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87화 (482/1,794)

템빨 31권 - 08화

유라는 그리드를 처음 만났을 당시에 느꼈던 경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통합 랭킹 5위.

20억 유저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던 자신의 맹공을 유유히 맞섰던 사내.

천외천 크라우젤을 만났을 때보다도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그때 각인된 걸까.’

유라는 필요 이상으로 그리드를 의식하게 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드의 행보를 눈과 귀로 쫓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리드에게 묘한 매력을 느꼈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자신의 외모와 재력을 탐하지 않고 ‘유라’라는 사람을 온전히 대면해주었던 그리드.

그의 손에 이끌려서 찾아간 기사식당에서 먹은 불고기 백반의 맛이 여전히 입안에 맴돈다.

“유라 님?”

“아.”

<데빌 슬레이어>의 히든 피스를 얻기 위한 지옥 원정을 눈앞에 둔 유라.

모든 준비를 끝내고 게이트 앞에 선 그녀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라우엘이 웃어주었다.

“긴 원정을 앞두고 긴장하셨나 보군요. 걱정 마세요. 당신은 늘 그랬듯이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이때 제가 떠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사실 유라는 제국과의 분쟁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라우엘은 한시라도 빨리 지옥을 다녀오는 편이 옳다고 종용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당신께서 일일이 신경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역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의 힘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가치가 훗날에는 그리드 님이나 크라우젤 님보다 더 높아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당신의 발목을 붙잡지 않을 겁니다.”

대악마 벨리알이 죽으면서 드롭한 아이템과 칭호의 가치는 천문학적이었다.

특히 신화급 아이템을 드롭했다.

라우엘이 예상하건데 모든 대악마들이 신화급 아이템을 드롭할 가능성이 높았다.

즉, 대악마를 한 번 레이드할 때마다 템빨단의 전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단 뜻이다.

대악마를 레이드하기 위해서는 유라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말이다.

“수애라는 여성도 아이린 양 만큼이나 아름답고 현명해 보이더군요. 영우 씨가 좋아하겠어요.”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

유라가 마음속에 묻어두기 위해서 노력했던 불안을 토로했다.

그녀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는 명백한 질투였다.

그녀는 그리드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들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자신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는 그리드가 원망스러웠고 매력 없는(?) 본인이 싫었다.

그녀에게 라우엘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아이린 님과 수애 님을 합한 것보다 당신이 더 아름답고 현명합니다. 그녀들을 경계하지 마세요. 그녀들은 진정한 그리드 님과는 맺어질 수 없는 덧없는 존재들일 뿐이니까.”

진정한 그리드.

현실의 신영우를 뜻함이다.

백설처럼 흰 유라의 두 뺨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저는 딱히 영우 씨와 맺어질 생각은...”

없다.

자신이 그리드에게 아무리 호감을 품으면 뭐하는가?

정작 그리드는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부질없다.

가녀린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민망해하는 유라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머물렀다.

‘만인에게 사랑받는 여인조차도 정작 본인이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는 사랑받지 못하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사랑이란 것은 힘든 듯하다.

극검과 반트너를 비롯해서 괜히 모태 솔로가 많은 게 아니다.

작년 크리스마스도 혼자 보냈고, 올해 여름휴가도 혼자 보내게 될, 세상에 모래알처럼 널려있는 모태 솔로들.

세계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유라가 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럼 전 다녀올게요.”

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른 유라가 지옥으로 향하는 게이트에 발을 들였다.

벨리알 레이드 후 수개월.

지옥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자 쉬지 않고 노력해온 그녀다.

라우엘이 진심으로 응원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시길.”

***

“허허... 초보자처럼 보이는 자네가 이토록 일을 잘할 줄은 몰랐네. 똥독이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삽질을 능숙하게 해내니 마치 똥을 푸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아.”

“똥을 푸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니...? 그것 참... 과찬이시군요.”

“아니, 과장하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하하, 뭐, 저도 여러분처럼 그리드 국왕전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래 뵈도 당연히 유능하죠.”

“껄껄! 훌륭한 국왕 밑에 훌륭한 백성이 있는 법! 맞네, 맞아! 템빨국 백성은 모두가 유능하지! 껄껄껄껄!!”

“하하하핫!!”

에트날 왕국의 수도였던 라인하르트가 템빨국령으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시설 레벨이 초기화됐다. 여느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페널티다.

그 탓에 라인하르트의 하수도 시설 레벨은 고작 2에 불과했다. 똥 푸는 직업이 성행할 정도였다. 이는 최대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라우엘의 의도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풀풀.

똥내를 풍기면서 노동자들과 정겨운 담소를 나누는 청년.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그는 지난 50일 동안 백성의 삶을 체험하면서 그리드 국왕전하 만세를 쉬지 않고 외치는 중이다.

백성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야만 펼칠 수 있는 고난이도의 선전활동을, 기왕지사 퀘스트를 수행하는 김에 적극적으로 벌이는 것이다.

[100가지 직업 체험을 완료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국왕의 역할(1)>퀘스트가 <국왕의 역할(2)>퀘스트로 연계됩니다.]

[<국왕의 역할(2)>퀘스트를 수행하기에는 아직 레벨이 부족합니다. <국왕의 역할(2)>퀘스트는 350레벨에 개방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국왕의 검>제작법을 획득하였습니다.]

<도안:국왕의 검>

등급:유니크

국왕의 검 제작법을 알게 됩니다.

습득 조건:국왕 그리드.

“그럼 이만.”

반나절 동안 정든 노동자들과 작별을 고한 그리드.

인적 없는 골목길에 진입한 그가 꽈드득! 이를 갈았다.

‘내 예상이 맞았어.’

국왕의 검 제작법의 습득 조건.

이를 보는 순간 그리드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밖에 익힐 수 없다니...’

좋은 게 아니다.

이는 국왕 퀘스트의 보상이 플레이어에 따라서 달라짐을 시사하는 바이다.

‘내 직업은 대장장이로 분류되기 때문에 보상으로 제작법을 얻은 거고.’

다른 직업군 플레이어의 <국왕의 역할(1)> 보상은 ‘온전한 국왕의 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드는 억울했다.

‘나만 개손해잖아?’

어차피 국왕의 검은 국왕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여러 자루를 만들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대장장이라는 이유로 제작법을 획득했고, 이를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게 생겼다.

다른 국왕은 퀘스트를 완료하면 온전한 검을 얻을진데 정녕 혼자만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국왕 퀘스트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손해가 커질 것 같은데.’

극단적인 예로 아레스가 왕위에 오른다고 가정해보자.

그의 직업군은 누가 봐도 장군계열.

그가 국왕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군사력 성장과 관련될 공산이 크다.

반면 그리드는 대장장이라는 이유로 계속해서 대장장이 작업과 관련 된 보상을 얻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라를 통치하는 국왕이 얻는 퀘스트 보상이 대장일과 관련 된다는 건 너무 큰 손해지.’

나는 왜 하필 대장장이가 됐을까!

오래간만에 안타까워하는 그리드였다.

벽에 이마를 찧으면서 좌절하는 그의 귓가로 행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저 사람한테 똥내가...”

“어머, 저 낡은 천 옷이 온통 똥물로 범벅이 됐네. 어쩜 좋담.”

“우리가 도와줍시다.”

“일단 따뜻한 스프 한 끼 먹이고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보살펴줘야겠군.”

피식.

치를 떨고 있던 그리드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여태껏 그가 살아온 세상은 약자에게 너무나도 잔혹하지 않았던가.

현실이든, 게임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볼 때면 무시하고 비웃기 일쑤였다.

한데 템빨국 백성들은 그러지 않았다.

현재 그리드가 초보자용 천 옷을 입고 있고, 심지어 그 천 옷이 똥물로 젖었을지언정 비웃지 않고 도리어 걱정을 해주었다.

그리드는 너무나도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템빨단원들이 백성들을 정말 잘 교육시키고 있구나.’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별하지 말라.

힘든 자를 도우라.

약자는 무시와 멸시의 대상이 아니다.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이 템빨국의 귀족으로서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사상은 모두 그리드의 과거를 고려한 것이다.

템빨단원들은 그리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에.

그렇기에 템빨국의 백성들만큼은 제2의 그리드, 제3의 그리드-피해자-를 만들지 않게끔 신경 썼고 그것이 템빨국의 가치를 높였다.

‘템빨국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신규 유저들은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겠군.’

생각하며 흡족해하는 그리드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하고 있었다.

실제로 신규 플레이어들은 ‘시작의 나라’로 삼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템빨국을 지목하는 추세다.

템빨국에서 받는 퀘스트는 다른 국가에서 받는 퀘스트와 달리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NPC국가들은 현실 사회를 너무 고스란히 반영한 바람에 초보에게 불친절한 면모가 있던 반면 템빨국은 초보들의 유토피아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통용되는 말이다.

템빨국 백성들이 다른 국가의 백성들보다 훨씬 더 배려심이 깊고 친절하다 할지언정, 아무에게나 친절하진 않았다.

나태한 이에게는 템빨국 백성들도 베풀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국왕 퀘스트를 클리어하셨겠지요?

후드집업을 착용하고 왕궁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리드에게 귓속말이 도착했다.

라우엘의 귓속말이었다.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귀신이라니까. 어떻게 딱 알고서 귓속말을 보내는 거야?

-전하를 모셔온 세월이 어느덧 현실 시간으로 2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천재적인 두뇌와 만물의 이치를 꿰뚫는 윤회안이라면 전하의 역량과 성격을 고려해서 전하의 상황을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지요. 큭...! 큭큭!

-....그래서 무슨 용건이냐?

-아레스 군단에게 원군으로 파견할 인원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목록을 검토해 보시고 별반 문제가 없다고 사료되시면 윤허해주십시오.

-누구누구지?

-그리드 전하와 지슈카 공작, 그리고 폰 백작, 레가스 백작, 유페미나 백작입니다.

고작 다섯 명.

일국의 왕권을 빼앗으려하는 세력을 돕고, 이를 핑계로 동맹 관계를 구축하려는 의도의 원군치고는 숫자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

평범한 관점에서 봤을 땐 이와 같은 의문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그리드의 감상은 달랐다.

-화려하구만.

주작궁의 주인이 된 지슈카.

대규모 전투에서 그녀가 발휘하는 전투력은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가뿐히 초월할 정도이다. 20억 유저를 통틀어서 최고일 것이다.

창기사 폰과 아수라 레가스의 전투력 또한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드가 레이단의 영주였던 시절에는 그들과 대전해서 100프로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정도이다. -물론 90프로는 장담했지만-

지금의 그리드가 당시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성장했듯이 그들 또한 성장했다. 템빨국의 쌍두마차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마지막으로 유페미나.

그녀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여전히 똑같다.

조건부 최강자.

충분한 숫자의 스킬을 복제해놨을 때 그녀가 발휘하는 파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 지금의 그녀는 <무무드의 영혼 해방>퀘스트를 얻고 <무무드의 후계자>를 노리고 있다.

무무드의 수속성 마법과 무속성 마법을 다루게 되어서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상태이고, 잠재력은 신화급이다.

-이 정도 전력이 원군으로 가면 아레스 군단도 든든해하겠군.

-네, 천하의 아레스라도 두 팔 벌리고 환영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후훗... 아, 다만.

-다만?

-유페미나 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고, 실제로 유페미나 님은 에트날과의 전쟁과 벨리알 레이드에서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장기간 동안 계속되는 전쟁에서 유페미나는 복제 스킬을 꾸준히 소모하였고 차츰 약화되어 임팩트 있는 활약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마 그녀에 대해서만큼은 아레스 군단도 크게 대우해주지 않겠죠. 유페미나 님께서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으니 전하께서 잘 달래주셔야 할 겁니다.

유페미나는 생김새처럼 소녀 같은 면이 있었다.

-응, 그래. 잘 챙겨줘야지.

동생 같은 아이다.

생각하던 그리드가 문득 세희를 떠올렸다.

-요즘 루비랑 섹시 여고생은 뭐해?

-여전히 백성들을 보살피고 계십니다. 이제는 퀘스트 위주로 도우면서 레벨과 보상도 챙기는 것 같더군요. 두 분 또한 꾸준히 성장하고 계시니 심려치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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