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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84화 (479/1,794)

템빨 31권 - 5화

“판덕 공!!”

주작궁을 복원하고 아루베와 철갑귀를 토벌한 판게아의 은인.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속봉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

판덕공 그리드의 등장이 모두에게 혼란을 안겼다.

"다, 당신이 왜 이곳에?”

판덕공의 행방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한속봉이 처형당한 이유 또한 판덕공의 행방을 몰랐기 때문이다.

한데 그가 지금 이 타이밍에 굳이 판게아에 나타나다니?

백성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왜...! 대체 왜 돌아오신 겁니까!! 차라리 끝까지 나타나질 말지!!”

당신이 초국을 완전히 떠난 게 아니었다면.

어차피 다시 돌아올 거였다면, 한속봉 영주님이 처형당하기 전에 와주셨음이 좋았을 거다.

"왜...! 왜 이제야…!”

판덕공을 원망해선 안 된다고.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백성들은 이성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속봉이 처형당한 직후에 보란 듯이 돌아온 판덕공은 얄미운 감이 있었다.

백성들이 그리드를 비난하고 야유를 보내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모두 닥치시오!!”

대장장이들이 나섰다.

하얀 망치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물론이고 검은 모루, 붉은 집게, 푸른 불꽃의 대장장이들도 몇 명 보였다.

“판덕공께서 우리에게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소?”

"당신들이 판덕공이었다면 양반들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겠는가! 영문도 모르고 양반들에게 불리었는데 두렵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판덕공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오! 당신들은 왜 자꾸 판덕공에게만 부담을 안겨주느냔 말이외다!!”

한때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대장장이 화이트가 필두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드 덕분에 변화할 수 있었던 한 남자의 포효다.

“......”

화이트와 대장장이들의 말은 구구절절이 옳았다.

그들에게 일침을 당한 백성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리드를 원망하지 못했다. 감정을 이성이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흐음.”

젖은 기와 위.

나무 위 우아한 표범처럼 지상을 굽어보는 그리드의 얼굴 위로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화이트와 대장장이들이 더없이 예뻐 보였다.

‘하얀 망치는 몰라도 다른 대장간의 대장장이들까지 나서줄 줄은 몰랐군. 역시 대장장이들이 의리가 있다니까. 기왕이면 저들도 데려가야겠어.’

동대륙 대장장이들의 수준은 굉장히 높다. 특히 4대 대장간의 주인들은 장인급을 넘봐도 좋을 잠재력을 지녔다. 그들을 템빨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그리드 세트 생산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었다.

생각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백주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나시는 게 좋겠소. 공께서 여기 계셔봤자 가슴 아프고 답답한 원망밖에 듣지 못할 게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

칸보다 나이가 족히 10살은 더 들어 보였지만 허리는 곧고 눈빛에는 총기가 있다.

백주림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감탄한 그리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께서도 저를 원망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소.”

처형당한 아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으나 백주림은 즉각 부정했다.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엄청난 정신력이었다.

"공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오. 앞으로도 계속 마찬가지일 것이오.”

“…좋군.”

대답을 통해서 백주림이라는 인물의 성향을 파악한 그리드가 커다란 미소를 피워올렸다.

동대륙에서 여러 좋은 사람들을 데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했다.

그의 미소를 목격한 백성들이 움찔했다.

‘웃어?’

‘뭐가 재미있다고 웃는 거지?’

모두가 슬퍼하고 있는 초상집에 찾아와서 혼자 즐겁다는 듯이 웃다니?

백성들은 그리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인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간신히 억눌러졌던 백성들의 분노와 원망이 다시금 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곧 다시 억눌러졌다.

따악-!

그리드가 손가락을 퉁기자.

"아, 아니…!”

"한속봉 영주님?“!

“수애 아가씨도!!”

모두가 두 눈을 의심했다.

4개의 황금 손에 어깨를 붙잡힌 한속봉 부녀가 그리드의 등 뒤에 나타난 까닭이다.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분들이 살아 있다니?

어찌 된 영문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모두에게 그리드가 소리쳤다.

수십 만 백성들의 오열을 묻어버렸던 폭우조차도 그리드의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높은 위엄 스탯이 발생시키는 부가 효과 중 하나였다.

자리의 모두가 힘 있게 들려오는 그리드의 음성에 귀를 사로잡혔다.

"나, 서대륙의 왕 템빨왕 그리드가 선언한다.”

‘서대륙?’

‘템빨왕?’

‘그리드?’

그리드의 태생과 정체.

새로운 사실들을 한꺼번에 알게 된 백성들이 그리드의 말에 더욱더 귀를 기울였고, 그들에게 그리드는 황당한 소리를 지껄였다.

“짐은 판게아의 영주 한속봉과 그의 가족들을 짐의 왕국으로 납치해가겠다.”

“......!!”

“너희의 왕에게 고하라! 초국 일등 충신 가문을 이 템빨왕 그리드님께 빼앗긴 것을 영원토록 한탄하고 후회하라고!!”

“.......”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그리드는 실컷 악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한속봉 부녀가 정말로 그에게 ‘납치’당한 거라면 저토록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애초에 한속봉은 사형수였다. 한데 살아있다.

백성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속사정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주르륵.

비에 젖어있는 백성들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한속봉 부녀가 어째서 살아있는지, 그리드가 납치범을 자처하면서까지 그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백성들 모두 깨닫고 있었다.

‘판덕공께서 한속봉 영주님과 수 애 아가씨를 구출하신 거야.’

‘갈 곳을 잃은 한속봉 영주님 일가를 거두어주시려는 거고.’

‘굳이 납치하는 거라고 표현하시는 이유는....’

‘한속봉 일가가 본인들의 의지로 초국을 도망친 것이 되면 초국 백성 모두가 그들을 진짜 반역자로 인식하게 될 테니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판덕공 홀로 총대를 메신 거다.’

‘한속봉 영주님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으로 모자라 명예까지 지켜주시다니... 세상에 저런 분이 또 있을까?’

맞다.

백성들은 그리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리드는 언젠가 다시 동대륙으로 돌아와서 판게아를 집어삼킬 계획이었고, 그때 전면에 한속봉 일가를 내세워야했기 때문에 한속봉 일가가 백성들에게 원망받는 일이 없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판게아에 오는 며칠 내내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방법이다.

“판덕공!”

“대모님과 영주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판덕공 만세!!”

“템빨왕 만세!I”

“그리드 님 만만세!!!”

감격에 복받친 수십 만 백성들이 그리드에게 절을 올렸다.

마치 양반의 행렬을 마주할 때와 같은 모습이다.

순간,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 창이 떠올랐다.

[판게아의 주민들이 당신을 신격화하기 시작합니다!]

[특별 보상으로 신위 스탯이 1 상승합니다!]

“.......”

개이득! 이라는 외침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는 그리드였다.

본인의 정체를 밝힌 이상 체통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험험.”

헛기침하면서 마음을 추스린 그리드가 한속봉 부녀를 데리고 백주림의 곁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서대륙 귀환 스크롤을 꺼냈다.

"자. 그럼 납치를 시작해볼까? 짐의 왕국으로 떠날 사람은 곁으로 모여라!”

소리치면서 주작단원과 대장장이들에게 눈짓하는 그리드.

그는 최대한 많은 주작단원들과 대장장이들이 곁으로 모여주길 바랐다.

한데.

"우와아아아아아아!!”

"앵?”

"저요! 저도 갈래요!”

"저희 가족도 따르겠습니다!!”

"에엥??”

"판덕공과 한속봉 영주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거예요!”

“에에에엥??”

그리드의 곁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주작단원과 대장장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만 판게아의 백성 대부분이 환호하면서 그리드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드는 더 이상 체통을 지킬 수가 없었다.

"개. 개이득…”

***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서둘러! 바쁘다고!”

“쉬지 마! 시간 없어!”

어디를 둘러봐도 바뻐 뛰어다니는 사람들뿐이다.

농업, 산업, 교육, 마법, 군사 등등.

실로 모든 분야에서 라인하르트는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니, 비단 라인하르트뿐만이 아니다.

템빨국의 모든 영지가 사정이 같았다.

그나마 스테임 공작이 지원해준 자금과 인력이 아니었으면 템빨국의 국정은 진즉에 마비됐을 것이다.

“사람. 사람이 필요해.”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보상으로 주는 연계 퀘스트 덕분에 플레이어의 유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들 덕분에 시장 경제가 활성화됐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그들에게 팔아먹을 물건이 없는데!

‘그나마 땅은 남아돌아서 부동산거래는 활발하지만.’

보다 많은 분야에서 일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꾼의 역할을 수행해줄 NPC들을 공수해온다는 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우엘은 그리드가 새삼 대단하다 느꼈다.

일반 전문직 NPC 한 명도 섭외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 그리드는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네임드 NPC들을 사귀고 곁에 둘 수 있었던 건지 놀라울 따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플레이어가 NPC와 절대적인 호감도를 쌓고 그를 완벽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NPC를 굳이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는 유저 자체가 적지.’

라우엘도 그랬다.

홀로 게임을 플레이하던 시기에 라우엘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은 자신의 성장이었다. NPC와의 관계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레벨을 올리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아이템을 강화해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NPC와 적당한 호감도를 쌓아왔을 뿐이다.

‘보통은 NPC와 대학할 시간에 다른 플레이어와의 교류에 집중하기 마련이니까.’

그리드를 생각하다보면 늘 상식선이 어긋난다.

피식 웃은 라우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간을 시찰하러 갈 시간이었다.

‘대장장이들이 조금 더 힘 내줘야 하는데.’

템빨국은 대장장이의 나라답게 대장간 사업에 큰 힘을 쏟는 중이었다. 굉장한 자금을 투자했다.

하지만 대장간 사업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일손이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 플레이어들이 요구하는 무구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칸 님께 대장장이들의 휴식 시간을 조금 더 줄여달라고 말씀드려야겠어.’

안 그래도 최근에 휴식 시간을 줄였는데 또 줄이라고?

대장장이들의 반발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라우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차 말했다시피 일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휴. 응?

깊은 한숨을 토하면서 성을 빠져나가던 라우엘이 도중에 멈춰 섰다.

내성 정원에 갑자기 거대한 빛의 기둥이 떨어진 까닭이다.

“어. 어라?”

라우엘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기를 몇 회 반복했다. 비벼보기도 했다. 급기야 뺨까지 꼬집어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위함이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그리드가 손을 흔들었다.

“나 왔어.”

“하하…. 이거 실홥니까?”

급기야 현실임을 깨달은 라우엘이 헛웃음만 홀렸다.

빛의 기둥과 함께 나타난 그리드.

그의 곁에 족히 만 단위의 NPC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인신매매범이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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