“함정인가?”
“이게 만약 함정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함정이군.”
적군에게 성문을 열어주다니, 이건 함정이 아니라 항복의 기운이다.
아레스는 신중하나 담대한 인물.
여기서는 깊이 생각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두 입성하라. 어리석은 적군이 우리를 시가지에서 요격할 요량인지, 아니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 것인지 직접 확인해야겠구나.”
쿵! 쿵! 쿵!!
잠시 성문 앞에 멈춰있던 아레스 군단이 북을 치며 기세를 높였다. 그리고 선두의 아레스를 따라서 왕도에 입성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열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시가지 곳곳에 자리 잡은 13만 대군이었다.
“히, 히익...!”
“적이다! 반역자 아레스가 왕도 안까지 쳐들어왔다!!”
“마, 맞서 싸워라!!”
“...?”
벨토 왕국군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없었다. 병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레스 군단에게 덤벼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레스는 커다란 이변을 느꼈다.
‘왕국 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
사정은 모르겠으나, 왕실에 사달이 나도 제대로 난 것이 틀림없다.
‘어찌됐든 이쪽에겐 행운!’
아레스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이 철륜대를 중점적으로 운용하여 적군을 베어나갔고, 200에 불과했던 철륜대의 레벨이 점차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흠.”
수 시간 동안 무력한 적군을 베고, 또 베어 넘기면서 궁전 앞까지 도달한 아레스 군단.
전쟁의 한복판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고요한 궁전을 살펴본 스캇이 아레스에게 다가왔다.
“수상합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그래, 누가 봐도 수상하군.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이제 국왕만 해치우면 된다. 벨토 왕국의 정복권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적군은 이미 대부분 궤멸했다.
아레스에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덜컥!
아레스가 궁전의 입구를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피잉-!
보랏빛의 오러.
데스나이트의 힘을 상징하는 검광이 어둠속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다.
“흠!”
아레스는 현재 4만의 군세를 이끌고 있는 몸.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 상태였다.
데스나이트의 기습이 범상치 않았으나 아레스는 그를 기민하게 회피하였고, 보랏빛 검광은 허공만 스쳤다.
하지만 아레스가 회피한 지점으로 곧바로 날아오는 마법은 고스란히 아레스에게 적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아레스 님!!
불꽃에 집어삼켜지는 아레스의 모습을 보고 아레스 군단원들이 경악성을 토하는 그때.
“킥! 킥킥킥! 크하하하하하핫!!”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어둠으로 점철 된 궁전 안쪽으로부터 누군가의 광소의 들려왔다.
‘뭐지?’
그리드는 기괴한 광소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광소의 주인을 만나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아레스 군단원들과 지슈카, 유페미나, 폰, 레가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아그너스....!!”
동시였다.
쿠워어어어어어어!
딱! 따다다닥!!
궁전 안쪽에서부터 대량의 해골들이 밀물처럼 밀려 나왔다. 또한 궁전 바깥의 벨토 왕국군 시신들이 좀비처럼 일어나서 그리드 일행과 아레스 군단을 덮쳤다.
채챙! 챙!!
콰아아아아앙!!
“아그너스으!!”
고함과 비명, 병장기 맞부딪치는 소리와 폭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면서 귀를 먹먹하게 만든다.
아비규환!
전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자 아레스 군단원들과 그리드 일행은 큰 혼란에 빠졌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리드는 멀쩡했다.
퍼석!
주제도 모르고 덤벼오는 해골의 싸대기를 갓 핸드로 날려버린 그리드의 시선이,
“네가 아그너스냐?”
“그럼 너는 템빨왕이냐~? 응~?? 킥킥!”
아그너스의 금안과 교차한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앙!!
철륜대의 진형을 순식간에 돌파한 데스나이트가 그리드에게 검을 휘둘러왔다.
최초에 아레스를 습격한 데스나이트와는 또 다른 놈이었다.
쩌정-!
데스나이트의 검을 막아내는 그리드의 안면으로,
콰아아아아아앙!!
리치의 마법이 날아와 꽂혔다.
[11,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동시에.
-그리드 님, 지금 당장 복귀를...!
라우엘로부터 귓속말이 도착했다.
주변에 돌아가고 있는 수백 대의 카메라를 뒤늦게 인지한 그리드의 자존심을 자극하고도 남는 귓속말이었다.
-왜? 아그너스 때문에?
-...!!
-나보고 도망치라고? 그거 생각하고 말하는 거 맞지?
스윽.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 위로 도살귀의 가면을 뒤집어쓰는 그리드.
콰직!
콰지지지직!!
그의 주변을 맴돌던 4개의 황금 손이 리파엘의 창으로 변화한다.
“오늘이 복날인 줄은 몰랐군.”
“킥?”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앙-!!
광휘.
백색의 섬광이 전장 한복판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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