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22화
“용암 감옥이 있는 방향이로군.”
양반들은 폭음이 발생한 장소가 어디인지 순식간에 파악해냈다.
이곳 왕궁과 용암 감옥의 거리를 고려해 봤을 때, 양반의 청각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왕도에서 이런 난리가 발생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군.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럴 리가.”
양반들이 현재 카라스에 머물고 있음을 다른 국가들 또한 알고 있다. 굳이 소란을 발생시킬 리 만무하다. 양반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가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단 사실을 뻔히 알고도 어리석은 짓을 벌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용암 감옥에는 한속봉 부녀가 갇혀있다고 했지. 평소 한속봉의 인망을 고려해 봤을 때 그를 구출하려는 무리가 소란을 발생시켰을 공산이 크다.”
“호오… 놈들은 우리가 두렵지 않은 건가.”
“두렵겠지. 하지만 한속봉 부녀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한속봉 부녀는 초국의 귀감이 되는 귀족이니만큼 그들의 추종자가 많으니까.”
“흐음, 한데 용암 감옥에는 흑마 강시 한 구가 배치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초국에 흑마 강시를 상대로 저만한 소란을 피울만한 실력자가 있었나?”
“초왕의 십검쯤 되면 가능할 테지.”
“십검이라고? 핫, 한속봉을 처형하겠다고 결정한 장본인이 바로 초왕이잖나? 한데 그의 측근들이 한속봉을 구출하려고 소란을 피운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나? 아,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초왕은 한속봉을 각별히 아끼기로 유명하니까.”
초왕이 한속봉을 처형하겠다고 공표한 이유는 순전히 양반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실제 초왕의 마음은 한속봉을 살리고 싶을 터였다. 뒤로는 한속봉을 구출하려는 수작을 부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 한속봉을 구하려고 소란을 피운 무리의 배후가 초왕이라 이거지? 큭큭… 한낱 우민들의 왕 따위가 감히 양반을 기만해?”
꽈드득!
세 사람의 양반 중에서 가장 화려한 도포를 입은 사내가 유난히 흥분했다.
이까지 갈면서 분노하는 이자의 이름은 가람.
양반 중에서도 특히 선민의식이 강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가람은 조금이라도 양반을 욕보이는 자를 결단코 용서치 않았다. 양반 외의 인간 목숨은 모두 파리의 목숨처럼 하찮게 여겼다.
“괘씸한 초왕 녀석에게 피눈물을 흘리게끔 만들어줘야겠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는 가람에게 다른 두 명의 양반들이 주의를 주었다.
“네가 뭘 하든 관심 없다만, 이곳은 환국이 아니라는 것만 명심해라. 우민들 앞에서 양반의 체통을 잊지 말도록.”
“어련히 알아서 한다.”
콧방귀 뀐 가람이 곧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초왕은 없었다.
“저, 전하께서는 형장으로 향하셨사옵니다. 아시다시피 한속봉의 처형일인지라…”
‘뒤로는 한속봉을 빼돌리려는 수작을 부려놓고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형장에 가있다 이거지?’
알면 알수록 괘씸한 놈이다.
냉큼 형장으로 몸을 날리던 가람이 문득, 허공에 멈춰 섰다.
매보다 더 뛰어난 시력을 자랑하는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반파되어 있는 용암 감옥에 꽂힌다.
“한속봉 구출 계획에 실패하게끔 만들어서 절망을 안겨주는 편이 더 통쾌할 것 같은데? 큭큭큭!”
파앗!
화산재로 물든 잿빛 하늘에 떠올라있던 가람.
그가 가볍게 발을 한 발 내딛자 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
“템빨…? 템빨왕?”
템빨왕이라서 템빨로 흑마 강시를 잡았다고?
삼다수의 입장에서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템빨이라는 게 뭔지를 몰랐다. 하지만 왕이라는 단어만큼은 명확히 알아들었다.
그건 한속봉과 수애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 그리드 님 지금 본인을 왕이라고 하셨습니까?”
“아.”
한속봉의 질문에 그리드가 아차 싶었다.
한속봉 부녀에게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려준 적이 없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처음 동대륙에 왔을 때는 여러모로 주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그리드는 한속봉 부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나를 걱정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모습들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죽음을 앞두고 드러난 본성조차도 깨끗하단 말이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피식, 씁쓸하게 웃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는 왕이죠.”
“…..”
한속봉 부녀와 삼다수의 표정이 석상처럼 굳었다.
동대륙에서 스스로를 왕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네 명 뿐.
하지만 그리드는 그 네 명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그리드는 환국을 하늘로 섬기지 않는 야만족의 왕이라는 뜻이 된다.
“맙소사…”
우리의 대은인이 야만족의 왕이었다고?
안색이 하얗게 질린 한속봉이 혼란에 휩싸인다.
삼다수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힐난했다.
“한속봉 이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겉으로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뒤로는 야만족의 왕과 친분을 쌓고 있었느냐! 네놈은 반드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야만족 왕?’
한속봉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삼다수의 말을 듣는 순간 울컥 했다.
“야만족 왕이라고? 동대륙인에게는 서대륙인들이 야만족으로 보이는가 보지?”
“?!!”
“!!!”
한속봉 부녀와 삼다수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그리드가 본인을 마치 서대륙에서 온 사람인 양 말하고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치만 보고 있던 수애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리드 님은 서대륙에서 오신 건가요?”
“네.”
그리드가 거리낌 없이 대답하자 삼다수가 크하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본인이 야만족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별 같잖은 거짓말을 치는 구나! 적해를 건넜다고? 그딴 헛소리를 믿으라는…! 헙!”
고래고래 소리치던 삼다수가 화들짝 입을 닫았다. 그리드가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현실을 자각한 것이다.
상대는 흑마 강시조차 쓰러뜨린 괴물.
함부로 지껄여대다가는 목이 날아갈지 모를 일이었으니 사려야만 했다.
한속봉 부녀는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서대륙에서 오신 귀인이셨습니까.”
동대륙과 서대륙은 오랜 역사 동안 교류가 없었다. 두 대륙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적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 서술 된 내용에 따르면, 아주 가끔씩 서대륙인이 동대륙에 흘러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적해에서 조난당하였다가 우연히 말이다.
“그리드 님께서도 조난을 당하셨던 거군요…”
수애가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드가 갈 곳 잃은 외톨이로 보였던 까닭이다.
그녀에게 그리드가 웃어주었다.
“아뇨. 저는 제 의지로 이곳에 왔습니다. 다시 서대륙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고요.”
“…!!”
한속봉 부녀와 삼다수가 경악했다.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두 대륙은 교류가 없었건만, 그리드는 대륙 간 이동이 가능하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상식을 완전히 깨부수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삼다수는 부정했다.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할 리가…!”
만약 그리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서로가 개입 없이 존재해 왔던 두 대륙이 갑작스럽게 교류가 가능해질 경우 어떤 혼란이 야기될지 모를 일 아닌가!
‘헉!’
삼다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깨닫고 보니, 지금 자신은 이렇게 팔자 좋게 수다나 떨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한속봉을 형장으로 끌고 가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흑마 강시를 베어버린 이 괴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하지?
혼란에 빠진 삼다수가 안절부절 못하는 그때 그리드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왜 퀘스트가 클리어 되지 않는 거야?’
히든 퀘스트 <한속봉 부녀 구출>의 클리어 조건은 퀘스트 이름 그대로 한속봉 부녀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리드는 한속봉 부녀를 구출한 셈이나 다름이 없다. 한데 퀘스트가 종료되지 않았으니 영문 모를 일이었다.
‘아… 이 둘을 카라스 바깥까지 무사히 데리고 나가야하는 건가?’
생각한 그리드가 한속봉 부녀를 재촉했다.
“일단 이곳에서 도망치도록 하죠.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였다가는 두 분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리드는 한속봉 부녀가 당연히 흔쾌히 자신을 따르리라 보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한속봉이 그리드의 손길을 거부했다.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네?”
의외의 대답에 당황하는 그리드.
그에게 한속봉이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사형수가 된 이유는 환국의 양반들을 실망시켰기 때문입니다. 양반들께서 주작궁 제작자의 행방을 원하셨지만 저 또한 당신이 어디 계신지 몰라 양반들께서 원하시는 답을 못 드렸죠.”
“양반들이 저를 찾는다고요? 왜죠?”
“양반이 제작한 주작궁보다 더 뛰어난 주작궁을 제작한 당신께 흥미를 느낀 것일 테지요. 사실 저는 그걸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 기회에 그리드 님께서 양반들과 친분을 맺기를 바랐었지요.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양반들께서는 서대륙에서 온 당신을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겠군요.”
“…흠.”
그리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동대륙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양반들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더 기술이 뛰어난 서대륙인의 등장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자신들의 입지가 약해질까 걱정하며 경계할 공산이 컸다.
‘전에 판게아에서 마주쳤을 때 인상도 그리 좋지 않았고.’
납득한 그리드가 한속봉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대로 떠나도록 하죠.”
“저는 갈 수 없습니다.”
“네?”
“만약 제가 그리드 님과 이대로 도망친다면… 양반들께서는 그 죄를 우리 초국에 물을 것이며 초국이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를 일입니다. 하오니 저는 여기 남아 예정 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부디 부탁드립니다. 제 딸 수애만큼은 함께 데리고 가주십시오.”
“아니, 그게 무슨…”
그리드가 당황하는 순간이었다.
-어서 피해라.
오랫동안 잠잠했던 브라함의 영혼이 속삭여왔다.
평소와 똑같이 무심한 말투였지만, 말의 내용이 내용인지라 그런지 왠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도망치라니 무슨 말이야?’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녀석이 오고 있다.
‘뭐?’
-칫, 늦었나. 동화를 사용해라.
‘무슨…’
브라함이 갑자기 왜 이러지?
평소에는 없던 일인지라 그리드는 사태 파악이 늦고 말았다.
의아해하는 그의 귓가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흐음? 십검이 아닌데?”
“…!!”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음성.
깜짝 놀라 고개를 드는 그리드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진다.
하늘에 떠오른 채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음성의 주인, 청색의 도포를 나부끼고 있었던 까닭이다.
옷차림과 생김새는 물론이고 심지어 분위기까지도 파그마와 꼭 닮은 사내의 등장이었다.
“너는…!”
그리드는 하늘 위 사내를 판게아에서 만난 적 있다.
양반의 행렬에서 말이다.
‘양반…!’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그리드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고,
“흐음, 왠지 낯이 익은데?”
양반 가람 또한 그리드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 판게아에서 봤던 녀석이로군. 어딘지 모르게 약골의 냄새가 나서 눈 여겨 봤었지.”
가람이 말하는 약골의 냄새란 바로…
“파그마의 냄새. 큭큭, 그런가. 착각이 아니었나. 네놈이었구나? 주작궁을 재현한 대장장이가.”
[굴복당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파그마의 후예쯤 되는 건가?”
두근!
그리드의 심장이 고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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