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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73화 (468/1,794)

템빨 30권 - 16화

“그래, 템빨왕의 반응은 어떠하던가?”

사하란 제국, 검공 리미트의 성.

쿠콰콰콰쾅-!

리미트가 허공에 전개한 네 자루의 검이 연병장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기어검의 경지다.

리미트가 자부하기로, 검호였던 피아로는 물론이고 검성 뮐러의 무력마저도 초월한 경지였다. 다만 업적이 부족해서 검성, 혹은 전설을 자처하지 못할 뿐이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공손히 무릎 꿇은 채 그의 질문을 받든 메르세데스가 대답했다.

“숙였사옵니다.”

“허어… 숙였다?”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 리미트가 검기를 거두었다. 어딘지 공허한 그의 시선이 고개 숙이고 있는 메르세데스에게 향했다.

“홀로 10만에 대적하는 무력으로 국가를 찬탈한 희대의 풍운아가 제국의 무리한 요구를 군소리 없이 수용하였다고? 날뛰지 않고?”

“네, 아주 순순히 따르더군요. 표면적으로는요.”

“속내는 다르다?”

“그렇습니다. 그는 길들일 수 없는 야수와도 같은 사내였습니다. 황명을 받들고 무릎을 꿇으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 부끄러움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아스모펠의 눈인가.”

<아스모펠의 눈>은 제국 기사들 사이에 널리 쓰이는 말이다. 당장의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도모하는 열정, 열망이 담긴 눈빛을 뜻한다. 영원한 2인자 아스모펠이 피아로를 바라볼 때의 눈빛 말이다.

“흐음, 그거 좋군. 그래, 그래야 템빨왕이지.”

검공 리미트는 사하란 제국의 6공작 중 하나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그는 제국 최고의 충신인 것이다.

한데 감히 황명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드의 반응을 듣고 분노하기는커녕 흡족해 한다?

만약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담담했다.

당대의 적기사단, 황제 쥬앙데르크가 아닌 황비 마리가 재구축한 집단이 아니던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황제 직할의 기사단이었으나 실제는 다르다. 황비 마리의 수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적기사단 단장 리미트는 황제보다 황비의 뜻으로 움직였다.

사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적기사단에 황비의 마수가 온전히 뻗치기 전까지만 해도 리미트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하지만 그를 황제가 배신했다.

다섯 기둥.

황제 쥬앙데르크는 그들이야말로 제국을 지탱할 인재들이라고 칭하며 적기사단보다 그들을 더 총애하였다. 적기사단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는 리미트가 황제에게 완전히 돌아선 계기가 됐다.

“메르세데스, 황제폐하께 템빨왕에 대한 그대의 감상을 고스란히 전하도록 하게나. 분노한 폐하께서 템빨국에 병력을 파견하시도록 유도하는 게야. 그 틈에 마리 황비께서 파벌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터이니.”

“알겠습니다.”

공손히 답한 메르세데스가 리미트 공작성을 떠났다.

백마를 몰아 황궁으로 향하면서 그녀는 고뇌했다.

‘제국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

황제폐하를 기만함이 과연 옳은 것일까?

황태자 책봉을 앞두고 심화되어가는 파벌간의 알력 다툼.

이는 제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며 메르세데스는 염려하였다.

그런 그녀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하, 나의 여신님.’

메르세데스의 종자, 스카이.

비공식 랭커인 그는 Satisfy가 오픈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제국에서 기사수련을 해왔고 급기야 흑기사단에 입단, 최근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적기사단 예비대에 편입된 인물이다.

무려 첫 번째 기사의 종자가 되었을 정도이니 그 실력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영원히 여신님의 곁에 있겠습니다.’

싱글벙글.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아름다운 여인 메르세데스.

그녀에 대한 스카이의 사랑은 무척 깊었다. 레베카교단의 데미안이 이사벨을 사랑하는 마음과 맞먹을 정도로.

단, 순수하지는 않다.

‘나의 여신 메르세데스, 당신을 반드시 나의 노예로 만들어주겠어.’

***

“안녕하십니까, 그리드 님?”

“음?”

이곳은 동대륙.

아직 플레이어의 진입률이 낮았기 때문에 인구의 99.9퍼센트 이상이 NPC다.

서대륙과 달리 그리드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데 한 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인사하며 다가온 사내에게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했다.

‘뮤토.’

플레이어다.

“…동대륙에 넘어와 있는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겠군?”

그리드가 경계하였다.

뮤토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서슴없이 다가왔다. 심지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말이다!

‘후덕한 것이 너무 착해 보여. 대개 이런 놈들 중에 나쁜 놈이 많지.’

물론 편견이다.

하지만 정황상 경계하는 것이 옳았다.

낯선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생면부지 남을 온전히 환영하기에는 Satisfy라는 세계가 녹록치 않았다.

특히 그리드는 뮤토가 대동하고 있는 8명의 사내가 신경 쓰였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눈>

대상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3초 이상 주시할 경우 아이템 정보를 엿볼 수 있는 스킬.

시야를 방해하여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이 스킬을 토대로 유추해 보건데, 뮤토가 대동한 8명의 사내들은 전원 최소 280레벨 이상이었다.

‘저만한 무리를 부하로 거느릴 정도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

점점 더 경계심을 높이는 그리드에게 뮤토가 넉살 좋게 설명했다.

“말씀하시는 실력이라는 것이 무력으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면, 제가 동대륙으로 넘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실력 덕분이 맞지요. 저는 상인입니다. 제 이름을 딴 뮤토 상단을 운영하고 있지요.”

“수완가라 이건가.”

경계심을 지우지 않고 비꼬는 그리드였다.

뮤토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드 님과 달리 통합 랭킹에 들 정도의 레벨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상인 랭킹에서 확인해 보시면 저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

즉각 랭킹을 확인해 본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뮤토가 무려 랭킹 3위의 상인이었던 까닭이다.

‘상단을 운영한다는 게 허풍은 아니군. 그러고 보니까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시장이 커져야한다고 라우엘이 누누이 말했었는데.’

라우엘은 상인의 대규모 유입을 유도해야 한다고 설파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인 플레이어들이 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까닭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 특히 템빨국은 인구가 적다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상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템빨국은 가치가 적은 나라였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상인과는 되도록 친분을 쌓는 편이 좋겠지.’

판단한 그리드가 우선 표정을 풀었다. 경계심을 완전히 지운 것은 아니지만 뮤토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그리드다.”

“오오! 세계 제일로 명망 높으신 템빨왕 그리드 님과 악수를 하는 날이 오다니 영광입니다!”

과연 상인답게 말재주가 있다.

기분 좋아진 그리드가 뮤토에게 질문했다.

“저 남자들은 뭐지?”

“동대륙에 도착해서 고용한 용병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이 워낙 강한 까닭에 서대륙에서 데려온 용병들은 쓸모가 없더라고요. 현재 저는 카라스로 이동하는 중인데 그리드 님도 마찬가지신가요?”

“맞다. 카라스에는 무슨 용건이지?”

“초왕을 알현하고 초국과 상업적 교류를 맺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초왕….”

그리드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한속봉 부녀를 구출해야 하는 그리드의 입장에서 초왕은 적이 될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리드의 표정을 읽고 대강 사정을 눈치 챈 뮤토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초왕과 사이가 나쁘신가보군요. 의외네요. 저는 그리드 님께서 초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서 카라스를 찾으시는 줄 알았는데.”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기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게 돼서 말이야.”

어쩌면 초왕을 해쳐야할 수도 있다는 말은 삼킨다.

아직 뮤토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적을 순순히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뮤토도 눈치껏 물러났다. 대화의 주제를 이단과 얀페이에게 돌렸다.

“이분들은 누구시죠? 특이한 동료 분들이네요.”

이 험난한 동대륙을 횡단하면서 대동한 동료라는 것이 전사가 아니라 비쩍 마른 중년인과 어린 소녀라고?

오직 그리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하며 흥미를 보이는 뮤토에게 그리드가 대충 설명했다.

“전속 셰프하고 티마스터야.”

“헐.”

모험에 전속 셰프와 티마스터를 대동하는 플레이어가 세상에 과연 몇 이나 존재할까?

미식을 즐기는 부자들은 셰프쯤 고용해서 다닐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차 끓이는 사람까지 따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그리드가 유일할 것이었다.

‘괜히 왕이 아니시구나. 정말이지 스케일이 다르다.’

템빨국이 가난한 것은 유명한 사실.

하지만 템빨국이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드까지 가난할 리 없다. 그리드는 상당한 재력가라는 소문이고, 실제로 부자이기 때문에 국가 건설비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친해져야 돼.’

상인 입장에서는 부자와 교류해서 나쁠 게 없다. 하물며 일국의 왕이라면 더더욱!

그리드를 바라보는 뮤토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하는 그때.

“한 술 뜨시겠소?”

요리사 이단이 뮤토에게 접시를 건넸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스프가 담긴 접시였다.

“받아도 되는 겁니까?”

“마침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참이라. 식재가 남았수.”

“감사히 먹겠습니다!”

공짜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단의 호의에 감격한 뮤토가 기꺼이 스프를 받아 한 술 떴다. 순간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냄새가 거슬리긴 했으나 마침 스테미나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스프를 입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지옥을 맛봤다.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었습니다.]

[중독(大)에 걸립니다.]

[생명력이 초당 1,840씩 소모되고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컥…!”

뮤토는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무려 大등급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 최상급 해독제까지 복용해야했다. 밥 한 끼 공짜로 얻어먹으려다가 비싼 해독제 값을 날린 셈이다.

“이, 이게 무슨…!”

설마 지금 나를 암살하려고 하신 건가?

그리드를 바라보는 뮤토의 두 눈에 경계심이 서렸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에잉, 자네 또한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사람이었구만. 내가 만든 최고의 요리를 토해 내다니, 쯧쯧.”

“….”

아, 이런 캐릭터였구나.

뒤늦게 깨달은 뮤토가 그리드에게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이런 잠재적 살인마를 전속 요리사로 고용하시다니… 그리드 님의 미각은 맛탱이가 간 것이 분명하다.’

미식의 즐거움을 평생 모르고 살아갈 테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뮤토는 그리드를 동정하였고 그리드는 왠지 기분이 나빴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에게 뮤토가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초왕을 만나는 목적은 다를지라도 가는 방향은 같으니 말동무가 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그리드 님과 함께할 수 있다면 든든해서 기쁘기도 하고.”

“좋다. 단 파티는 안 맺어. 경험치 나눠 먹기 싫으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이템 분배를 파티장 습득으로 해도 된다면 파티를 맺어줄 의향이 있긴 하다. 네 호위들 꽤 쓸만 해 보이고 말이야.”

“…아니요,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내 호의를 거절하겠다고?”

“…..”

“물론 아이템 분배는 내가 알아서 공평하게 해줄 거야.”

“…알겠습니다. 일국의 왕께서 일개 상인의 등을 처먹으시진 않을 테니까…”

“….”

이후 두 사람은 카라스에 도착하기까지 5일 동안 동행했다. 그 과정에서 실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리드는 상인 랭커와 친분을 쌓기 위해서 나름 노력했고, 뮤토는 그리드의 말과 사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며 템빨국의 비전을 엿보았다.

결과.

“혹시 템빨국에서 뮤토 상단을 받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리드에게 복덩어리가 굴러 들어왔다.

또한 그리드는 뮤토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 됐다.

첫째, 스크롤을 사용하지 않아도 대륙 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

둘째, 제국의 경제력은 예상을 가뿐히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

셋째, ‘상태이상 저항’패시브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 이단의 요리를 지속적으로 섭취할 경우 독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는 것 등등.

서로에게 유익한 동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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