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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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31권 - 1화
환국.
온 누리를 떠받드는 기둥이며, 우국(愚國)들의 하늘임을 자처하는 국가다.
태초부터 동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그 ‘작은 나라’에 어느 날 특이한 아이가 태어났다.
왜 환국이 군림하는가?
인간을 우민과 양반으로 가르는 일이 과연 옳은가 등등.
남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의문을 품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파그마. 모든 인간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헛소리나 지껄이던 바보지.”
“…….”
과거를 회상하는 가람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고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길게 찢어진 눈매가 반달을 그리는 모습은 경국지색의 눈웃음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남자다.
‘빌어먹을 꽃미남!’
그리드는 가람의 미모에 호감을 느끼기는커녕 적의를 품었다. 애초에 가람부터가 그리드에게 선의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리드를 응시하는 눈빛은 사늘하기만 하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다.
“파그마 그 멍청한 놈의 기행이 정점을 찍은 것은 잡기를 익혔을 때야.”
가람은 등장 이후부터 계속 파그마를 하찮은 존재처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이를 불쾌해하지 않았다.
파그마를 만나본 적도 없는 그리드의 입장에서 파그마가 무시당하고 욕먹는다고 해 봤자 기분 나쁠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잡기라는 단어는 거슬렸다.
“잡기… 설마 대장일을 말하는 건가?”
그리드는 파그마라는 인물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다. 하지만 파그마의 기술은 존경했고 본인이 그 기술을 익혔음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대장일이란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최고의 축복이었다.
한데 가람은 대장일을 잡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드의 기분이 불쾌해지는 건 당연했다.
울컥해서 눈을 부라리는 그리드에게 가람이 같잖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만. 말이 짧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흥분해서 그만….”
그리드가 바로 굽실거렸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람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지금 그리드는 온전한 상태도 아니었다.
벨리알의 힘을 비롯한 온갖 버프스킬이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었다. 자칫 가람과 적대하게 되었다가는 단숨에 목이 날아갈 것이 뻔했다.
‘딱히 죽는 게 무서워서 굽실거리는 게 아니야! 이 녀석에게 파그마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획득하려면 최대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편이 옳다고 판단하는 거다!’
_누가 물어봤나?
‘…비굴한 놈이라고 오해할까봐.’
꽈드득!
브라함에게 핑계를 늘어놓던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비굴이라는 두 글자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서 가슴에 아프게 박힌 까닭이다.
그리드는 강자에게 꼼짝도 못하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병신… 앞으로는 누구에게나 당당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해놓고 이 모양이라니. 나라는 놈의 본성은 진짜 최악이군. 쓰레기야.’
자책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약자가 강자 앞에서 작아지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고 당연한 섭리다. 짐승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두려움을 느끼는데 짐승보단 그나마 나은 인간이 어찌 그러지 않을까? 천치가 아닌 이상.
“…….”
-불합리에 굴복하지만 않으면 된다. 강자라는 이유만으로 너를 모욕하고 불합리한 것을 요구하는 놈이 있다면 그때는 차라리 죽음을 각오하고 뒤집어엎어라. 약자라고 해서 자존심까지 버려도 좋은 건 아니니까. 워, 나는 약한 주제에 내게 대드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렸었지만.
약육강식의 섭리를 숭상하면서도 자존감은 높은 브라함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홀린 그리드의 마음이 어느 순간 풀렸다. 가람 앞에 위축되는 스스로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가람은 계속해서 말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 잡기라는 것이 의외로 쓸모가 많단 말이야? 파그마가 대장일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 환국의 양반들은 보다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민들이 갖다 바치는 그 어떠한 도구보다도 파그마가 제작한 도구가 월등히 품질이 좋았거든.”
스윽.
도포 속으로 손을 넣은 가람이 곰방대를 꺼냈다. 하얀색의 곰방대였다. 매끄러운 생김새로부터 품격이 느껴졌다.
"이 곰방대 또한 파그마가 백린목으로 만든 것이지. 큭큭, 담배 한 모금을 빨 때마다 환국에서 도망친 파그마가 그리워지더군. 놈을 괴롭히던 추억을 회상하게 되면서 말이야.”
“…….”
전설의 대장장이에게 담배나 만들게 시켰다고?
‘이 양반이라는 놈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파그마를 애송이 취급하며 부려 먹었던 거지?’
파그마는 바알과 계약한 이후 대악마마저도 격퇴하는 기염을 토해낸 강자다.
인계에 강림하는 대악마가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해 봐도, 파그마의 전투 능력이 다른 전투 계열 전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데 이 가람이라는 양반은 자꾸만 파그마를 애송이 취급하고 있었으니 괴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는 파그마와 이놈이 말하는 파그마가 정말로 동일 인물이 맞나?’
그리드가 이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었을 때.
"후.”
가람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그리드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드의 인격을 명백히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래, 파그마는 정말로 편리한 노동력이었다. 녀석이 환국에서 도망친 것을 아쉬워하는 양반들이 무척 많았어. 그러던 차에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한 네가 나타나주었으니 참으로 반갑구나."
가람이 그리드를 탐스러운 열매보듯이 훑었다.
그는 결정한 것이다.
“네놈을 환국으로 데려가겠다. 우민 하나쯤 같이 살게 된다고 해서 환국의 맑은 공기가 썩을 일은 없을 테지. 큭큭.”
‘이 새끼가.’
그리드의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왔다.
그리드 본인이 자신의 ‘본성’이라고 믿고 있는 비굴함 따위 진즉에 사라졌다.
그리드의 비굴함은 약자 시절 타의적으로 심어진 것일 뿐, 그의 본성이 아니었으니까.
‘뭘 멋대로 정하는 거지?’
그리드가 가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두려움이 걷힌다. 파리 새끼처럼 비비고 있던 두 손도 주먹으로 말아 쥐어진다.
“세계 최고의 대장 기술을 잡기라고 조롱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내 거처를 멋대로 정하겠다고? 내가 순순히 응할 것 같냐, 이 XX야? 내가 그렇게 만만해?”
라고, 그리드가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진정하고 놈과 더 대화를 나눠라.
브라함이 그리드를 말렸다. 브라함은 파그마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파그마가 자신을 해쳤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친구였기에.
정.’
그리드는 브라함의 마음을 이해했다. 또한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자기 자신 또한 파그마에 대해서 더 알아둬야 할 의무가 있었다.
파그마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전직 퀘스트와 히든 피스에 더 가까워질 터였으니까.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그리드가 가람에게 질문했다.
“아까부터 파그마가 환국에서 도망쳤다고 말씀하시는데 도망친 이유가 궁금하군요. 어떤 비화가 숨어있는 겁니까? 그리고 당신은 기껏해야 제 또래로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진즉 늙어 죽은 파그마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던 거죠?”
대답하는 것은 가람이 아니었다.
"이 정신 나간 놈…분을 보았나! 양반님께 그 무슨 실례되는 질문이냐…요! 양반은 위대하신 존재! 세월조차 비껴가거늘!”
삼다수였다.
가람이 등장한 이후. 바닥에 납작엎드린 채 절을 올리고 있던 그가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양반을 어지간히도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 듯했다.
‘세월이 비껴간다고?’
신이라도 되나?
삼다수의 말을 듣고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속삭여왔다.
-그럴 리 없다. 파그마는 보통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세월 앞에 무력했다.
‘그럼 이 가람이라는 놈이 알고 보면 허풍쟁인가?’
의문만 쌓여 간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리드에게 가람이 이죽거렸다.
“파그마가 환국에서 도망친 이유? 스스로의 무력함을 환멸하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무력… 했다고?”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가 무력했다고?
"그래, 놈은 같은 양반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무력했지. 양반이라면 응당 통과해야 하는 치우의 시험에 탈락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치우의 시험?”
“무의 소양을 보이는 시험이라고 풀이해주면 될까.”
“무의 소양…”
도대체 얼마나 높은 소양을 보여야하는 시험이기에 파그마 같은 강자가 탈락했단 말인가?
생각하는 그리드에게 가람이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뭐, 파그마는 유명한 약골이었으니까.”
“약골…?”
“그래, 아주 같잖은 놈이었지. 검술이랍시고 춤사위를 펼치는 재롱이나 피우던.”
“…….”
“흐음,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구나. 자, 환국으로 가자. 네가 해야 할 일이 많다. 그 전에.”
가람의 시선이 한속봉 부녀에게 꽂혔다.
순간, 그리드와 한속봉 부녀는 물론이고 삼다수까지 심장이 얼어붙는 착각을 느꼈다.
가람이 한속봉 부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드를 바라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서늘했기 때문이다. 가람이 그나마 그리드에게는 친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네 행방을 모른다며 감히 양반을 기만하였던 이 부녀를 죽여야겠지.”
스읍-
가람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입에 물려있는 곰방대가 붉게 달아올랐다.
‘안 돼!’
그리드는 백린목의 특징을 알고 있다. 백린목이 달아오른다는 것은 즉 폭발의 전조였다.
가람의 입에 물린 곰방대가 폭발하면?
상식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가람이 다칠 것이다.
하지만 가람은 양반이었고 양반은 상식이 통하는 상대 같지가 않았다.
"파그마의 검무!”
그리드는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한속봉 부녀를 지키기 위해서 춤사위를 펼쳤다.
동시에.
퍼엉-!!
가람의 입에 물린 공방대가 한속봉 부녀에게 화염을 쏘았고,
“회(回)!”
퍼퍼퍼퍼펑!!
어느새 한속봉 부녀의 앞에 선 그리드는 반격기로 화염을 맞받아쳤다.
“아… 아아…”
“이, 이럴 수가….”
불꽃에 휩싸인 가람을 본 한속봉 부녀와 삼다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양반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들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틈에 어서 도망치죠.”
넋을 잃고 있는 한속봉 부녀에게 그리드가 손을 뻗는 그때.
“미쳤나?”
꺼져가는 불꽃 속에서 가람이 속삭여왔다.
낮게 깔린 음성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격한 분노가 느껴졌다.
“우민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검을 휘둘러…? 조금 예뻐해 줬더니 내가 만만해 보였나?”
파앗!
가람이 그리드에게 몸을 날렸다. 한 손에는 곰방대를 쥐고, 한 손은 뒷짐을 쥔 채였다.
빈틈투성이인 그에게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연(聯)을 날렸다.
검은 귀신으로 전개되는 광속의 검술이었다.
한데.
휘리리릭-!
퍽!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는 것으로 연(聯)의 검로를 모조리 피해낸 가람이 그리드의 관자놀이를 곰방대로 힘껏 때렸다.
[9,3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친?’
평타가 이렇게 세다고?
지잉-
고통에 떠는 그리드의 시야 사각에 놓인 곰방대가 붉게 달아오른다.
그를 본 한속봉 부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리드 님!!!”
“……?”
퍼어어어어엉!!
[25,31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쪽 눈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실명에 걸립니다.]
“…?!”
갑작스러운 폭발에 그리드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피로 범벅이 된 한쪽 눈을 찌푸리며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가람이 콧방귀 뀌었다.
"방정맞은 춤사위는 기방에서나 춰라.”
파그마익 검무.
지금의 그리드를 만들어준 절대적인 무력을 하찮은 춤사위로 조롱하는 가람이었다.
그에 분노한 그리드가 정신을 가다듬고 재차 검무를 펼쳤다.
검은 귀신을 허공에 수놓으며 거리를 좁혀오는 그에게 가람이 살기를 피어 올렸다.
"도무지 귀여워해 줄 수가 없군. 다리쯤 잘라 줘야 정신을 차릴 테냐?”
가람의 기억 속 파그마의 검무는 하찮은 것이다.
파그마의 검무에 그는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했고, 그리드가 펼치는 춤사위를 방해할 필요조차 못 느꼈다.
바로 그게 실수였다.
“연살파극(聯殺派極)!!”
“……?!?!”
가람의 기억 속 파그마를 아득히 초월하는 검기의 전개.
여유로 가득하던 가람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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