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14화
-1대대 정리 끝냈어요.
“......”
간단하게도 말한다. 누가 들으면 방 청소 끝낸 건 줄 알겠다.
무려 2천여 명의 최정예 부대를 궤멸시켜놓고 말이다.
귓속말을 확인하고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유페미나에게 답변을 보냈다.
-괜.찮.아↗? 힘.들.지↘ 않.았.어↗? 내.가. 네.게. 귀.찮.은. 일.을. 시.킨. 건. 아.닐.까↗? 걱.정.이.구.나.
그리드는 모든 동료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페미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각별했다.
자칫 밉보였다가는 죽는다.
라는 생각을 품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그녀에게 그리드는 사소한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늘 긴장했다.
마치 맹수 앞의 생쥐 꼴이랄까.
그래서인지 유페미나와 대화할 때면 가끔씩 국어 책 읽기가 된다.
속내를 알 리 없는 유페미나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유난히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리드에게 똑같이 친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귀찮고 힘들기는요? 당신과 템빨국을 위해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기쁠 뿐이에요. 앞으로도 제게 많은 기회를 주세요.
-아, 응... 그,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하.하.
-근데...
-응?
-아레스의 능력이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는 무조건 경계해야 해요.
유페미나의 음성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솔직히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철갑귀마대... A~S급 마법을 4개나 연속적으로 직격당해 놓고도 죽지 않고 버텼어요. 아레스가 철갑귀마대에 부여한 특성에는 마법 저항력과 생명력 상승이 포함되어 있는 게 분명해요. 만약 적들 중에 힐러가 2, 3명만 있었어도 제가 졌을 걸요?
-....특성 부여.
템빨단이 이번 전쟁에서 얻은 정보의 가치는 무척 높았다.
철갑귀마대는 아레스가 직접 육성한 부대라는 점.
철갑귀마대가 보유한 스킬과 특성의 숫자가 네임드급 몬스터와 비견 될 정도로 다양하다는 점.
여러 정황상, 아레스는 부대 단위 병사들의 레벨을 강제적으로 올리고 스킬과 특성을 부여해주는 능력을 지닌 게 분명해 보였다.
막말로 사기라는 뜻이다.
‘물론 제약이 큰 힘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레스 군단의 힘은 비약적으로 강해질 것이다.
당장 벨토 왕국만 점령해도 본격적이 될 터였다.
‘광활한 영토와 백성, 세금을 기반으로 최정예 부대를 꾸준히 생산할 수 있게 되겠지.’
어떻게 생각해봐도 위협적이다.
훗날의 아레스 군단은 제국과 비견 되는 군사력을 갖출 수도 있었다.
유페미나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철갑귀마대는 벨토 왕실군이에요. 엄밀히 따져서 아레스의 군사가 아닌 거죠. 아레스는 결국 남의 것에 불과한 철갑귀마대를 ‘적당히’ 육성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근데도 이 정도에요. 아레스가 전심전력으로 육성하게 될 군대의 강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거라고요. 아레스가 성장할 시간을 줘선 안 돼요.
그리드와 유페미나가 철갑귀마대를 비교적 쉽게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는 압도적인 공격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둘 모두 레전드리급 무기를 토대로 최상위급 스킬을 ‘연속적’으로 전개한 덕분에 철갑귀마대를 순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철갑귀마대의 전투 유지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다면?
유페미나의 말대로 힐러 몇 명만 포함되어 있었어도, 천하의 그리드와 유페미나조차도 철갑귀마대에게 역으로 당했을 공산이 크다.
앞으로 아레스가 진심으로 육성하게 될 군대는 그리드와 유페미나도 쉽게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동맹 관계를 길게 이어가는 건 좋지 않아 보여요. 제국이 두려워서 아레스의 손을 붙잡고 있다간 아레스에게 집어삼켜질 거예요.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아레스 군단과의 동맹 관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맞아. 유페미나 네 말대로 아레스 군단과의 동맹 관계를 장기간 유지하는 건 위험하지. 하지만.
그리드는 최대한 침착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두려워하고 있는 유페미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
-적의 잠재력을 경계하느라 우리의 잠재력을 잊어선 안 되지. 잊지 마. 나는 템빨왕이야. 내가 만든 아이템을 무장한 템빨국의 병사들 또한 강하다고.
그래, 괜히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래의 아레스 군단이 두렵다고?
왜?
미래의 템빨국이 더 강할 텐데!
-템빨국의 군대 또한 아레스의 군대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하게 육성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아레스를 두려워하지 마.
-....그렇네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리드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충만했고 유페미나는 안도했다.
그리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유페미나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
“템빨단이? 흐음, 역시나 그렇게 됐군.”
모두의 예상대로 지슈카가 6대대를 궤멸시켰다.
그리드는 철갑귀마대 4개 대대를 이틀 안에 처리해보이겠다는 약조를 지킨 것이다.
보고를 접한 아레스는 의외로 침착했다.
‘철갑귀마대의 대대장들이 전략과 전술에 능하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당연한 결과지.’
군대의 진정한 힘은 뛰어난 지휘관이 통솔해야만 비로소 발휘되는 법이다.
아무리 강력한 군대일지언정 지휘관이 무능하면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갑귀마대는 한계가 있었다.
철갑귀마대의 대대장들은 철갑귀마대의 진정한 힘을 끌어올릴만한 전략이 없었고, 결국 템빨단과 정면에서 힘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그리고 힘에서 밀리자 그대로 궤멸당하는 추태를 보였다.
당해도 싼 것이다.
‘군대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지휘관의 역량.’
아레스가 길드원 모집에 신중해왔던 이유다.
아레스 군단원들은 각 직업 최상위 랭커인 템빨단원들과 달리 개개인의 전투력이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만큼은 일품이었다.
아레스는 자신의 강병 육성 스킬과 궁합이 좋은 이들만을 길드원으로 뽑아온 것이다.
“철갑귀마대와 템빨단의 전투 데이터를 가져와라. 새로 만들 군대는 철갑귀마대의 단점과 약점을 배제시켜서 육성하도록 하겠다.”
아레스의 심장이 뛰었다.
곧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질 벨토 왕국의 자원을 기반으로 대량의 군대를 육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쁠 수밖에 없었다.
***
“고생 많으셨습니다.”
철갑귀마대 잔당들을 해치우고 복귀한 스캇이 그리드 일행에게 인사했다.
그의 시선은 힐끔힐끔 유페미나를 살피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에 반해서가 아니라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리드는 왠지 모르게 뿌듯해졌다.
‘얘를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지.’
유페미나를 두려워하는 동지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동질감을 느끼고 싱글벙글 웃기 시작하는 그리드에게 스캇이 요구했다.
“우리는 나흘 후에 바로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계획입니다. 그 시기에 맞춰서 템빨단에서도 원군을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벌 목표지는 당연히 벨토 왕국의 수도다.
그러므로 스캇의 요구는 합당한 것이었다.
아레스 군단의 벨토 왕국 정복을 돕겠다.
이것이 바로 템빨단이 동맹을 제안하면서 내세운 조건이었던 까닭이다.
그리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멤버가 그대로 원군으로 참전하겠다.”
“당신께서 직접...?”
스캇이 깜짝 놀랐다.
일국의 왕이 앞으로 며칠이나 자신들과 함께 행동해준다니 이건 엄청난 예우였다.
‘정말이지 최소한의 양심은 있군.’
템빨국은 아레스 군단에게 동맹을 강요했다. 아레스 군단이 벨토 왕실에 반역자로 낙인찍힌 이유도 템빨국의 수작 때문이었다.
스캇은 그리드가 싫었고 템빨국이 같잖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째 그리드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매력을 느꼈으니 혼란스러웠다.
***
“뭐라!! 철갑귀마대가 전멸하였다고?!”
벨토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당연히 아레스의 수급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믿었던 철갑귀마대가 전멸하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제국과의 전쟁에서 대량의 병력을 손실한 아레스 공작에게 그만한 여력이 있었다니...?”
“아레스 그놈이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힘을 숨겼던 게 분명하다! 그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왕실을 기만했던 거야!!”
“아레스는 철갑귀마대를 육성한 장본인. 철갑귀마대 이상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흥분한 왕자들이 치를 떨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철갑귀마대를 잃고 약화된 벨토 왕실이 과연 아레스의 역습에 방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끝이다... 모든 게 끝이야....”
“뱀 같은 놈에게 우리의 모든 걸 빼앗기게 생겼다...!”
좌절하는 왕자들.
무능한 국왕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내가 지켜줄까? 응~?”
왕족만이 출입할 수 있는 왕실 회의장 문이 벌컥, 허락도 없이 열리더니 금안의 사내가 입장했다.
비쩍 마른 몸과 커다란 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다, 당신은 누구요?”
단지 바라보기만 해도 심장이 얼어붙게끔 만드는 황금색 눈동자.
그 안에 깃든 광기는 무척이나 폭력적이었다.
국왕과 왕자들은 본능적으로 큰 두려움을 느꼈고 도움을 갈구하게 됐다.
‘허억?’
힐끔, 회의실 문 너머에 대기하고 있을 기사들에게 시선을 보내던 국왕과 왕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숨을 삼켰다.
회의실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모조리 살해당해 있는 까닭이었다.
“다, 당신은 대체...!”
왕실에 멋대로 침입한 것으로 모자라서 폭력까지 행사하다니?
누가 봐도 사회 통념과 거리가 먼 이단자 같았다.
하지만 의외로, 금안의 사내가 내세우는 것은 제국의 깃발이었다.
“나는 사하란 제국에서 보낸 동아줄... 으음, 그래. 썩은 동아줄이다. 끅! 끅끅큭!!”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는 사내.
검에 묻은 피를 긴 혀로 핥아낸 그가 덥썩, 벨토 국왕의 턱을 손으로 붙잡았다.
“엎드려 내 발을 핥아라.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해봐. 그러면 이 몸께서 아레스 그 돼지 놈의 멱을 따주도록 하마.”
“히, 히익....”
아그너스의 좌우에 묵묵히 서있는 데스나이트 2마리를 뒤늦게 목격한 벨토 국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악몽 같았다.
드디어 제국으로부터 자립하나 싶었건만, 철갑귀마대를 하루아침에 잃은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또 제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야 됐으니 절망적이었다.
“킥! 키키키키킥!!”
부들부들!
수치심과 모욕감, 그리고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자신의 신발을 핥는 벨토 국왕을 빤히 내려 보던 아그너스가 결국 광소를 터뜨렸다.
벨토 왕국을 수호하여 벨토 왕실의 충심을 얻고, 아레스라는 위험 분자를 처단함으로써 제국의 후방 안전을 도모하라.
라는 제국 상층부의 명령 따위, 그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한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그리드와 아그너스.
악(齷)과 악(惡)의 첫 만남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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