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 6화
“3만… 정확히 3만 명이로군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붙지만, NPC가 단 천 명만 거주하는 마을도 플레이어의 유입이 꾸준하면 도시로 성장할 길이 열린다.
이와 같은 이치로 국가를 건설할 때 필요한 최소 인구도 10만에 불과했다.
한데 그리드가 동대륙으로 넘어가고 채 열흘도 안 돼서 데려온 NPC의 숫자가 무려 3만인 것이다.
어마어마함을 넘어서 비현실적인 숫자였다.
라우엘은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거 아십니까?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1명의 NPC와 호감도를 100퍼센트 쌓는 일도 어려워합니다.”
설령 NPC와 호감도를 최대치로 쌓더라도, 그 NPC가 삶의 터전을 버려가면서까지 자신을 따르게 만들 수 있는 플레이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것이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근데 전하께서는 채 열흘도 안 되서 3만 명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을 이주시켜버린 겁니까?”
파그마의 후예에게는 ‘쉽게 인정 받는다.’는 내용의 칭호 효과가 있다는 사실, 라우엘은 그리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NPC와 호감도를 빠르게 쌓는 이유는 단지 칭호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NPC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리드의 매력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경악과 감탄을 반복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사실대로 말했다.
“사실은 말이지. 나를 따라오겠다는 판게아 주민은 25만 명이 넘었었어. 막말로 판게아의 모든 주민들이 템빨국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지. 하지만 아쉽게도 서대륙 귀환 스크롤이 허용하는 인원수가 3만 명밖에 안 되더라고. 그래서 3만 명밖에 못 데려온 거야.”
“……”
상대가 그리드가 아니었다면, 라우엘은 100퍼센트 거짓말이라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제발 허풍 좀 적당히 치라고 한 소리 해줬을 것이었다.
하지만 라우엘은 그리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말을 고스란히 믿었다.
“……실로 마성의 남자. 전하의 매력은 마치 늪과 같아서 그 누구도 전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로군요. 마치 제가 전하로부터 헤아려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 그러냐.”
오글오글!
닭살을 털어낸 그리드가 퀘스트 창을 열었다.
그리드의 퀘스트 목록에는 특별한 대단위가 하나 있었다.
<국왕 퀘스트>
그리드가 템빨국을 건국한 이후 생성 된 대단위였다.
오로지 국왕이 된 플레이어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퀘스트.
평범한 플레이어는 존재조차 모른다.
‘대장장이들은 칸에게, 한속봉 일가는 라우엘에게, 주작단원들은 아스모펠에게 맡기면 된다지만.’
나머지 판게아 주민들은 어떤 재주와 재능을 지녔는지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태다.
그리드는 그들의 상세 정보를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영주의 검>으로 3만 명의 주민을 1명씩 일일이 엿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노가다였다.
하루 이틀 만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심하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국왕 퀘스트 목록을 열었다.
미뤄왔던 퀘스트 하나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대영주의 검을 <국왕의 검>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내용의 퀘스트였다.
<국왕의 역할(1)>
난이도:연계 퀘스트
국왕은 만백성의 어버이입니다.
모든 백성을 살피고 헤아려서 그들을 적합한 자리에 앉힐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고 백성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100가지 직업 체험.
퀘스트 보상:<국왕의 검>제작법. 다음 연계 퀘스트 개방.
<국왕의 검>
내구력:530/530 공격력:320
*위엄+300
*통찰력+300
*통솔력+300
*스킬 ‘광역 캐릭터 관찰’ 생성.
*스킬 ‘인재 탐색’ 생성.
일국을 다스리는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환상의 보검입니다.
병사와 백성들을 보다 면밀하게 관찰하고 효율적으로 통솔할 수 있습니다.
사용 조건:왕
무게:490
광역 캐릭터 관찰.
영주의 검과 대영주의 검이 ‘1명의 대상’을 관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한 번에 여러 명을 관찰할 수 있게 되면 인재 탐색이 쉬워질 테지.’
그리드는 이 국왕의 검을 진즉부터 갖고 싶었다.
하지만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보라!
무려 100가지 직업을 체험하란다.
황당할 정도로 높은 난이도의 퀘스트였다.
‘귀찮아서 미뤄왔지만…’
그리드는 판게아에서 데려온 3만 명의 주민뿐만 아니라 현재 템빨국을 구성하고 있는 약 80만 명의 백성들 모두를 관찰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들 중에 천재로 분류되는 네임드급 NPC가 있을까봐서?
‘그건 너무 과한 욕심이고.’
그리드가 현실적으로 원하는 것은 각 분야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수준의 평범한 인재들이었다.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만 있어도 템빨국의 인력난은 크게 해소될 것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자.’
후, 크게 심호흡한 그리드가 왕좌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난 잠행에 나선다.”
지옥이 시작됐다.
이날부터 무려 50일 동안.
그리드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서 매일 두 가지씩의 직장을 체험했다.
식당 서빙, 화장실 청소부, 여관 침구관리 등의 일상적입 업무부터 시작해서 학교 교사, 경비, 누군가의 호위 등 전문 직종도 체험했고 온갖 길드에 들어가서 각 분야의 은밀한 임무도 수행했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라인하르트 내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직장과 업무를 체험한 것이다.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순전히 그리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라.
그 어떤 플레이어가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클래스가 <기사>인 플레이어는 어쌔신 길드의 은밀한 임무들을 수행할 수 없다.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스탯과 템빨이 워낙 뛰어났다.
어쌔신 길드에 취직하고 받은 은밀한 임무들을 높은 민첩성과 <투명 후드집업>을 활용해서 쉽사리 클리어해버렸다.
마법사 길드에서는 매직 미사일과 <벨리알의 지팡이>로 날아다녔다.
탱커 길드에서의 활약도 압권이었다.
<행상인을 호위할 때 나타나는 적의 공격을 탱킹할 것>이라는 임무.
그리드 혼자서 10만 딜을 탱킹했다.
그와 함께 퀘스트를 수행했던 다른 평범한 탱커 유저들은 ‘반트너를 뛰어넘는 괴물 수호 기사가 나타났다’고 떠들고 다녔을 정도다.
“그리드 완전 먼치킨 아니냐?”
“먼치킨이 뭔데?”
“판타지 소설 주인공.”
“……”
그리드의 근황을 접한 템빨단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드는 혼자서 완전히 다른 게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드는 이제 명실상부한 사기 캐릭이 된 것이다.
정작 그리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난 아직 허접해.’
전설이며 신화를 엿보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전설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신화급 전직의 가능성을 열어놔 놓고도 정작 전대 전설보다는 무능하다는 뜻이다.
미완성.
아직은 이도 저도 아닌 존재.
그것이 그리드가 스스로에게 내린 평가다.
‘조금 더. 아니, 많이 더.’
노력하고 또 노력하자.
성장하자.
유능해지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라인하르트 전역을 누비는 그리드.
정체를 감춘 그가 온갖 직업을 체험하는 50일 동안 라인하르트에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라인하르트에 천재 마법사가 등장했다던데.”
“라인하르트에 천재 어쌔신이…”
“라인하르트에 천재 청소부가….”
“라인하르트에 하늘이 내린 안마사가 있다고…”
그 모든 소문이 그리드 한 명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드는 몰랐다.
50일 동안 계속 된 이 소문 덕분에 템빨국으로 유입되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더 많아지고 있음을 말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안마사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 안마 실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전설의 안마사’라는 직업이 등장한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
“여기가 마지막 집인가.”
그리드가 50일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안.
극검은 그리드에게 별도의 임무를 부여받고 수행 중이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임무다.
던전 제작자 포식이불족발을 찾을 것.
아주 중대한 임무였다.
“한 달 내내 불족발만 먹었더니 자꾸만 피똥이…”
극검이 인터넷에 검색해 본 결과, 전국에 존재하는 포식이 불족발 점포는 총 109개였다. 상당한 규모의 족발 체인점인 것이다.
이 109개의 포식이 불족발 중 어디에서 ‘던전 제작자’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극검은 보름 이상 각지를 떠돌면서 포식이 불족발을 방문했고 매일 세끼를 불족발만 먹었다. 입술이 아리고 속이 쓰린 것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서 옵쇼!”
전라남도 해남.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한 그곳 땅 끝 마을에도 포식이 불족발이 있었다.
하필이면 서울과 엄청난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다.
투덜거리면서 불족발 집에 들어온 극검이 거의 불족발 전문가 수준으로 능숙하게 주문했다.
“불족발 소짜. 단 맛 덜 나게 물엿 조금만 넣고 센 불에 달달 볶아주쇼.”
“어이쿠, 알겠습니다.”
저 사람, 불족발을 한두 번 먹어본 솜씨가 아니다.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은 극검이 엄청난 미식가라는 사실을 대번에 눈치 챘다. 그리고 평소보다 최선을 다해서 불족발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맛있게 드십쇼.”
사장이 직접 불족발을 내왔다. 맛에 자신이 있다는 듯, 표정이 아주 자신만만하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극검이 운을 뗐다.
“다크.”
“…?”
“블러드 카니발.”
“…??”
“광룡의 알.”
“…???”
한 마디, 한 마디 던질 때마다 극검은 불족발집 사장의 안색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혹시 조금이라도 동요하는 기색이 보이면 바로 던전 제작자일 거라는 확신을 품고 말이다.
한데 사장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극검을 이상한 놈 보듯이 하면서 주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극검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여기도 아니라고?”
전국 109개 포식이 불족발을 모조리 방문하였는데도 던전 제작자를 만나지 못했다?
말인 즉.
“최악이다… 그리드가 말한 던전 제작자는 어쩌면 포식이 불족발을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식이 불족발을 애용하는 손님일 수도 있겠어.”
그럼 또 109개 모든 체인점을 돌아다니면서 단골집 목록을 알려달라고 부탁해야하는 건가?
“에이, 씨.”
허겁지겁 불족발 소짜를 전부 비운 극검이 벤으로 돌아갔다.
Satisfy전용 캡슐이 설치 된 초호화 벤이었다.
곧바로 캡슐에 앉은 극검이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눈짓했다.
“집에 도착하면 깨워.”
“넵.”
부르릉-
서울로 향하는 벤.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이 멀어지는 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 혹시 몰라서 이 머나먼 타지까지 이사 왔는데도 귀신 같이 알고 찾아왔군. 그리드, 역시 그놈은 보통내기가 아니야. 잔혹하고 끈질긴 놈이다.”
게임 내 캐릭터 모습과 달라 보이려고 삭발한 것이 다행이다.
안도하면서 식은땀을 털어내는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
아예 해외로 떠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가 당황했다.
극검을 태우고 떠났던 벤이 되돌아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봐, 사장.”
드르륵.
차문을 열고 내린 극검.
그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당신이 바로 던전 제작자 포식이불족발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의 식당에는 TV가 없었어. TV를 등한시하는 것은 Satisfy 폐인들의 특징이지.”
“…….”
“사장 당신은 본인이 TV를 안 보기 때문에 손님들도 당연히 TV를 안 볼 줄 알고 식당에 TV를 설치하지 않은 거야… 어때? 이 대한애국협회장 강대한의 추리력이? 어려서부터 된장과 김치만 먹고 자란 사람답게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것 같지 않나?”
“….TV가 없는 식당은 한두 곳이 아닐 텐데요?”
“그래,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확신은 못 했지. 하지만 당신은 썬그라스를 끼고 있다고. 세상에 어떤 족발집 사장이 썬그라스를 끼고서 가게를 운영할까? 당신은 감추고 싶었던 거야. 자신의 얼굴을. 맞지?”
“….놀랍군. 대한애국협회장이라는 직책은 괜한 간판이 아니었다는 건가?”
펄럭-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이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피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정면으로 맞부딪칠 각오였다.
“블러드 카니발에게 코크로 섬을 빼앗긴 게 분한 거지? 자, 덤벼라. 상대해주마.”
Satisfy가 출시 되기 전부터 쭉 게임을 해온 몸.
포식이 불족발 해남점 사장의 현피 경력은 최소 10년이 넘었다.
자신 있게 주먹을 말아쥐는 그에게 흥, 콧방귀 뀐 극검이 명함을 건넸다.
“갓리드와 템빨단이 그렇게 속 좁아 보였나? 웃기지 마라. 우리는 그저 너를 섭외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뭐…? 블러드 카니발의 수장이었던 내게 원한이 없다고?”
“원한은커녕 자랑스럽다. 그 강력한 세력의 수장이 한국인이었다니. 대한애국협회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하필이면 악독한 세력이었다는 점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고민해 보고 템빨단에 가입할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하라고.”
명함만 남기고 유유히 떠나는 극검.
그는 스스로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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