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14화
<한속봉 부녀 구출>
★히든 퀘스트★
초국에 충성해온 한속봉 일가가 역적이라는 오명을 썼습니다.
당신의 행방을 밝히라는 초왕의 명령을 거부한 까닭입니다.
나라에 대한 충성보다 당신과의 의리를 선택하고 목숨마저 버릴 각오를 다진 한속봉 부녀를 구출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초왕을 만난다. 혹은 무력으로 한속봉 부녀를 구출한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알 수 없음.
퀘스트 실패 시:한속봉 부녀의 사망.
히든 퀘스트는 이름 그대로 숨겨진 퀘스트다. 절대로 쉽게 얻을 수 없다. 히든 퀘스트를 얻기 위해서는 일반 퀘스트보다 더 다양한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화이트와의 인연을 토대로 아이템 제작 대회에 참가하고, 대회에서 주작궁 재현에 성공하고, 성 던전에 입장해서 아루베를 처단하고, 판게아를 위기로부터 구해냄과 동시에 수애를 지켜냄으로써 한속봉 부녀와 호감도를 높이는 등.
그리드의 선택과 행동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히든 퀘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든 퀘스트는 대체적으로 보상이 높지.’
히든 퀘스트를 얻었음은 기뻐해도 좋을 일이다. 아니, 마땅히 기뻐서 팔짝 뛰어야 할 만큼의 행운이다.
하지만 그리드의 마음은 무거웠다.
자신이 한속봉과 수애를 위험에 빠뜨린 셈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죄책감을 느꼈다.
‘못 구하면 죽는다니.’
타인의 생명이 달린 퀘스트다. 부담감이 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수애 그 변태녀는… 어?’
잠시 상념에 빠졌던 그리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당황했다. 자신이 얀페이를 품에 안고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그, 그리드 님…”
그리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얀페이는 마치 다람쥐 같았다. 작고, 부드럽고, 귀엽다.
얼굴을 붉힌 채 애타는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를 황급히 품에서 떼어낸 그리드가 진정하고자 노력했다.
‘이럴 수가.’
내가 언제부터 이성과 이토록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가능해졌지?
‘대, 대단해…’
설마, 여태까지 숨겨져 있던 카사노바의 자질이 개화된 게 아닐까?
‘이 기세를 유지하면 현실에서도 모태 솔로 탈출이 가능해질 수도…?’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던 그리드가 아차 싶었다.
‘내가 지금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시가 급하다.
공교롭게도, 그리드에게는 동대륙에 오래 머물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한속봉 부녀를 구출하고 그들을 아군으로 만들자.’
결정한 그리드가 얀페이와 함께 이단의 식당으로 향했다.
***
“뭐? 전속 요리사가 되어 달라고?”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손님 하나 없는 식당.
파리채를 휘두르느라 여념이 없던 이단이 귀를 의심했다.
불쑥 사라졌다가 또 갑자기 나타난 그리드가 다짜고짜 자신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자네는 가보인 프라이팬을 찾아준 은인이며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몇 안 되는 미식가 중 하나이기도 하지. 나는 필시 자네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다네. 하지만 나는 자네의 전속 요리사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어.”
“왜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자네의 진짜 정체를 모른다네. 자네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찌 전속 요리사가 되겠는가? 뭘 믿고?”
“제 정체를 밝히면 전속 요리사가 되어줄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뿐만이 아니야. 내게는 요리사로서의 긍지와 목표가 있다네. 내가 굳이 식당을 운영하는 이유는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내 요리를 맛보여주고 싶어서야. 나는 매일 수백, 수천 명의 손님들이 내 요리를 먹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네. 미안하지만 자네 한 명만을 위해서 요리할 수는 없어.”
“수백, 수천 명은커녕 하루에 손님 2명도 안 오잖아요? 심지어 그 2명도 여행객이고 대부분 환불을 요청…”
얀페이가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태클을 걸었지만 이단은 애써 무시했다.
“험험, 뭐, 어찌됐든 그렇게 된 걸세. 나는 자네의 요리사가 될 수 없어.”
이단이 재차 거절하는 순간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전속 요리사가 아니라 내 왕국의 요리장이 되는 것은 어떻소?”
그리드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응?”
왕국의 요리장이 되어 달라고?
그것도 ‘내 왕국’의?
“뭐라는…. 어? 어라?”
어리둥절하던 이단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경악했다. 곁에 무표정하게 서 있던 얀페이도 깜짝 놀랐다.
그리드가 은빛의 왕관을 꺼내 쓴 까닭이다.
“자, 자네…?”
그리드의 분위기가 변했다.
눈빛, 표정, 말투뿐만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위화감을 느끼고 주춤거리는 이단과 얀페이.
그리드가 두 사람을 진정으로 마주한다.
“짐은 서대륙 일각의 지배자, 템빨왕 그리드다. 동대륙 최고의 요리사 이단이여, 짐은 나의 수만 병사들에게 그대가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다. 짐의 바람에 부흥해 주겠는가?”
“기꺼이!!”
그리드가 이단을 ‘동대륙 최고의 요리사’라고 지칭한 순간부터 이단의 선택은 정해진 것이었다.
잔뜩 흥분한 이단은 앞뒤 생각 않고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 봤자 프라이팬과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지만.
“당장 서대륙으로 넘어갑시다!”
준비를 끝내자마자 소리치는 이단.
드디어 내 요리 솜씨가 인정을 받는 날이 왔구나, 해석하며 들뜬 그와 달리 얀페이는 조용했다.
그녀는 자신이 연모하였던 사내가 알고 보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단 사실을 알게 되자 슬펐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계신 분이었어.’
애초에 맺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영영 이별이다.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뜨린 얀페이가 이를 악 물었다. 눈치 없이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때였다.
“고개를 들라.”
그리드의 커다란 손이 얀페이의 작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 손길에 부르르, 경련하며 고개를 든 얀페이는 그리드의 상냥한 미소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짐은 얀페이 그대 또한 곁에 두고 싶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들이 있다지? 그들의 터전 또한 제공해줄 터이니 그대 또한 짐의 왕국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나?”
“하, 하윽. 기뻐요…”
일정 확률로 스탯을 상승시켜주는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 이단.
뛰어난 일처리 능력과 강한 책임감, 더불어서 호구를 감지하는 능력까지 탁월한 얀페이.
훗날, 템빨국 병사들에게 식중독을 맛보여줄… 아니, 템빨국 병사들의 굶주린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포이즌 마스터 요리장 이단’과 뒤통수 후려치기의 달인… 아니, 내조의 달인 ‘악마 시녀장 얀페이’가 지금 이 자리에 탄생했다.
***
야쿠모의 미궁.
파티 상태로는 입장이 불가능한 이 인스턴트 던전의 난이도는 극악이다. 입장할 때마다 미궁의 구조가 바뀌었고 등장하는 보스의 패턴도 달라졌다.
3차 전직자 기준으로 미궁 돌파 성공률은 11.6퍼센트. 10명이 도전하면 그중 9명에 가까운 사람이 고배를 마신다는 뜻이다.
한데.
[<야쿠모의 미궁>돌파에 성공하였습니다!]
[당신이 미궁 돌파에 소요한 시간은 39시간 32분 27초입니다!]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야쿠모의 반지(6)>을 획득하였습니다!]
“4번 반지가 안 나오는군.”
검성 크라우젤.
아직 300레벨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그가 야쿠모의 미궁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야쿠모의 반지>를 벌써 5개째 획득했다는 점이다.
신기록을 세울 때마다 획득 가능한 야쿠모의 반지. 종류는 총 8개로 알려져 있고 종류마다 옵션이 다르다.
‘정보에 따르면 내게 가장 필요한 옵션은 4번 반지에 귀속되어 있다. 다시 도전해야겠군.’
“크라우젤 님.”
재차 미궁에 입장하려는 크라우젤을 누군가 불러 세웠다.
하오였다.
크라우젤이 쓴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내 마음은 정해졌어. 당신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는 결국 미국으로 귀화할 거다.”
미국 정부는 어머니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단순히 돈과 명예만을 논했던 타국 정부들과는 다르게 다가왔고 그러한 태도가 크라우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이나 중국으로 귀화해 달라는 당신의 바람에는 응할 수 없어.”
자신의 의사를 확고하게 피력하는 크라우젤에게 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더 이상 떼쓰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합니다. 이 말을 하려고 찾아온 겁니다.”
“…?”
크라우젤은 하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쉽게 뜻을 굽힐 성격의 사내가 아니었다.
한데 하루아침에 태도가 바뀌다니?
의아해하는 크라우젤에게 하오가 설명해주었다.
“한국에서 그리드 님을 만나 뵙고 왔거든요.”
“그리드를?”
“예, 당신의 미국 귀화를 막아달라고 요청했지요. 그랬더니 거절하시더군요. 당신 본인이 행복한 길을 찾아서 내렸을 선택을 타인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면서 말이죠.”
“…..”
“솔직히 저는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있는 중국, 그리고 당신의 조국인 한국으로 귀화하는 편이 당신에게 더 큰 행복을 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런 저를 그리드 님께서 중국 음식점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중국 음식점?”
“네, 웃기지 않습니까? 기껏 한국까지 찾아간 중국인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지 않고 중국 음식을 대접하다니, 저는 솔직히 불쾌했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짬뽕이라는 음식을 먹는 순간 깨달았지요.”
당시를 회상하는 하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떠올랐다.
“타국에서 재해석된 중국 요리만의 매력… 그건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짜장면이랑 짬뽕이라는 음식들, 한국에서 행복하겠구나. 하고.”
“…??”
“그래요, 음식처럼 사람도 국적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편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겠죠.”
“…..”
“크라우젤 님, 이제 저는 당신의 선택을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음식을 예시로 제게 큰 깨달음을 안겨주신 그리드 님의 덕분이죠.”
“…..”
그리드가 하오에게 짜장면과 짬뽕을 대접한 이유가 정말 그런 깊은 뜻에서였을까?
그리드의 성격을 이제 대부분 파악한 크라우젤은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크라우젤이 미국행을 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그리드에게 있음을.
‘그리드, 나는 너와 다시 겨룰 날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
현재까지의 전적은 1 대 1.
남자는 삼세판 아니겠는가.
***
초국 왕도, 카라스.
대역 죄인들을 가둬놓은 <용암 감옥>이 오늘따라 분주하다.
초왕께서 방문하신다고 하셨기에 간수들이 고생이었다.
“어째서 이런 고약한 감옥에 국왕전하께서 친히 방문하신다는 거지?”
“아무래도 한속봉 부녀 때문이 아닐까? 국왕전하께서 한속봉을 총애하였던 일화들은 유명하잖은가.”
수백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곳 용암 감옥의 곳곳에는 뜨거운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발 한 번 잘못 디뎠다가는 몸이 녹아 버릴 수도 있는 이곳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간수들은 잠시 후 찾아올 초왕에 대한 예의로써 최대한 깨끗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고문실 근처의 마른 피를 박박 닦아내고, 용암이 토해내는 열기를 조금이라도 바깥으로 배출하고자 쉬지 않고 부채질을 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잠시 후.
“국왕전하 납시오!!”
폭발한 화산이 그대로 감옥이 된 케이스.
자연이 만든 거대한 감옥 곳곳에 초왕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 메아리쳤다.
뜨거운 열기를 헤치고 나아간 초왕이 곧바로 한속봉에게 다가갔다.
“속봉, 판덕공의 행방을 알려줄 생각은 여전히 없는 겐가?”
“신은… 전하께 알려드릴 수 없사옵니다… 신은 그자의 행방을 모르옵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의리를 택하는가… 그렇기에 더욱더 서운하구나, 속봉. 그대와 짐의 사이에도 필시 의리가 있었을 터인데. 우리는 신하와 임금이기에 앞서서 어린 시절 친구가 아니었던가.”
“그게 아니라 전하, 신은 그자의 행방을 진짜로 모르옵니다…”
“그래, 속봉.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 하지만 솔직히 너무하다고 생각하네. 짐이 그자를 찾는 이유는 순전히 초국의 미래를 위해서이건만, 위기에 빠진 조국보다도 의리를 택하다니. 그대의 숭고한 마음이 이제는 냉혈하게 느껴질 지경이야.”
“아니, 전하. 신은 그자의 행방을 모르옵…”
“더 이상 긴 말 하지 않아도 좋네. 짐이 포기하겠네. 짐은 자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까. 후우… 그게 자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테지. 우리 함께 초국의 멸망을 넋 놓고 지켜보기나 합세.”
“…모른다니까.”
한속봉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최초에는 그리드의 안전을 염려하여 그의 행방을 밝히지 않은 한속봉이었으나, 지금은 초왕이 그리드를 찾는 이유를 알고 있다. 한속봉 본인부터가 초왕에게 그리드의 행방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대답하려고 보니 자신은 그리드의 행방을 모르는 게 아닌가?
모르는 걸 어떻게 알려주느냔 말이다.
‘하늘은 나와 초국을 버린 것인가. 정녕 울고 싶구나.’
마음속 깊이 한탄한 한속봉이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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