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68화 (463/1,794)

템빨 30권 - 12화

‘이 여자 뭐지?’

사신에게는 국가의 뜻을 영리하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가 실리를 챙길 수 있게끔 결과를 유도하는 중책을 맡은 만큼 능력이 무척 중요했다.

그래, 사신이 네임드 NPC인 대목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외교 쪽에 특화 된 인물이라면 네임드급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본래 제국은 인재가 많기로 유명하기도 하고, 제국에는 네임드 NPC가 흔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관조와 검기라니?

메르세데스가 보유한 ‘패시브’ 스킬 내역은 거의 초네임드급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설의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탐색 스킬 관조.

검성 크라우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논하지 못했던 검기.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확실해. 시스템이 명확하게 검기라고 표현하는 형태의 힘을 발휘했던 건 여태까지 크라우젤이 유일했다.’

아군의 검술 관련 스킬 위력을 증폭시켰던 그 힘 말이다.

‘검성과 동류의 힘을 지녔다는 건, 이 메르세데스라는 여자가 검성과 비견되는 검의 달인이라는 뜻인가?’

혹시 엄청난 거물 아닌가?

메르세데스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시선에 점차 큰 경계심이 서렸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메르세데스였다.

“소문보다 더 훌륭하신 분이로군요. 전설의 잠재력이라는 것은 역사에 서술된 것 이상으로 뛰어날 수도 있겠네요.”

관조 스킬로 그리드의 능력치와 스킬 일부를 확인한 메르세데스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우리 제국은 검성을 제외한 다른 전설들의 힘을 다소 낮게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앞으로는 평가를 바꿔야겠네요.”

“……”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메르세데스가 자신을 품평하는 태도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대하는 행동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내 능력치를 보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이 여자가 나보다 강하다는 뜻인가?’

사실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륙을 지배하는 사하란 제국을 대표하는 사신.

네임드 NPC고 나발이고 간에 레벨부터가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대는 제국에서 어떤 지위에 있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옥좌에 걸터앉으며 묻자 메르세데스가 속임 없이 대답하였다.

“적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위대하신 황제폐하께 부여 받은 넘버는 1. 사람들은 저를 첫 번째 기사라고 부르더군요.”

“…뭐라고?”

그리드가 질색했다.

사신의 정체가 제국 최강자 중 하나라는 첫 번째 기사였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거물이다.

“이거 굉장한데? 변방의 신생국가 따위에 그대만한 인물을 사신으로 파견하다니, 황제폐하의 저의를 도통 읽을 수가 없군?”

그리드는 실수하지 않았다.

속내야 어찌됐든 황제에 대한 칭호만큼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자칫 실수했다가는 제국에 빌미를 제공하고 언제라도 템빨국이 멸망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사하란 제국과 적대하는 건 한참 후의 미래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와신상담!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는 그리드.

그는 왕으로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템빨국의 수십 만 백성을 짊어지고 있음을 절대 잊지 않았다.

메르세데스가 살포시 웃었다.

“위대하신 황제폐하께서 저를 사신으로 보내신 이유는 템빨왕 그리드 전하를 존중해서이겠지요. 자력으로 일국을 고스란히 집어삼켜 버린 전하의 능력은 황제폐하께서도 높이 평가하고 계십니다. 치하하는 의미에서 적기사단을 대표하는 저를 사신으로 보내신 거고요.”

“치하라…”

“황제폐하께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칭찬하는 데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시곤 한답니다. 하해와 같이 큰마음을 지니신 분이시죠.”

“그렇군. 그것 참 감격스럽네.”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리드의 불쾌감이 강해졌다.

이 이상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결국 황제폐하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순간, 상냥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얼굴을 얼음장처럼 굳혔다.

눈서리를 맞은 것처럼 새하얀 피부와 투명한 청발이 그리드에게 서늘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우선 죄를 논하고자 합니다.”

“죄?”

“첫째, 사하란 제국에 공물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다하였던 에트날 왕국을 제국의 허락도 없이 멸한 죄.”

“…..”

“둘째, 서대륙의 주인인 제국의 허가도 없이 국가를 건설한 죄.”

“…..”

“셋째, 결국 왕을 자처하고도 황제폐하께 신하의 맹세를 하지 않은 죄.”

“…..”

“넷째, 제국의 신하였던 폴드 왕국을 갈취한 죄.”

“…..”

서늘한 음성으로 죄목을 낱낱이 고하는 메르세데스.

그녀를 마주한 그리드는 놀라거나 분노하기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제국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리드에게 이와 같은 죄목들을 부여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입장에선 납득해서 안 됐다. 납득하는 순간 죄인이 되고 처벌을 기다려야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그리드가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이렇게 네 개의 죄를 논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야.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예상대로군요.

역시 든든한 라우엘이다.

그는 작금의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고 대응책까지 마련해 놨다.

-지금부터 제 말을 고스란히 읊어 주세요.

이후, 그리드는 라우엘의 귓속말을 그대로 메르세데스에게 전달했다.

“네 가지 죄 모두 오해와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나는 죄를 인정할 수 없다. 우선 첫째, 에트날 왕국을 제국의 신하라고 표현함은 옳지 않다. 비록 에트날 왕국이 다른 왕국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에 공물을 바쳐 왔다고는 하나 에트날 왕국은 공식적으로 중립국이었고, 이는 제국에서도 인정했던 사안이다. 에트날 왕국이 제국에 공물을 바친 것은 대국에 대한 예의였을 뿐 신하로서의 예의가 아니다.”

“….”

“둘째, 제국의 허가를 구해야만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법안은 대륙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다 영리한 인물이었다면 눈치껏 제국에 허락을 구했을 테지. 하지만 무지해서 제국에 허락을 구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는 무지로부터 비롯된 실수. 의도적인 죄악이 아니다. 깊이 반성하는 바이다.”

“….”

“셋째, 제국도 알다시피 템빨국은 신생국이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도 않은 이때 내가 감히 황제폐하께 인사를 올리러 간다? 오만방자한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국 방문을 미루고 있었던 거고.”

“….”

“넷째, 폴드 왕국을 템빨국의 속국으로 만든 것은 템빨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15개국 전부가 템빨국을 먹잇감으로 삼으려고 하기에 나는 기세를 보여줘야만 했고, 그 과정에 의도치 않게 폴드 왕국을 속국으로 삼고 말았다. 폴드 왕국은 당연히… 제국에 반납할 생각이었다.”

힘겹게 말해나가는 그리드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신세를 한탄할 따름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서늘하게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억지와 핑계뿐이로군요. 괘씸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리드 전하의 의중은 잘 알았으니까요. 어찌됐든 결국, 템빨국은 제국에 충성할 거라는 말씀 아닙니까?”

움찔.

그리드는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우엘이 재촉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 따위 이미 다 버렸다.

“…맞다.”

“좋은 자세입니다. 황제폐하께서 예상하신대로 반응해 주시는군요. 좋아요, 지금부터 황제폐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템빨왕 그리드는 옥좌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경청하세요.”

“뭐?”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두 귀를 의심하는 그리드에게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명을 받드는 자리입니다. 예의를 갖추심이 당연하지요. 설마 싫으신 겁니까?”

“…아니, 아니다.”

이게 무슨 엿같은 상황인가 싶다.

하지만 내 행동 하나가 템빨단원 전부와 나를 믿고 따라준 백성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다. 또 무엇보다도 건국비로 투자한 수백 억 자금도 걸려있다.

아직 제국에 맞설 힘을 갖추지 못한 지금, 고작 내 자존심 하나 지킨답시고 오기를 부리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다.

‘진정해. 지금 내 행동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

꽈드득!

이를 악문 그리드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메르세데스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메르세데스가 아름다운 눈썹을 찌푸렸다.

‘굴욕이라고 느끼지 않는가?’

이 그리드라는 자, 필시 길들이기 힘든 맹수다. 경계해야만 한다.

경각심을 품은 메르세데스가 칙서를 꺼내 읽었다.

“대지와 하늘의 주인인 나 쥬앙데르크가 명한다. 짐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리드의 죄를 사하고 템빨왕의 지위를 인정한다. 또한 폴드 왕국의 반납을 요구하지 않겠다. 템빨왕 그리드와 템빨국은 감격하며 앞으로 영원토록 제국에게 충성하고 은혜를 갚아야할 것이다. 템빨국은 매달 세수의 72퍼센트를 제국에 바쳐야하며, 왕자 로드의 나이가 12살이 되는 해에 제국에 공부를 보내야한다.”

“…?”

로드가 12살이 되려면 아직 몇 년이나 남았다. 그 전에 템빨국이 강해지면 해결 될 문제다.

당면한 문제는 세수의 72퍼센트를 제국에 공물로 바쳐야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국가들이 제국에 바치는 공물은 세수의 36퍼센트라고 알고 있다만.”

“폴드 왕국을 템빨국 산하로 인정해주는 대가입니다. 템빨국은 타국보다 2배의 공물을 바쳐야하는 거죠. 받들기 싫으십니까?”

메르세데스가 도발적인 눈빛을 보냈다.

지금, 그리드를 실제로 본 그녀는 황제와 다르게 그리드를 인정하고 또한 경계하고 있었다. 품는 것이 불가능하니 내쳐야한다고 자체적인 판단을 내렸고, 그리드가 소란을 피워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리드의 뒤에는 라우엘이 있었다. 라우엘의 귓속말이 계속해서 그리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또한 그리드 본인의 정신력과 인내심도 이미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황제폐하의 명령이다. 그저 받들 수밖에 없지.”

“…보통내기가 아니시군요. 알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리드에게 살짝 목례한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대전을 떠났다.

홀로 남은 그리드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되었다.

“각오해. 다음에 만날 때 무릎 꿇게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일 테니까.”

힘.

더 큰 힘이 필요하다.

도끼눈을 뜬 그리드가 허겁지겁 달려들어 온 라우엘에게 물었다.

“제국이 요구한 양의 공물을 감당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되지?”

“세 달도 채 안 됩니다. 세 달 후부터 모든 백성과 병사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고 템빨국은 빚더미에 앉게 되겠죠. 네 달 후쯤 템빨국은 국가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멸망할 겁니다.”

“해결방안은?”

“현재 폴드 왕국에 계신 피아로 님께서 폴드 왕국의 농업 사업 진척을 예정보다 3배 이상 빠르게 해주실 것, 폴드 왕국과 세이렌으로부터 걷는 세금을 2배 인상할 것, 국가 발전 퀘스트(그리드 세트 연계 퀘스트)를 진행 중인 플레이어의 숫자가 2달 내에 5배 이상 늘어날 것,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제작 가능한 특급 물약류의 생산량을 7배 이상으로 늘릴 것, 작위를 얻은 템빨단원들이 봉급을 나라에 환원할 것. 이 정도만 실현돼도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최대 9개월까지 늘어날 겁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당연히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제국이 감히 우리를 협박할 수 없는 수준의 파워를 거머쥐는 거죠.”

생각해 본 그리드가 판게아를 떠올렸다.

“일단 나는 동대륙으로 가겠다. 그곳에서 아군을 만들어 오겠어. 그리고 이걸 피아로에게 전해주도록 해.”

“황금색 호두…?”

“황금보다 귀한 호두야. 전설의 농부인 피아로라면 재배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


7