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19화
‘강시들이 너무 강해.’
<용암 감옥 간수>들의 레벨은 무려 360이다. 그리드보다 29나 높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사실 레벨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드의 스탯빨과 템빨은 이미 진즉부터 레벨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으니까.
사냥하고 획득한 정보에 <혈강시>로 표기되고 있는 이 간수 놈들의 무서운 점은, 정신 계열 상태이상과 물리 계열 상태이상에 저항한다는 점과 높은 방어력, 그리고 체력에 있었다.
자아가 거의 없는 녀석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고 덤벼든다.
키에에에에엑-!
채챙! 챙!!
“큭…!”
벨리알을 레이드하고 <세상의 구원자>칭호를 획득한 이후 그리드의 최대 생명력은 8만 중반대를 넘어서고 있었다.
대부분의 스탯을 체력에 투자하는 탱커 플레이어조차도 압도하는 생명력 수치다.
한데 그 대단한 생명력 게이지가 위태위태하다. 현재 40프로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만큼 혈강시들이 강하다는 뜻!
채앵-!
“….!”
어둠 속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하는 <+9실패작>이 혈강시 3마리가 동시에 휘두른 발차기와 충돌하는 순간 허공에 떠오른다. 그리드가 손에서 검을 놓친 것이다. 체력보다 근력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그리드조차도 3마리의 혈강시와는 힘 싸움이 불가능했다.
‘칫!’
그리드가 혀를 찼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Satisfy는 높은 현실성과 자유도를 구현하고 있지만 결국 게임이다. 무기를 손에서 놓치는 건 단순 이팩트에 불과하다.
1~3초 동안 <착용 중인 무기 효과를 적용 받지 못한다.>라는 내용의 물리적 상태이상으로 봄이 옳다.
쿠왕-!
일시적으로 실패작을 놓치고 맨손이 된 그리드에게 맹공을 퍼붓는 3마리의 혈강시.
쇠사슬에 묶인 양손을 동시에 휘두르는 그 공격 모션, 코코넛을 일수에 깨부수는 고릴라의 양손 후려치기를 연상시킨다. 파공성부터가 장난 아니다. 귀가 찢어질 듯하다.
“그리드 님!!”
수애가 사색이 되었다.
감옥에서 구출되고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몰려온 간수들에게 고립된 그리드는 누가 봐도 위기였다.
찰나, 수애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를… 나를 구하려다가 그리드 님께서 목숨을 잃게 생겼어!’
내가 뭐라고?
당신에게 내가 뭐라고 이 위험한 곳까지 달려와 스스로를 희생하는가?
으득!
수애는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 때문에 그리드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구해!’
여성이기에 앞서서 무사인 수애.
그리드의 위기를 간과할 수 없었던 그녀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소진 된 체력을 무시하고 행동에 나섰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다리를, 이를 악 물고 움직여서 혈강시들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혈강시들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그리드는 자력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네 개의 갓 핸드로 혈강시 한 마리의 사지를 구속하고, 두 마리의 템빨골을 소환해서 다른 두 마리 혈강시의 공격을 대신 맞게 했다.
그리고 어느새 손에 쥔 묵색의 장검으로 반격에 나섰다.
그렇다.
그리드는 실패작을 손에서 놓친 직후 새로운 무기로 스왑한 것이다.
갓 핸드를 활용한 그리드의 아이템 스왑 속도는 이제 상식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드는 묠니르의 경직 효과가 혈강시에게 적용되지 않자 갓 핸드들에게 각자 검을 쥐어놓았고, 실패작을 놓친 순간 그중 한 자루 검을 곧바로 자신에게 전달시켰다.
그 검이란 <+7검은 귀신>.
단순 공격력은 +9실패작과 비할 바 없이 낮지만 그건 단타의 경우다. 검은 귀신은 같은 대상에게 공격을 누적시킬 때마다 공격력이 [email protected]되는 옵션을 지녔다.
그뿐이랴?
끼릭-
한 마리 혈강시의 가슴을 베고 회수 된 검은 귀신이 소도와 장도 두 자루로 분리된다.
무기가 분리되다니?
만약 혈강시에게 강한 자아가 있었다면 기겁을 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래, 검은 귀신의 최대 강점은 바로 이 변칙성에 있다.
평소에는 장검으로 사용하지만 소도와 장도로 분리가 가능했기 때문에 활용도가 무척 높았고 적의 허를 찌르기에 용이했다.
츠카카카카칵-!!
분리 된 검은 귀신이 혈강시의 좌우 허리를 동시에 베어버렸고,
[<+7검은 귀신>으로 같은 대상에게 3회의 공격을 누적시켰습니다!]
[<+7검은 귀신>의 공격력이 20퍼센트 상승합니다!]
그리드라는 이름의 야수가 본성을 드러냈다.
서걱!
푸욱-!! 푸푹!!
그리드는 한 번 문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검은 귀신으로 계속 한 놈만 팼다.
무수한 전투 경험을 토대로 쌓아올린 현명한 전투 방법이다.
결과.
[<+7검은 귀신>으로 같은 대상에게 11회의 공격을 누적시켰습니다!]
[<+7검은 귀신>의 공격력이 100퍼센트 상승합니다!]
검은 귀신의 잠재력이 최대까지 끌어올려졌다.
공격력이 배로 뻥튀기 된 검은 귀신은 실패작보다 더 강력했다. 여태껏 검에 베여도 멀쩡하던 혈강시의 강철 같은 피부로부터 썩은 피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파그마의 검무, 살(殺)!”
퍼어어어어어엉-!!
아들 로드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
스킬의 전개 속도를 15퍼센트 상승시켜주는 <기민함의 목걸이>덕분에 그리드의 검무 전개 속도는 전보다 훨씬 더 빨라져 있었다. 검무의 태생적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순간이랄까.
크어어어어어---
정신없이 베이다가 미사일처럼 쏘아지는 찌르기에 가슴을 꿰뚫린 혈강시. 결국 잿빛으로 산화해버린다.
[<용암 감옥 간수>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185,001,400을 획득하였습니다.]
[63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준단 말이지.’
그리드는 재미있게도 던전으로 분류되는 이곳 용암 감옥의 최초 발견자다. 혜택으로 일주일 동안 경험치 획득량이 대폭 상승한 상태였고 혈강시로부터 얻는 경험치는 무려 억 단위였다.
‘이렇다 할 아이템을 안 떨구는 게 단점이지만 철갑귀보다 경험치를 3분의 1정도 더 주는 셈이니까 엄청난 거지.’
만약 사냥 속도를 높일 수만 있다면 최고의 사냥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던전 최초 발견자 혜택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긴 했지만.
‘한속봉 부녀를 구출해서 도망치면 결국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찾아 올 일이 없을 텐데… 일주일이나 되는 최초 발견자 혜택을 날리는 셈이나 다름없군.’
하지만 그리드는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Satisfy에는 널린 게 사냥터였다. 일개 사냥터 따위보다야 한속봉 부녀의 목숨과 퀘스트 보상이 훨씬 더 중요했다.
키야아아아!!
쿠웩!!
갓 핸드에게 발이 묶여있던 다른 혈강시 두 마리를 마저 해치운 직후.
[한속봉의 처형까지 15분 남았습니다!]
그리드는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알림창과 대면하게 됐다.
“벌써 시간이… 1층과 2층을 다 돌아봤지만 한속봉 님은 도통 보이질 않는군요. 몇 층에 갇혀 계시는지 혹시 아십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곳 용암 감옥은 총 4층 구조로 설계되었다고 들었어요.”
‘이대로 3, 4층까지 차례대로 올라가면 되겠군.’
단순해졌다.
초조함을 버린 그리드가 울퉁불퉁한 나선형 계단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르는 수애의 얼굴에 근심이 한 가득이다.
“괜찮으시겠어요?”
아버지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야 수애도 굴뚝같다.
아니, 반드시 그리드가 아버지를 구해줬으면 하는 것이 수애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조금 전 2층에서 출몰한 혈강시 3마리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그리드는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호흡이 거칠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으며, 얼굴에 쓰고 있는 기괴한 가면도 피로 흠뻑 젖어 붉게 물들었을 정도다.
3층, 4층에 더 많이 있을 혈강시 무리를 지금의 그리드가 과연 어떻게 돌파할지 수애는 걱정이었다.
애초에 아버지의 처형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그리드가 수애의 마음 속 최강의 사내라고는 하나, 시간 내에 3층과 4층의 혈강시 무리를 돌파할 가능성은 무척 희박해 보였다.
그녀보다 한발 앞서 3층에 도달한 그리드가 씨익 웃어주었다.
“나만 믿어요. 아이템 변신.”
<아이템 변신>
전설의 광물 <파브라늄>을 소유하고 있을 경우 발동시킬 수 있는 기술입니다.
<파브라늄>의 형태와 성능을 특정 아이템으로 변신시킵니다.
*제작법을 습득하고 있는 아이템으로만 변신시킬 수 있습니다.
*변신 지속 시간은 3분입니다. 변신 해제 후 파브라늄은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갑니다.
스킬 마나 소모:없음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6시간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척 길다. <파그마의 후예>의 필살기라고 봄이 옳다.
하지만 그리드는 대량의 파브라늄으로 네 개의 갓 핸드를 만든 바, 갓 핸드 개별로 아이템 변신이 가능했고 각 갓 핸드들은 아이템 변신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하지 않았다.
파앗-!
갓 핸드 하나가 휘황찬란한 금빛을 토해내면서 그리드의 눈앞에 떠올랐고,
“리파엘의 창.”
그리드가 이사벨을 위해서 재구성하였던 <강화 버전>의 리파엘의 창이 갓 핸드를 통해서 재현됐다.
고오오오오--
고고한 금빛의 창.
아름다운 외관에 어울리지 않게 주변의 대기를 찢어발길 듯한 날카로운 예기를 발산하는 녀석이 덥썩, 그리드의 손에 쥐어진다.
‘아티팩트의 모습이 변하다니…?’
상식적이지 않은 그리드의 템빨을 바로 곁에서 목도하고 화들짝 놀라는 수애.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준 그리드가 자신을 발견하고 쇄도해오는 4마리의 혈강시에게 돌진, 그대로 리파엘의 창을 휘둘렀다.
[빛의 차륜격 스킬이 전개됩니다.]
[차륜격의 경로 상에 매직 미사일(강화)가 대량으로 방출됩니다.]
[빛의 보호막 스킬이 전개됩니다.]
[보호막을 가격하는 대상에게 매직 미사일(강화)가 방출되어 반격을 가합니다.]
쿠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
경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전투력.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고 있는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신화급 무기의 위용이 강력한 혈강시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화하는 혈강시들과,
쿠르르르르르르-
리파엘의 창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일부가 붕괴되어 버리는 감옥.
지면이 갈라지자 휘청, 쓰러지려하는 수애의 허리를 그리드가 감싸 안았다.
“아읏…! 핫!”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던 수애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얀 얼굴이 살구 빛으로 물든 상태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이전의 수애였다면, 그리드의 손길에 온전히 몸을 맡기면서 그리드에게 짓궂은 농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수애는 달랐다.
화끈!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그리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귀까지 빨갛게 붉힌다.
그 모습에 그리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귀여운 면이 있었어?’
여태까지 그리드가 수애의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앞에서도 현자 모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성격이 그리드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던 까닭이다. 수애는 너무 짓궂고 밝혔기 때문에 비교적 순수한(?) 그리드에게 이성으로써의 환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한데 이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다른 면모를 보이자 그리드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험험.”
“….”
헛기침을 하면서 수애를 안전한 곳에 내려놓는 그리드와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는 수애.
아주 찰나 동안 이어지는 침묵을 깬 사람은 둘 중 누구도 아니었다.
복도 저편에서 새롭게 덤벼오는 네 마리의 혈강시였다.
‘서둘러야 돼.’
리파엘의 창의 변신 유지 시간이 이제 1분도 채 안 남았다. 변신 유지 시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지 뽕을 뽑아야한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혈강시들에게 재차 돌진하기 전, 수애에게 <+7이상적인 단검>을 건네주었다. 이상적인 단검은 사용 제한이 낮았기 때문에 수애도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조를 부탁드립니다.”
“엣…? 네…! 넷! 알았어요!!”
무사라면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무기를 타인에게 맡기다니?
‘이건 나를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그래, 나를 마치 자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뜻일 수도…
어버버, 어울리지 않게 동요하며 눈을 핑글핑글 돌린 수애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앞서 가는 그리드를 이상적인 단검에 귀속 된 스킬 <칼바람>으로 보조하기 시작했다.
‘오.’
수애의 스킬 전개 타이밍과 적중률이 그리드를 감탄 시킨다. 그리드의 전투가 훨씬 더 수월해졌다.
초국 최고의 여무사와 템빨왕 그리드의 호흡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한 법이다.
[한속봉의 처형까지 5분 남았습니다!]
[한속봉의 처형까지 4분 남았습니다!]
혈강시 무리를 해치운 그리드가 3층의 모든 감옥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한속봉은 보이질 않았다.
‘그럼 4층…!’
이제 남은 것은 용암 감옥의 최상층 뿐.
그리드와 수애가 황급히 4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보았다.
“수, 수애야…? 그리고 그리드 님…?”
사지를 구속당한 채 죄인처럼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한속봉의 모습을.
“아버님!!”
흥분한 수애가 앞뒤 보지 않고 몸을 날리는 순간.
[용암 감옥의 간수장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녀를 좌절시킬만한 존재가 등장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쒸불… 하여튼 쉽게 풀리는 일이 없어.’
그리드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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