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88화 (483/1,794)

템빨 31권 - 09화

당연한 말이지만, 대다수의 비공식 랭커는 ‘무명’이다.

넓디넓은 Satisfy에서 자신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활동하는 그들을 일반인이 자각할 리 만무했다.

그래, 아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템빨단원들이 최강자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 그조차도 일반적인 플레이어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벨토 왕국.

경제 규모도, 실질적인 땅의 크기도 서대륙의 모든 국가를 통틀어서 가장 작은 극동의 소국.

뚜렷한 이점이 없어 플레이어들에게 외면받는 그곳에 주둔 중인 아레스 군단은 여전히 은밀함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한데.

“템빨단이 동맹을 제안해왔다. 우리가 벨토 왕국을 장악하고 제국에 대항할 힘을 갖출 수 있게끔 돕겠다는군.”

“....?”

템빨단이 우리 군단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다고?

심지어 벨토 왕국을 노리고 있단 것까지 알고 있어?

아레스에게 소집당한 장수들과 참모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일부일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덤덤했다.

“템빨단이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당연지사.”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소문이 진즉부터 돌고 있었죠. 크라우젤이 템빨단에게 우리의 정보를 유출시킨 게로군요.”

“템빨단의 동맹 제안을 수락해선 안 됩니다. 놈들은 도움을 빌미로 우리의 크라우젤 사냥을 막으려는 심보일 테니까요.”

“우리가 크라우젤을 사냥하고 있단 사실을 과연 템빨단이 알고 있을까? 천하의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을 거라고? 최소한 나는 상상조차 안 가는데?”

“내 생각도 같다. 템빨단의 동맹 제안은 크라우젤과 관계없을 거야. 템빨단이 원하는 건 따로 있을 거라고.”

“동맹의 수락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서 템빨단의 속내부터 파악하는 것이 좋겠죠. 그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지 알아야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을 겁니다.”

장수진과 참모진이 열변을 토했고 아레스는 잠자코 있었다.

직급의 고하 없이 모든 부하가 자유로운 의견을 제시하게끔 만들고 그것을 종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

아레스의 가장 큰 장기 중 하나였다.

“벨토 왕국과의 전쟁 승리를 끝으로 후방을 안정시킨 적기사단이 중앙으로 돌아간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

아레스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스캇이 입을 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됐음을 확인한 스캇이 말을 이었다.

“에피소드 흐름상 제국의 시선이 템빨국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템빨국 또한 본격적인 제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을 터. 그들이 우리에게 동맹을 제안한 것은 결국 자신들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함일 거다.”

“그러니까 템빨국이 우리에게 동맹을 제안한 이유는...”

“우리를 키워서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그 틈에 자신들의 숨통이 트이게끔 하려는 의도란 겁니까?”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지.”

“음.”

잠자코 있던 아레스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스캇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제스처였다.

“템빨단은 우리를 ‘돕겠다’는 취지를 내걸고 동맹을 제안해왔지만 사실상 도움이 필요한 쪽은 템빨단이라 이거군.”

전쟁에서 패배한 벨토 왕국은 이미 제국의 관심 밖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아레스는 급할 게 없었다.

벨토 왕국의 공작 직위를 이용, 착실하게 세력을 쌓아 가면 된다. 기회를 엿봐서 왕실을 전복시키고 벨토 왕국을 집어삼키기까지 자력으로 해낼 수 있었다.

‘그래, 템빨단의 도움은 필요 없다.’

물론 템빨단의 도움을 받으면 벨토 왕국을 집어삼키는 시기를 훨씬 더 앞당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레스가 궁극적인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대상에는 템빨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괜히 초조해하다가 템빨단을 돕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결국 적을 키워주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동맹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겠다.”

라고, 아레스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아레스 님!! 아레스 님!!”

아레스의 또 다른 최측근 럭이 허겁지겁 회의실로 달려왔다.

회의는 지루하다며 사냥을 나가겠다던 그가 갑자기 소란을 피우면서 등장하자 모두가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지?”

질문하는 아레스에게 스캇이 소리쳤다.

“이곳으로 왕실군이 진격해오고 있다지 말입니다!!”

“뭐?”

아레스가 벨토 왕국에서 공작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커다란 충성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아레스는 벨토 왕국 최고의 충신이었다. 국왕과 왕실은 당연히 아레스를 신뢰했다.

한데 군을 파견하다니?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자 술렁이는 회의실.

혼란 속에서, 아레스와 스캇은 꽈드득 이를 갈고 있었다.

‘라우엘의 계략이 분명하다.’

지금의 템빨국을 만든 것은 그리드의 인망과 무력, 그리고 라우엘의 지략이다.

라우엘의 지략은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고 그건 아레스와 스캇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레스 님, 라우엘 그자가 벨토 왕실과 우리를 이간질 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알고 있다. 동맹을 강요해버리는군.”

“뭐라고! 지금 상황을 유도한 게 템빨단이라고요?!”

“괘씸한 놈들!! 결코 동맹을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아레스와 스캇의 대화를 듣고 흥분한 장수진과 참모진이 소리쳤다.

특히 럭은 얼굴을 대춧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천외천 시절의 크라우젤과 호각을 겨루었던 그.

검성으로 전직하고 레벨이 초기화 된 크라우젤을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사냥’ 중인 그 맹수가 템빨단에게 분노와 살기를 피어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겨서 벨토 왕국을 장악하고 곧장 템빨국으로 쳐들어가지 말입니다?”

흥분해서 외치는 럭을 진정시킨 사람은 스캇이었다.

“아니, 그럴 순 없다. 현재 우리 전력으로는 왕실군을 감당할 수 없어.”

벨토 왕국은 소국이지만 군대의 수준은 막강했다.

모두 아레스 군단의 공로였다.

그동안 아레스 군단은 벨토 왕실의 신임을 얻고자 강병을 육성하고 체계적인 군 조직을 만들었다. 제국에 대항할 힘을 쌓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데 그간의 노력이 지금 이 순간 도리어 독이 되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지만 어쩌겠는가?

“템빨단의 동맹 제안을 수락하시죠.”

스캇이 아레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미래의 적을 걱정하느라 지금 당장 눈앞의 적에게 잡아먹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당연히 아레스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키진 않았다.

뻔히 알면서도 타인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 누구라도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고 달갑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의 치욕은 언젠가 다시 되갚아 주면 됩니다. 벨토 왕국을 장악하고 안정을 찾게 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겁니다.”

“....어쩔 수 없지.”

스캇의 계속되는 설득 끝에 드디어 아레스가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 그는 한낱 자존심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내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동맹 제안을 수락하겠다.”

***

벨토 왕국.

아레스 공작령에 진입한 왕실군이 여덟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폭풍처럼 일어나는 흙먼지와 사방팔방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가 하늘 위 그리드의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든다.

-대답은 아직이야?

지상을 관찰하던 그리드가 초조함에 휩싸여서 귓속말을 보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가는 NPC 주민들을 지켜보기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드의 귓속말을 확인한 라우엘이 대답했다.

-아레스가 우리의 동맹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게끔 수를 써놓지 않았습니까.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만간 대답이 올 거예요.

-그 수가 문제잖아.

라우엘은 벨토 왕실군이 아레스 공작령을 공격하게끔 만들었다.

아레스가 동맹을 수락할 수밖에 없게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리드는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 형태로 동맹을 맺어봤자 과연 신뢰를 줄 수 있을까?

-애초에 아레스 군단과는 친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야망은 너무나도 크고 우리와 공존할 수 없으니까요. 엄밀히 따지면 단발적인 비즈니스 관계인 겁니다. 인의를 따질 필요는 없죠.

-.....흠.

하지만 역시, 죄 없는 NPC들이 살육당하는 광경은 보기 괴롭다.

아레스 공작령의 주민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왕실군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벨토 왕실은 아레스 공작령의 모든 백성을 아레스와 공범으로 규정한 듯했다.

‘잠재적인 위험을 방치할 수는 없는 거겠지.’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는 그리드의 귓가로 라우엘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아레스가 동맹을 수락했습니다. 단, 조건을 붙였네요. 8개로 나뉘어서 진격 중인 왕실군의 부대 중 2개 부대를 템빨단이 막아주길 요청했습니다. 훈련 때문에 파견한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3일 동안만 진격을 막아 달랍니다.

-우리가 만든 똥은 우리가 치우라 이건가?

-원군의 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은 의도도 포함되어 있겠죠.

-본 실력은 드러내지 말라고 했지?

-네, 잠재적인 적에게 모든 전력을 노출하는 건 위험하니까요. 딱 벨리알 레이드 당시 수준으로만 실력들을 발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우리가 처리할 적 부대는 2개가 아니고 절반이네.

-...아니, 처리가 아니라 3일 동안만 발목을 붙잡.... 전하? 전하?? 님??

***

“나는 진즉부터 아레스 그놈을 의심하고 있었다.”

바니쉬 공작.

그는 본래 벨토 왕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하지만 혜성처럼 등장한 아레스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공작위에 등극하는 과정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힘을 잃고 말았다.

왕실도, 관료들도, 백성들도.

모두가 바니쉬 공작보다 아레스 공작을 높이 평가했고, 이제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서 아레스 공작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바니쉬 공작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바니쉬 공작의 입장에서 느끼는 상실감은 무척 컸다.

가문 대대로 벨토 왕국에 충성해온 덕분에 누릴 수 있던 권력을 어느 날 굴러 들어온 돌에게 빼앗겨 버렸으니 담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레스를 견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레스는 유능해도 너무 유능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군사적 재능은 탁월하여 약소국 벨토 왕국의 군사력을 단 3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을 정도이다.

만약 중간에 제국만 없었다면, 벨토 왕국은 진즉에 다른 왕국을 공략해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대단한 놈이 우리 같은 소국에 충성하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됐지.’

심지어 사하란 제국마저도 원할만한 인재.

그가 왜 하필 벨토 왕국에 충성을 바쳤을까?

바니쉬 공작은 쭉 의심해왔다.

그래서 며칠 전 도착한 소식을 접하고 뛸 듯이 기뻤다.

아레스 공작의 궁극적인 목표는 벨토 왕국의 장악이다.

익명으로 제보 된 이 소식에는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다.

그건 바로 아레스 공작령의 군사 동향.

아레스 공작이 배치한 군대는 언제든지 왕도로 진격할 수 있는 형태를 갖췄으며, 왕도의 구조를 재현한 시가지에서 전쟁 연습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왕도 장악을 의도한 군사 훈련이었다.

이에 대해 바니쉬 공작은 국왕에게 보고하였고, 누구보다 아레스 공작을 신뢰하였기에 더욱 더 격분한 국왕은 바니쉬 공작에게 당장 아레스 공작을 추포해 오라고 명했다.

최정예 왕실군을 지원해 주면서까지 말이다!

“이 1만의 강병을 네놈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왕실군의 강함은 차원이 다르다.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활약을 펼쳤을 정도이다.

반면 아레스는 제국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병력을 손실한 상태였다.

지금의 그에게는 최정예 왕실군에 맞설 힘이 없었다.

“큭큭... 크하하하하!! 박살을 내라!! 아레스의 발자취가 남은 땅은 모조리 불태우고, 아레스의 손길이 닿은 시설은 모조리 부셔버려라!! 아레스 공작령을 왕국의 지도에서 지워라!!”

“우와아아아아아!!

기쁨에 들뜬 바니쉬 공작과 왕실에 충성하는 왕실군의 진격은 거침이 없었다.

8개의 부대로 나뉜 강병들이 아레스 공작령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아니, 막지 못할 줄 알았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